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화
박아윤은 조사한 주소를 따라 덜컹거리는 길을 달려갔다. 박씨 저택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저녁이었다. 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기침 소리와 함께 온화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늦은 시간에 누구시죠?”
박아윤은 갑자기 긴장되었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랐으니까. 만약 그들이 자신을 받아주지 않는다면 어떡해야 하는 걸까?
망설이는 사이 대문이 열리고 초췌하지만 잘생긴 중년 남자의 얼굴이 나타났다. 그는 박아윤을 보더니 놀란 듯 물었다.
“설마... 아윤이니?”
이 사람은 그녀의 아버지 박창진이 틀림없었다. 서로 너무 닮았으니까.
박아윤은 옷자락을 꼭 쥐며 긴장감에 손바닥이 땀으로 흥건했다. 그녀는 한참을 망설인 끝에 단 한 글자로 답했다.
“네.”
곧이어 집 안에서 탁자와 의자가 넘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남자는 그녀를 돌아볼 겨를도 없이 안으로 달려갔다.
박아윤은 텅 빈 문 앞에 멍하니 서 있었다. 그녀는 왠지 덩굴에 얽힌 듯한 답답함이 느껴졌다.
하긴, 임지효가 박씨 가문에서 20년을 자랐는데 갑자기 딸이 바뀌었다니 누가 선뜻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들이 오랫동안 박아윤을 데리러 오지도, 연락도 하지 않았다는 것은 이미 그들의 태도를 보여주고 있었다.
박아윤은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며 떠나려 했다. 그때 안에서 어지러운 발소리와 함께 두 사람이 휘청거리며 문 앞까지 달려 나왔다. 이어서 여자의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윤이는? 우리 아윤이 어디 있어?”
여자는 나이가 좀 들었고 얼굴에 세월의 흔적이 묻어났다. 하지만 또렷한 이목구비와 얼굴형이 젊은 시절 미인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다만 지금 그 미인은 한 손으로 박창진의 부축을 받고 다른 한 손으로는 허공을 더듬으며 힘겹게 실눈을 뜨고 있었다. 앞을 보지 못하는 게 분명했다.
이 사람은 박아윤의 엄마, 유선영이었다.
유선영이 발을 잘못 디뎌 문지방에 걸려 넘어질 뻔하자 박아윤은 거의 반사적으로 그녀를 부축하며 말했다.
“저 여기 있어요.”
다음 순간, 유선영이 그녀를 품에 꼭 끌어안았다.
“아윤아! 우리 딸!”
낯설지만 따뜻한 향기가 코끝을 찔렀다. 이게 바로 엄마의 냄새일까?
박아윤은 임씨 가문에서 단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었다.
김하정은 그녀를 아끼긴 했지만 성격을 탐탁지 않아 했다. 사사건건 말대꾸하니 둘은 가까워질 수가 없었다.
박아윤은 자신이 임씨 가문의 친딸이 아니란 말을 들었을 때도 울지 않았고 집에서 쫓겨날 때도 울지 않았는데 지금은 마치 옥죄이던 긴장이 풀린 것처럼 서러움이 북받치고 가슴이 저렸다.
한편 그녀가 눈물을 흘리기도 전에 박창진이 엉엉 울면서 가슴팍을 두드렸다.
“흐어엉, 우리 아윤이가 드디어 돌아왔네. 난 또 네가 우릴 버린 줄 알았어. 흐엉.”
박아윤은 눈물이 쏙 들어가고 속수무책 해하며 박창진을 쳐다봤다.
유선영도 더는 슬퍼할 겨를 없이 박창진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다.
“그만 울고 일단 아윤이부터 방에 들여보내요.”
박창진은 알겠다면서 눈물을 닦고 콧소리가 섞인 채 말을 이어갔다.
“아윤이 아직 밥 안 먹었지? 뭐 먹고 싶어? 내가 해줄게.”
박아윤이 답했다.
“아무거나요. 저 음식 안 가려요.”
“그럼 비빔면 한 그릇 해줄게.”
박창진은 덩실덩실 안으로 들어갔다. 마치 조금 전에 절박하게 울던 사람은 자신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박아윤은 친아빠의 변덕에 조금 적응이 되지 않았다. 잠시 안정을 취한 후, 그녀는 유선영을 부축하며 집 안으로 들어섰다. 주위를 쭉 둘러보니 이 집에 대한 느낌은 단 하나, 매우 가난하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속에 따뜻한 온기가 전해졌다.
식탁과 의자, 옆의 수납장까지 모두 가장자리가 대나무로 짜여 있었는데 아마 유선영이 움직이기 편하도록 배려한 듯싶었다.
그 외에 집은 텅 빈 상태였다.
유선영은 자리에 앉아 박아윤의 손을 어루만졌다.
“어쩜 이렇게 말랐어? 밖에서 고생 많이 했지? 임씨 가문에서 잘해줬니? 아빠, 엄마가 미안해. 이렇게 늦게서야 진실을 알게 되다니... 우리는 네가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어...”
여기까지 말한 유선영은 목소리가 낮아지고 약간 침울해졌다.
임지효가 그 난리를 치고 나갔으니까.
20여 년을 정성껏 키운 딸인데 자신이 임씨 가문의 친딸이란 걸 알게 되자 고민 없이 성부터 고쳐버리는 임지효.
이 집에서 벗어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심지어 악담까지 퍼붓는 임지효.
박아윤은 솔직하게 말했다.
“임씨 가문에서 저한테 잘해준 건 사실이에요. 딱히 고생하지 않았거든요.”
이제 각자 제자리를 찾았을 뿐 그녀는 딱히 불평할 게 없었다.
유선영이 긴장해 하자 박아윤은 얼른 그녀를 안심시켰다.
“저는 엄마, 아빠의 친딸이에요. 이왕 돌아온 이상 어디 안 가요. 공부도 나름 잘하니 나중에 취직은 문제없을 거예요. 그땐 제가 엄마, 아빠를 모실게요.”
유선영은 잠시 멈칫했다. 무언가 말하려던 순간, 밖에서 자동차 엔진 소리와 함께 박서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빠, 엄마. 아윤이 돌아왔어요?”
곧이어 훤칠한 체구의 세 남자가 안으로 들어오며 비좁은 집 안의 유일한 등불을 가려버렸다.
유선영이 웃으며 박아윤에게 말했다.
“아윤아, 여기 네 오빠들이야.”
원래는 박아윤에게 국수 한 그릇을 끓여주려 했는데 결국은 가족 상봉 식사가 되었다.
박씨 가문의 네 오빠 중 세 명이 왔다.
큰오빠 박정우는 가장 진중하고 온화해 보였다. 유선영이 큰아들 소개에 나섰다.
“정우는...”
이때 박정우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난 건설 현장에서 공사 업무를 맡고 있어. 집 지어주는 일을 한다고 보면 돼.”
박아윤은 그의 직업을 듣고 전혀 거리낌이나 경멸의 시선을 보이지 않았다. 대신 가방에서 부적 하나를 꺼내 박정우에게 건넸다.
“공사 현장은 위험하죠? 이건 제가 절에서 빌어온 평안 부적이니 선물로 가져요.”
박정우는 그녀가 자신에게 선물을 준비할 줄은 몰랐는지 눈가에 희미한 어둠이 스쳐 지나갔다. 몇 초 후에야 그는 손을 뻗어 부적을 받았다.
“고마워.”
마지막으로 둘째 오빠 박동하가 들어왔다. 그는 겉보기에 난폭해 보이고 차가운 얼굴에 거리를 두는 듯한 분위기를 풍겼다. 유선영이 입을 열기도 전에 그가 곧바로 박아윤 앞으로 다가갔다.
“바지 걷어봐. 상처를 그렇게 오랫동안 처치 안 하면 염증 생기잖아!”
박동하가 일깨워주지 않았다면 박아윤은 다리에 상처가 난 것을 다 잊었을 것이다. 그녀는 바지를 걷어 올리고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런데 내가 상처 입은 건 어떻게 알았어요?”
방안은 잠시 침묵에 잠겼다.
‘어린 것이 꽤 영특하네.’
만약 그들이 자신을 데리러 왔으면서도 그녀의 태도를 지켜보기 위해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분명 화를 낼 터였다.
박정우가 동생의 옆구리를 찼다.
이에 박동하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
“왜 차고 그래? 상처에 피가 마르지도 않았는데 딱지가 앉고 빨갛게 부은 걸 보면 다친 시점을 쉽게 알아낼 수 있잖아. 임씨 가문의 딸로 오래 살더니 상식이라는 게 전혀 없는 거야?”
말을 하면서도 그의 손은 멈추지 않았다. 방진복 주머니에서 마치 마법처럼 약을 꺼내 직접 그녀의 상처를 처치하기 시작했다. 능숙한 수법에 자신만의 스타일이 있었고 박아윤은 전혀 아프지도 않았다. 박동하는 어느덧 그녀의 상처를 단단하게 싸매주었고 매듭조차 보이지 않게 깔끔했다.
실험실의 영감들도 이런 기술을 가지고 있었지만 박동하만큼 잘하지는 못했다.
문득 박정우가 입을 열었다.
“얘는 제약 공장에서 작업 일꾼으로 일해. 성격이 좀 난폭하니 너무 신경 쓰진 마.”
박아윤은 고개를 숙이고 그의 붕대 감는 스킬을 곰곰이 되뇌다가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오빠 붕대 감는 수법이 꽤 좋은데 저 가르쳐주실 수 있어요?”
박동하는 몸이 움찔거렸다.
“뭐 배울 거 있다고.”
“모르니까 배우는 거죠.”
박아윤이 받아쳤다.
그녀는 가방에서 작은 약병을 꺼내 박동하에게 건넸다.
“일하시느라 힘드시죠. 쉬엄쉬엄하세요. 이건 제가 직접 만든 피로 해소제예요. 정말 피곤할 때 드시면 좋아요.”
박동하는 받기 싫었지만 박정우의 등 떠밀림에 마지못해 건네받았다. 그는 작은 약병을 손가락 사이에 오락가락하며 문질러졌다.
한편 다른 오빠들은 모두 불만스러운 눈으로 박동하를 노려보았다. 셋 중에 오직 박동하한테만 오빠라고 불렀는데 아직도 만족하지 못하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