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화
홍유빈은 두 개의 캐리어를 끌고 계민호의 별장에서 나왔고 마침 장을 보고 돌아오던 가사도우미가 그녀를 보고 잠시 멈칫했다.
“유빈 씨, 출장 가시는 거예요?”
홍유빈은 가볍게 웃었다.
“네, 출장 가요.”
“어머, 내가 장도 봐 왔는데. 돌아오면 연락 줘요. 좋아하는 음식 해줄게요.”
‘돌아온다고?’
그녀는 나직하게 웃었다. 곧 이곳에는 새로운 여주인이 생길 테고 그녀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감사해요, 아주머니. 저 먼저 갈게요.”
가사도우미는 홍유빈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왠지 모르게 이상하다고 느꼈지만 무엇이 이상한지는 말로 설명할 수 없었다.
별장 안으로 들어가고 나서야 많은 물건이 사라졌다는 걸 알아챘다. 분홍빛의 아기자기한 장식들이 전부 없어진 상태였다.
2층 드레스룸으로 올라가 옷장을 열어 보니 다행히 홍유빈의 옷은 그대로였다.
다만 남아 있는 것들은 전부 계민호가 사준 물건들이었고 그녀는 그것들을 하나도 가져가지 않았다. 홍유빈이 챙긴 것은 전부 자신의 돈으로 마련한 것뿐이었다.
가사도우미는 여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아 스위스에 있는 자신의 사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사장님, 오늘 유빈 씨가 와서 물건을 꽤 많이 가져갔어요.”
계민호는 잠시 멈칫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어디로 간다고는 말을 하던가요?”
“며칠 출장 간다고 했어요.”
‘출장이라고? 내가 국내에 없는데 내 개인 비서인 홍유빈이 대체 무슨 출장을 간다는 건지?’
홍유빈과의 대화창은 며칠 전에서 멈춰 있었다.
계민호는 핸드폰에 찍힌 몇 통의 부재중 전화를 보고 문득 멈췄다. 막 다시 전화를 걸려는 순간 강다혜의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아파...”
‘홍유빈은 국내에 멀쩡히 있어. 그런 사람한테 무슨 일이 있을 리가 없잖아.’
‘아마 며칠 동안 내가 전화를 안 받아서 삐친 거겠지.’
계민호는 핸드폰을 내려놓고 급히 그녀에게로 갔다.
“왜 그래, 다혜야?”
강다혜는 주방에서 과일을 자르다 손가락을 베었다.
“민호 오빠, 나 너무 바보인가 봐요... 오빠 과일 깎아주려다가 그만...”
계민호는 곧바로 구급상자를 가져와 그녀의 손을 감싸며 다정하게 머리를 쓰다듬었다.
“난 네가 이렇게 어설픈 게 좋아.”
강다혜는 수줍게 고개를 숙이며 애교 섞인 투로 말했다.
“아, 진짜. 오빠도 참... 그런데 오빠, 내일 귀국하면 언니를 불러도 될까요?”
계민호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는 홍유빈이 강다혜의 명목상의 언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너 언니랑 사이 안 좋잖아?”
강다혜는 커다란 눈을 반짝이며 깜빡였다.
“사이가 안 좋으니까 더 화해하고 싶어서요. 엄마랑 언니 사이가 틀어진 것도 나 때문이잖아요. 나도 엄마를 위해 뭔가 해야죠.”
“다혜야, 넌 정말 착하구나.”
계민호는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언니랑 화해는 나중에 하자. 내일 귀국인데 네 환영 파티 분위기 망치고 싶지 않아.”
강다혜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그럼 알겠어요.”
그녀는 줄곧 알고 있었다. 홍유빈은 자신의 대체품에 불과하다는 걸.
한 번은 계민호의 핸드폰이 잠겨 있지 않아 홍유빈이 보낸 메시지를 보게 되었고 두 사람이 몰래 사귀고 있다는 걸 알게 됐다. 그 뒤로 강다혜가 조금만 수를 쓰면 계민호는 곧장 그녀를 보러 날아왔다.
그제 올린 그 인스타 역시 강다혜가 일부러 올린 것이었다. 내일 자신이라는 진짜 계민호의 여자친구가 귀국하면 홍유빈이라는 대역은 사라져야 했다.
...
홍유빈은 다음 날 회사에 인수인계를 하러 갔다.
맨디는 아쉬운 눈길로 그녀를 보며 말했다.
“유빈 씨, 정말 남을 생각은 없는 거예요? 복지 조건 문제라면 내가 위선에다 얘기해 볼게요.”
윗선이 누구겠는가. 당연히 계민호에게 말하겠다는 뜻이었다.
홍유빈은 쓴웃음을 지었다.
“맨디 언니, 괜찮아요. 그냥 개인적인 사정이 있어요.”
홍유빈은 계민호의 비서들 가운데 유일한 여자였다.
과거 지원했던 여자 비서들은 전부 다른 속셈을 품고 있었고 결국 계민호가 남긴 사람은 홍유빈뿐이었다.
그녀는 세심했고 상황 대처도 능숙해 크고 작은 일을 모두 매끄럽게 처리해 맨디의 부담을 덜어주었다.
계민호의 비서실장인 맨디는 홍유빈을 높이 평가했다. 눈앞에 있는 이 아름다운 여자는 선을 알고 규칙을 지켰지만 그렇다고 떠나겠다는 사람을 억지로 붙잡을 수는 없었다.
“알겠어요. 유빈 씨 사직서는 내가 수리할게요. 다만 계 대표님이 승인할지는 출장에서 돌아와야 알 수 있어요.”
홍유빈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감사해요. 전 다른 업무 보러 갈게요.”
그녀는 탕비실에 갔다가 우연히 행정부 직원들의 수다를 들었다.
“그거, 들었어요? 우리 계 대표님 있잖아요, 이번에 출장 간 거 아니라 어린 여자친구 보러 간 거래요!”
“정말요? 계 대표님이 여자한테 관심 없다는 소문이 있었잖아요. 제가 이 회사 다닌 지 몇 년인데 스캔들 한 번도 못 들었다고요.”
“에이, 그럴 리가요. 계씨 가문이랑 강씨 가문은 예전부터 혼담이 오가고 있었대요. 우리 대표님이 강씨 가문 딸이 성인 될 때까지 기다렸던 거죠. 파파라치가 우리 대표님 따라다니면서 사진을 찍었는데 그 여자 보호하려고 기사 다 없애버렸대요. 그 소식 듣고 저 완전 우리 대표님 멋져 보이더라니까요!”
홍유빈은 컵이 출수구에서 벗어난 걸 몰랐고 끓는 물이 그대로 손등에 쏟아졌다.
“아...”
그녀는 급히 손을 거둬들였지만 손등엔 붉은 자국이 퍼지며 찌르는 듯한 통증이 밀려왔다.
“어머, 유빈 씨. 왜 이렇게 조심성이 없어요?! 빨리 화장실 가서 찬물로 씻어요! 물집 생기겠어요.”
누군가가 그녀의 덴 손을 보고 다급히 말했다.
홍유빈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지금 갈게요.”
세면대에서 찬물을 틀어놓은 채 방금 들은 대화가 떠올라 가슴이 쓰렸다.
이미 그들은 결혼 얘기까지 오갔다는 데 그간 자신은 계민호에게 무엇이었을까 생각했다. 그녀는 바보처럼 아직도 남자가 자신을 공식적으로 공개하길 기다리고 있었다.
세면대 위에 놓인 핸드폰 화면이 켜졌다. 계하린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유빈아, 오늘 밤 우리 삼촌이 여자친구 데리고 환영 파티한대. 나 가기 싫은데, 네가 같이 가줄래?]
홍유빈은 눈가의 습기를 눌러 참았다.
‘이미 귀국했구나.’
[미안해, 하린아. 그날은 야근해야 할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