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화
이른 아침, 눈 부신 햇살이 커튼 사이로 비치고 침대에 누운 심하윤은 얼굴이 혈색 없이 창백할 따름이었다.
“깼어?”
중저음의 감미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강우는 박시한 샤워가운을 두르고 욕실에서 나왔고 축축이 젖은 머리에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섹시한 복근에 물방울까지 고이니 남자의 매력이 물씬 풍겨서 심하윤의 퀭한 눈빛까지 살짝 떨렸다.
그녀는 침대에서 일어나며 이불이 바닥에 스르륵 떨어지고 새하얀 속살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하얀 피부에 빨간 자국이 군데군데 났고 정열적인 어젯밤을 고스란히 증명해 주었다.
이 키스 마크는 죄다 임다인을 위한 흔적이다.
그녀가 아무 말 없자 도강우가 미간을 구겼다.
몸에 난 키스 마크를 보고 있자니 마음이 더 갑갑해졌다.
심하윤에게 측은지심이 생기기도 전에 또다시 기분이 언짢아진 도강우였다.
“네가 줄곧 바라던 거잖아?”
그는 긴 다리를 내뻗으며 소파에 가서 앉아 담뱃불을 지폈다.
담배 연기가 그의 차가운 외모를 싹 다 가렸다.
“몸 바쳐서 내 와이프가 되는 거, 네 소원 아니야? 제발 좀 슬픈 척 그만해!”
심하윤은 또다시 심장을 쿡 찌르듯 아팠다.
그녀는 쓴웃음을 지으며 차오르는 몸의 고통도 꾹 참고서 이혼합의서를 건넸다.
“강우야, 우리 이만 이혼하자.”
또렷한 그녀의 목소리에 도강우가 두 눈이 한없이 음침해졌다.
그는 한참 후 담배를 한 모금 깊게 빨고 야유 조로 물었다.
“지금 네가 무슨 말 하는지는 알아?”
“응.”
도강우는 그녀의 마음을 훤히 꿰뚫어 볼 기세였다.
“아무리 들러붙어도 소용없으니 이제 날 밀어내겠다? 작전 바꿨어?”
심하윤은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단호한 말투로 대답했다.
“그런 거 아니고 지금 아주 진지해. 이혼합의서에 의견 없다면 바로 사인해줘.”
사인만 하면 둘은 곧 남남이 된다. 이 관계가 미련 없이 끝나버리게 된다.
도강우는 서서히 미소가 사라지고 재떨이에 담뱃불을 지진 후 그녀 앞으로 다가갔다. 커다란 체구로 마치 그녀를 집어삼킬 것만 같았다.
“애초에 나랑 결혼하려고 갖은 애를 쓰더니 이제 와서 다 얻으니까 이혼하겠다고? 내가 그 말을 믿을 것 같아?”
그는 예리한 눈길로 심하윤을 째려보며 그녀의 마음을 후벼 팠다.
다만 심하윤은 더 이상 예전처럼 그의 말 한마디에 상처받던 여자애가 아니다.
그녀는 도강우를 빤히 쳐다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네가 믿든 말든 그해 일은 내가 그런 게 아니야. 여기 사인만 하면 앞으로 두 번 다시 너한테 매달릴 일 없어! 이 또한 네가 줄곧 바라던 거 아니야?”
도강우는 짙은 눈길로 그녀를 쳐다보며 제발 홧김에 한 말이길 바랐지만 여느 때보다 진지한 눈빛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녀 말대로 이런 상황에 기뻐해야 정상인데 왜 자꾸만 짜증이 밀려올까?
이 여자는 애초에 그에게 시집오지 못해서 안달이더니 왜 선뜻 이혼을 요구하는 걸까?
이 속엔 분명 어떤 꼼수가 섞였을 것이다.
“너한텐 결정권 없어!”
심하윤이 뭐라 더 말하려 할 때 도강우의 휴대폰이 울렸다.
발신자 번호를 보더니 그는 곧장 전화를 받고 나긋하게 말했다.
“그래, 다인아.”
여자의 나긋한 목소리가 방안에 울려 퍼지고 도강우도 긴장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알았어, 금방 갈게.”
말을 마친 후 그는 성급하게 집을 나섰다.
한편 심하윤은 손에 든 이혼합의서를 보면서 저 자신이 우스울 따름이었다.
‘강우야, 내게 해탈할 기회는 줬어야지.’
...
그날 오후.
심하윤은 심플한 슬립 원피스를 입고 혈색을 띠게 연한 화장까지 마치고는 택시를 타고 자선 경매 행사장으로 향했다.
다들 그녀가 도강우에게 빌붙어 사는 여자라고 놀려대지만 또 다른 그녀의 정체를 전혀 모른다.
사실 심하윤은 국내 유명 컬렉터이자 최고의 감정사로 물건의 진위를 가려내는 안목이 탁월하다.
그녀의 능력, 그녀가 가진 재부는 사람들이 가히 짐작할 수 없는 것들이다.
자선 경매 행사장에 크리스털 샹들리에가 눈 부신 빛을 쏟아냈고 각계 유명인사들이 자리에 앉아서 나지막이 담소를 나눴다.
“오늘 그 월드 클래스 컬렉터도 오신다며?”
“그 신비한 알렉스 말하는 거야?”
“그분도 오신다니, 오늘 엄청 신비한 보물이 등장하겠네!”
한편 그들이 거론하는 알렉스는 박시한 티셔츠를 입고 방금 옆을 스쳐 지나갔다.
그랬다. 모두가 쉬쉬거리는 알렉스가 바로 심하윤이다. 그녀는 사람들의 얘기를 들으며 입꼬리를 씩 올렸다.
수집관 관장의 딸이었던 심하윤의 어머니는 그녀의 아버지와 함께하려고 일찍이 가족들과 연을 끊었다는 소문이 돌았는데 사실은 그게 아니었다.
심하윤이 이런 성과를 이룰 수 있는 건 외할아버지의 지지가 너무 컸다.
외할아버지는 그녀에게 발판을 만들어주셨고 또한 그녀는 한 번 보면 잊지 않는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으며 예술품의 재질, 공예, 역사에 대한 훌륭한 감정 능력까지 갖췄다.
5년 동안 알렉스라는 신분으로 그녀가 매번 손만 댔다 하면 이 바닥에 큰 파란을 일었다.
그녀의 말 한마디에 예술품 가격이 롤러코스터를 탄 것처럼 기복을 이뤘고 경매장에서 엄청난 작품이 나올 때마다 몇 달 전부터 그녀에게 초대장을 보내오곤 했었다.
수집계에서 그녀에 관한 이런 얘기가 떠돌고 있다.
알렉스가 고개를 한 번 끄덕이면 아무리 보잘것없는 예술품이라도 하룻밤 사이에 유명해질 수가 있다.
여기 있는 모든 이가 알렉스의 명성을 널리 전해 들었다.
다만 오늘 그녀는 보물을 얻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 바로 저 쓸모없는 조각 때문에 찾아왔다.
그녀는 구석에 앉아서 잠자코 기다렸다.
경매는 차질 없이 진행되었고 귀중한 경매품들이 앞다투어 입찰되었다.
드디어 깨진 유리로 정성스럽게 만든 예술품이 등장하자 심하윤의 덤덤한 눈동자에 비로소 빛이 감돌았다.
유리는 조명 아래에서 기이한 빛을 반사하며 등장하자마자 많은 이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하지만 놀라움도 잠시, 장내가 곧 다시 잠잠해졌다.
“저런 유리 조각을 왜 경매에 내놓는 거지?”
“아직 모르는구나. 저 유리는 예전에 꽤 비쌌는데 화재가 나면서 훼손된 것 같아.”
“흠집 있는 예술품이 무슨 가치가 있다고!”
“...”
경매사와 백스테이지 직원이 서로 눈을 마주쳤다. 직원은 하염없이 고개를 내저었고 경매사는 진행 속도를 올리는 수밖에 없었다.
“다들 이 작품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다음...”
“10억이요!”
바로 이때 청아한 목소리가 어수선한 분위기를 뚫고 흘러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