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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94화

육성현의 얼굴색은 엄혜정의 설명으로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피임하지 않은 상황에서 계속 관계를 가졌기에 육성현은 엄혜정이 틀림없이 임신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오빠, 사람을 시켜서 생리대를 좀 사다 주면 안 돼요? 안 가져와서요.” 엄혜정은 떠보는 말투로 물었고 육성현은 어두운 표정을 그대로 유지하며 몸을 돌려 떠났다. 밖의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듣자 엄혜정은 바로 유리문을 닫아버렸다. 엄혜정은 육성현에게 피임약을 먹고 있었다는 사실을 들키면 안 되었다. 그때 엄혜정은 만약을 대비하여 두 가지 피임약을 샀다. 비타민 병에 넣은 피임약은 육성현에게 발견됐고, 다른 하나는 옷장 안에 숨겨두었다. 육성현은 엄혜정이 한 수를 두었을 거라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절제를 모르는 육성현 탓에 임신하는 것은 시간문제일 것이다. 첫 번째 임신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이제는 미리 싹을 잘라버릴 수 있었다. 육성현은 정상적인 사람이 아니었고 엄혜정은 그런 사람의 아이를 낳을 순 없었다. 그러면 그보다도 더 슬픈 비극은 없을 것이다. 유리문이 열렸고 물건이 담긴 봉투가 엄혜정의 발끝 앞에 던져졌다. 엄혜정이 고개를 들자 육성현은 이미 몸을 돌려 갔다. 엄혜정은 봉투를 열어보았는데 여러 가지 유형의 생리대가 있었다. 처음으로 산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욕실을 나서자 소파에 앉아 긴 다리를 꼬고 주위에 사람은 하나도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핸드폰을 보고 있는 육성현이 눈에 들어왔다. “당신이 사다 준 거야?” 엄혜정은 침대 옆에 앉아서 물었다. “예전에도 사다 준 적이 있었잖아.” 육성현의 표정은 아직도 조금 전처럼 어두웠다. 엄혜정은 자연스럽게 예전 김하준이랑 사귀었을 때 그가 자기에게 생리대를 사다 준 일이 생각났다. 한밤중에 살금살금 슈퍼마켓으로 갔는데 물건을 사러 간 게 아니라 강도처럼 보였다. 엄혜정의 표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는데 예전의 기억을 딱히 떠올리고 싶지 않은 눈치였다. 이 남자를 더 이상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을 때 이전의 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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