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화
홍유빈은 막 처치를 마치고 병원에서 나오는 길에 맨디에게서 다급한 전화를 받았다.
“유빈 씨, 치료는 받았어요? 우리 딸이 열이 나서 그런데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요? 계 대표님의 서명이 꼭 필요한 서류가 하나 있어요. 지금 회사로 돌아와서 대신 좀 전달해 줄 수 있을까요? 나중에 밥 한 끼 살게요.”
이 정도까지 말하는데 홍유빈은 당연히 거절할 수는 없었다.
“네, 맨디 언니. 지금 회사로 돌아가서 가져갈게요.”
룸 앞에 도착한 홍유빈은 서류를 든 채 잠시 멈췄다. 문은 반쯤 열려 있었고 안에서는 웃음소리가 가득했다.
“다혜야, 이번에 돌아오면 우리 이제 너 형수님이라고 불러야겠네. 형이 널 엄청 좋아하잖아!”
남자는 느슨한 자세로 의자에 기대어 앉아 자연스럽게 강다혜의 의자 뒤에 손을 올려두고 있었다. 소유욕이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강다혜는 남자의 복부를 콕 찌르며 수줍게 얼굴을 가렸다.
“아아, 뭐예요! 민호 오빠, 사람들이 다 절 놀리잖아요!”
계민호는 눈을 내리깔고 가볍게 웃었다.
“놀린 거 아니야. 아니면, 얘네들 형수 되는 게 싫어?”
그 말을 듣는 순간 문밖에 서 있던 홍유빈의 몸이 굳었다. 이미 무뎌질 대로 무뎌진 심장이 다시 한번 쿡쿡 찔렸다.
그녀는 손을 들어 문을 두드렸다.
“누구야?”
누군가 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
홍유빈은 문을 열고 천천히 룸 안으로 들어가 맨 앞에 앉은 남자를 차분히 바라봤다.
“대표님, 급한 건이라 이 서류에 대표님의 사인이 필요합니다.”
그러자 누군가 농담조로 말했다.
“오, 형. 이 여자가 형 비서야? 이렇게 예쁜데 비서로 두기엔 아까운 것 같네.”
이 말을 한 재벌 2세는 느슨한 태도로 그녀를 훑어봤다. 그 노골적인 시선에 홍유빈은 역겨움을 느꼈다.
계민호의 차가운 눈빛이 순간 좁아졌다. 그녀일 줄은 예상하지 못한 듯했지만 이내 평정을 되찾았다.
“이리 와. 줘.”
홍유빈이 서류를 내밀자 그는 힘 있게 서명했다. 들켰다는 것에 대한 당혹감은 전혀 없었고 오히려 목소리는 담담했다.
“가져가.”
강다혜는 경계하듯 홍유빈을 한 번 훑어보고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민호 오빠, 언니도 같이 남아서 놀게 해요.”
강다혜는 미소를 지은 채 덴 손인 줄도 모르고 홍유빈의 손을 붙잡았다.
“언니, 오랜만이잖아요. 같이 좀 놀다 가면 안 돼요?”
홍유빈은 숨을 들이켰고 통증에 눈물이 맺힐 뻔해 그녀의 손을 거칠게 뿌리쳤다.
“손 치워! 아니, 난 괜찮아. 바로 회사로 돌아가야 하거든.”
순식간에 예상치 못한 홍유빈의 반응에 룸 안 사람들이 모두 굳어버렸다. 계민호는 미간을 찌푸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다혜도 호의로 그런 건데, 그 태도는 뭐야? 지금 당장 사과해.”
홍유빈은 손바닥에 손톱이 파고들 만큼 주먹을 꽉 쥐며 흘러나오려는 눈물을 겨우 참았다.
“전 잘못 없어요. 사과도 안 해요. 이 일로 절 해고하신다면 할 말 없습니다.”
그녀는 급히 돌아섰다. 단 1초라도 더 있으면 미쳐버릴 것 같았다.
계민호는 이유 없는 짜증이 치밀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만. 너희는 먼저 먹어.”
그는 그렇게 말하곤 바로 뒤따라 나갔다.
사람들은 서로 시선을 돌리며 눈치만 보았다. 이때 누군가 분위기를 무마하려 웃으며 말했다.
“하하, 우리 형 비서 오늘 제대로 찍혔네! 그런데 다혜야, 저 여자를 왜 언니라고 불러?”
강다혜는 대충 웃어넘겼을 뿐 설명할 기분은 아니었다.
같은 시각 복도에서.
“홍유빈, 멈춰!”
계민호가 뒤에서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홍유빈은 애써 평정심을 유지했다.
“대표님, 또 무슨 시키실 일 있으신가요? 이대로 나오시면 안 되는 거 아닌가요? 여자친구가 오해하면 안 되잖아요.”
계민호는 미간을 찌푸리다가 곧 마음이 약해졌다.
“사적으로는 그렇게 부르지 말라 했잖아. 손은... 왜 그래?”
그는 홍유빈의 손등 상처를 보고 있었다.
홍유빈은 비웃듯 웃었다.
“신경 쓰지 마세요. 어차피 우리 헤어졌잖아요.”
“헤어져?”
계민호는 비웃듯 웃으며 목소리가 차갑게 식었다.
“누가 우리가 사귀는 사이라고 했지?”
심장에서 시작된 극심한 통증이 온몸으로 퍼져 홍유빈은 입술을 악물었다.
“알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앞으로 우린 아무 관계도 아니니까요.”
계민호는 어두운 얼굴로 그녀가 멀어지는 걸 지켜봤다. 다시 따라가려는 순간 뒤에서 여자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민호 오빠, 왜... 아직도 안 들어와요?”
계민호는 깊게 숨을 들이마신 뒤 몸을 돌려 부드러운 미소 지었다.
“응, 가. 다혜야.”
...
홍유빈은 등을 돌리자마자 더는 참지 못하고 눈물이 터져 나왔다. 마음속 마지막 방어선마저 함께 무너진 듯했다.
그녀는 호텔 밖에서 힘없이 기둥에 기대어 섰고 어깨가 미세하게 떨렸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그림자조차 알아채지 못했다.
남자는 한 손으로 그녀 옆을 짚고 몸을 숙였다. 나른하고 낮은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보아하니, 내 아내는... 방금 막 실연당한 것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