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88화
유희는 휴게실로 향하던 발걸음을 멈추고 제자리에 굳어버렸다. 충격으로 안색이 하얗게 질렸고 호흡마저 가빠졌다.
“어제 우리 A시에서 행복한 하룻밤 보냈잖아. 오늘 또 찾아오면 어떡해? 꼬리가 길면 밟힌다고, 너무 자주 만나면 유희한테 들킬 텐데…….”
윤설의 걱정스럽고 난처한 목소리.
“신걸아, 너 많이 힘들고 고통스러운 거 알고 있어. 애들을 위해 지금껏 참고 견딘 거. 애들에게 자상한 아빠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유희를 사랑하는 척한 거…… 나, 다 알고 있어. 나도 괴로워. 그때 내가 유희랑 결혼하라고 강요하지 말았어야 했어……. 그래서 난 지금 전에 네가 얘기했던 그 제안에 동의해. 적당한 때에 유희랑 이혼해. 중요한 것은, 내가 너를 너무 사랑해, 너 없으면 안 돼…… 유희는 절대로 나한테서 널 뺏지 않을 거야.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남자를 차지한다고 좋은 결과가 있는 건 아니니까…….”
원유희는 자기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눈에 물안개가 낀 뜻 시야가 흐릿해졌다.
더 이상 듣고 있을 수 없어 몸을 돌려 탁자 위의 도시락을 들고 정신없이 사무실을 뛰쳐나왔다.
윤설은 바깥의 동정을 듣고 나서야 휴게실 문을 열고 나왔다.
그렇다. 휴게실 안에는 그녀 혼자뿐이었다. 김신걸이 오늘 바깥 용무로 바쁘다는 것을 알고 미리 여기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자기 남편이 전 약혼녀와 함께 있는 게 어떤 느낌인지 제대로 맛보게 해주리라. 원유희를 궁지로 몰 때까지!
원유희는 전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곧장 주차장에 도착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나오면서 발걸음이 꼬이면서 앞으로 넘어졌다.
“아!”
손에 든 도시락이 바닥에 떨어져 모두 뒤집혔다.
원유희는 준비한 음식들이 바닥에 흩어져 있는 것을 보고는 줍지도 않고 고개를 들고 차로 향했다.
차에 오르자, 그녀의 안색이 좋지 않은 것을 보고 운전기사는 물었다.
“사모님, 빨리 오셨네요. 점심 도시락 배달은 잘하셨습니까?”
“없었어요.”
원유희가 말했다.
사람이 없다니, 기사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그는, 원유희가 기분이 좋지 않은 건 헛걸음을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고는 본의 아니게 위로를 건넸다.
“괜찮아요, 사장님께서 사모님의 마음을 다 알고 계실 테니…… 다음에 다시 도시락 배달 옵시다.”
원유희는 이번 한 번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사전에 다음은 없다.
드래곤 그룹에 처음 왔을 때는 김신걸과 윤설이 껴안고 있는 모습을 봤고, 두 번째 방문 때는 휴게실에서의 ‘밀회’를 봤다.
휴게실이 뭐 하는 곳인지 그녀도 잘 알고 있다.
그냥 단순하게 대화할 거면 왜 굳이 휴게실에서…….
원유희는 고개를 숙이고 무릎에 놓인 손가락을 꽉 쥐었다. 창백한 것이 그녀의 안색과 같았다.
김신걸과 윤설이 함께 A시에 있었던 것은 우연의 일치라고 생각했는데…… 결국은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꼴이 됐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임민정이 관심을 가지고 물었다.
“사모님, 일찍 돌아오셨네요? 사장님과 함께 드시지 않고요?”
“바쁜 사람이잖아요.”
임민정은 원유희의 안색이 좋지 않은 것을 보고, ‘작전 성공’했음을 눈치챘다.
그리고 뒤따라 가면서 유희의 속을 뒤집었다.
“사장님이 사모님 보시고 엄청나게 좋아하셨죠? 평소에 어전원에서도 사모님을 극진하게 챙기셨는데…… 예전에 윤설 아가씨는…….”
자신의 말실수를 깨달은 듯, 그녀는 급히 입을 다물었다.
원유희는 발걸음을 멈추고 물었다.
“네? 뭐라고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내가 함부로 입 놀린걸, 집사님이 알면 틀림없이 저를 해고할 겁니다.”
임민정이 걱정하며 말했다.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않을게요.”
원유희가 말했다.
임민정은 우물쭈물하며 말했다.
“그니까…… 예전에 윤설 아가씨가 여기에 살 때, 사장님은 아가씨에 대해 각별하셨어요. 지금 사모님과는 다르게요……. 윤설 아가씨가 피아노 연주할 때면, 사장님은 소파에 앉아 경청하시고, 두 분 로맨틱하게 촛불 만찬도 즐기시고……. 지금도 윤설 아가씨의 방은 그대로 있어요. 사실 그 방은 눈가림용이에요, 아가씨는 보통 안방에서 지냈고요. 그 뒤에는…….”
“그 뒤에는 내가 왔고…… 윤설은 갔고?”
원유희가 물었다.
“사실 어전원의 사람들이 사모님에게 미처 말 못 한 얘기가 있어요. 사모님이 안 계실 때 사장님은 가끔 윤설 아가씨를 데려와요…….”
임민정의 목소리가 갈수록 작아졌다.
원유희는 마음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 같았다.
그녀는 일찍이 짐작하고 있었다. 김신걸의 베개 밑에서 윤설의 귀걸이를 발견한 것이 바로 증거였다.
그때도 그녀는 신걸을 사랑하는 이상, 집에서 남편을 오매불망 기다리는 현모양처가 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자신을 위로했고 기만했다.
김신걸이 돌아올 수만 있다면…….
그런데 지금 그녀의 기분으로는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