제2화
심하윤은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거만한 척하는 임다인을 죽일 듯이 노려보다가 눈가에 눈물이 핑 돌았다.
한때 심하윤은 온 가족의 사랑을 듬뿍 받던 공주님이었다.
그녀의 오빠는 모든 좋은 물건을 그녀에게 양보했고 엄마도 무한한 사랑으로 감싸주었다.
그땐 정말 자신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 여겼는데 나중에 모든 게 바뀌었다.
엄마의 가족은 암유전 병력이 있었고 본인도 암 판정을 받았지만 기어코 심하윤을 낳으려고 했다. 그 바람에 병세가 더욱 악화하고 심하윤이 다섯 살 때 끝내 사망했다.
오빠는 그녀 때문에 엄마가 죽었다면서 한없이 원망했고 임다인이 심씨 일가에 들어온 뒤로 더욱 편애했다.
아빠도 그녀에게 등 돌렸고 온 가족이 임다인만 감싸고 돌았다.
임다인이 좋아하는 옷은 심하윤이 양보해야 했고, 좋아하는 액세서리도 양보해야 했으며 심지어 임다인이 좋아하는 남자까지 양보해야 했다.
정작 심하윤이야말로 그들의 가족이고 핏줄인데 말이다.
그때 오직 도강우만이 어려서부터 오빠처럼 심하윤을 보살펴주었다. 편애가 무엇인지, 관심받는 게 무엇인지 전부 도강우한테서 받아본 감정이었다. 물론 나중에 도강우도 슬슬 임다인에게 마음이 기울고 연애까지 하게 됐지만 여전히 심하윤을 잘 챙겨주었다.
심하윤은 이 남자를 너무 사랑한다.
그래서 기꺼이 맹비난을 받으면서도 그와 결혼했다.
다만 둘의 감정은 3년 전 그날 밤에 산산조각이 났다.
이 모든 사실을 감안하더라도 임다인 같은 야비한 인간은 심하윤의 가족을 평가할 자격이 없고 그녀를 비난할 자격은 더더욱 없다.
심하윤은 겨우 바닥을 짚고 일어나 허리를 곧게 펴고 그녀를 째려보며 입꼬리를 씩 올렸다.
“나 아직 강우 와이프야. 넌 고작 남 보여주기 부끄러운 내연녀일 뿐이고. 대체 뭘 그렇게 거들먹거려? 고작 우리 부모님께 후원받던 거지충이 이제 뭐 이 집안 막내딸이라도 된 것 같아? 수작 좀 부리면 내 자리를 뺏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해? 우리 가족이나 도강우나 네가 아무리 개수작을 피워도 평생 내 그림자 속에 가려진 년이야! 그러니까 정신 차려!”
말을 마친 후 임다인의 앙칼진 눈빛도 무시한 채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
심하윤은 택시에 앉아서 지난 3년간 도강우와 함께 했던 추억을 되새겼다.
참 아이러니하게도 좋았던 추억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이 결혼생활에서 그녀는 영원히 상처받고 냉대를 받는 존재였다.
생을 마감하는 순간까지 도강우로 채우고 싶진 않았다.
그녀는 무거운 걸음으로 도강우의 집에 들어섰는데 짙은 장미 향이 코끝을 찔렀다.
코가 너무 간지러워서 본능적으로 입과 코를 가렸다.
눈 앞에 펼쳐진 건 바람에 흩날리는 장미꽃들이었다.
아름답긴 하지만 심하윤에겐 죽음을 부르는 독약이나 다름없다.
뭐 이제 곧 죽을 운명이라 괜찮긴 하지만...
그녀는 허리를 숙이고 장미 한 송이를 만지려다가 가시에 손이 찔렸다.
빨간 피가 바닥에 뚝뚝 떨어지고 그녀의 마음도 씁쓸해졌다.
역시 내 것이 아닌 물건은 가까이하려고 해도 대가를 치러야 하는 법이다.
이 장미꽃들은 도강우가 장미를 좋아하는 임다인을 위해 손수 심었다.
심하윤은 꽃가루 알레르기가 있어서 심지 말라고 그렇게 당부했건만 돌아오는 건 정작 이 말뿐이었다.
“싫으면 네가 꺼지던가.”
요염한 장미는 그녀의 비굴하고 초라한 결혼생활과 너무 선명한 대비를 이루었다.
심하윤이 점점 숨이 가빠져서 눈을 질끈 감았다가 자리를 떠났다.
방안의 금고를 열고 이혼합의서를 꺼내 무심코 살펴보았다.
3년 전 설렘과 기대에 찬 마음으로 도강우와 신혼 밤을 즐길 준비가 다 되었는데 이 남자는 애틋한 사랑으로 보듬긴커녕 이혼합의서를 툭 건넸다.
심하윤은 떨리는 손으로 그 서류를 펼쳤다.
원망, 서러움, 슬픔... 무수한 감정이 한데 뒤섞였지만 그중에서 가장 많은 건 아무래도 해탈이었다.
이제 드디어 모든 걸 내려놓고 잘못된 결혼생활에 종지부를 찍을 때가 되었다.
철컥.
바로 이때 대문이 열리고 도강우가 몸을 비틀거리며 들어오더니 진한 술 냄새를 풍겼다.
“술 마셨어?”
심하윤이 말을 채 잇기도 전에 그가 갑자기 품에 와락 끌어안고 거침없이 키스를 퍼부었다.
“강우야...”
화들짝 놀란 그녀는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그를 힘껏 밀쳤다.
하지만 이 남자가 더 세게 끌어안고서 아예 침대에 깔아 눕힌 후 뜨거운 키스가 입술을 타고 목까지 흘러내렸다.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상황에 심하윤이 온몸을 움찔거렸다.
“안돼, 강우야, 정신 좀 차려. 너 지금 취했어!”
그녀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진정해, 제발!”
다만 도강우는 멈출 줄 모르고 그녀의 몸을 더듬기 시작했다.
방 안의 온도가 뜨겁게 타올랐고 심하윤은 그의 손끝이 피부에 닿을 때마다 참지 못하고 신음을 냈다.
둘 사이에 긴장되면서도 야릇한 분위기가 흘러넘쳤다.
“다인아...”
이제 곧 그에게 몸을 맡기려 할 때 도강우가 뜬금없이 임다인을 찾았다. 그 순간 심하윤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차갑게 식었다.
역시 착각이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임다인의 이름을 부르다니, 심하윤은 입술이 파르르 떨리고 뜨겁게 타올랐던 얼굴도 서서히 절망에 휩싸인 채 사색이 되었다.
“도강우!”
그녀는 남자의 가슴팍을 힘껏 밀치면서 말했다.
“잘 봐, 나 하윤이야!”
도강우는 그런 그녀의 손을 다시 짓누르고 깍지를 꼈다.
“얌전히 있어...”
“안돼.”
심하윤은 그의 강압적인 공격에 반항하지 못한 채 결국 온 마음이 너덜너덜해지고 비참한 밤을 지새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