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화
이때 셋째 오빠 박서준이 다가왔다. 행여나 그녀를 놀라게 할까 봐 마구 문지르고픈 충동을 참으며 겨우 말했다.
“아윤이 너 좋아하는 연예인 있니? 오빠가 공연장에 자주 가니까 누구 사인받고 싶으면 언제든 얘기해.”
박아윤은 이런 것에 별로 관심이 없었지만 박서준의 흥을 깨고 싶지 않아 대충 질문했다.
“그럼 혹시 해솔 아세요?”
해솔은 연예계에서 아주 유명한 음악 천재였다. 오랫동안 활동했지만 신비주의라 콜라보했던 가수조차 그의 진짜 얼굴을 보지 못했다.
박서준의 눈이 더욱 빛났다.
“너 해솔 좋아해?”
박아윤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 사람과 약간 얽힌 일이 있어서요.”
박서준은 순식간에 기운이 빠져 울상이 되었다.
“아... 그렇구나.”
박아윤이 자상하게 말을 이어갔다.
“그럼 그냥 모르는 게 낫겠어요. 별로 좋은 사람은 아니거든요.”
“...”
박아윤은 박서준에게 옥으로 조각된 복스러운 인형 펜던트를 선물했다. 박창진에게는 호두 단주 팔찌를 선물했고 유선영에게는 심신 안정에 도움을 주는 약 주머니를 선물했다.
그녀가 임씨 가문에 오랫동안 머문 이유가 바로 이것들을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다행히 모두의 취향에 딱 맞는 선물이었다.
박씨 가문에는 넷째 아들도 있는데 다리가 불편하여 휠체어에 의지해야 했고 몸도 매우 쇠약했다.
이 집안 사람들이 모두 근면함에도 이토록 가난한 이유는 아마 돈을 벌어 넷째 아들의 치료비에 많이 쓴 모양이다.
박아윤은 안도의 한숨을 쉬며 가방을 닫았다. 가방 안에는 마지막 선물이 남아있었는데 그건 바로 넷째 오빠를 위한 것이었다.
가족 구성원을 모두 파악한 후 그녀는 박창진을 따라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2층에서 가장 큰 방이었고 옆에는 넷째 오빠 박유하의 방이 있었다. 임지효는 애초에 그 방을 원치 않았다. 박유하가 병약하고 밤에는 고통 때문에 신음을 내서 불길하다고 느꼈다.
결국 임지효는 3층에 머물렀다.
박창진은 박아윤이 이 방을 싫어할까 봐 걱정되어 머리를 긁적였다.
“집에 사람이 많아서 이 방만 아무도 쓰지 않은 새 방이야. 하지만 걱정 마. 지금 새집 짓는 중이니까 곧 이사할 수 있을 거야. 요 며칠 잠자리가 불편하면 내가 유하를 위층으로 옮겨서 너 방해하지 않도록 할게.”
박아윤은 방안을 쭉 살펴보았다.
‘음... 뭐랄까?’
안에 화장실이 있는 걸 보니 이 집에서 가장 좋고 큰 방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다만 온통 화려한 핑크색이고 심지어 커튼까지 핑크색 레이스가 달려 있었다.
얼핏 보면 바비 인형 장난감 집에 잘못 들어온 듯한 착각이 들 지경이었다.
박아윤은 입꼬리가 떨리는 것을 간신히 참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저 이 방 쓰면 돼요.”
그들은 방을 새롭게 꾸밀지언정 임지효의 방을 따로 비워놓지 않았다. 20여 년을 키워준 정이 있으니 조만간 임지효가 다시 돌아오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박아윤도 이해는 됐다.
임지효가 임씨 저택으로 돌아간 후, 김하정은 당장 박아윤더러 방을 빼고 가정부와 함께 지내라고 했었다. 그에 비하면 지금 박씨 가문은 충분히 배려해주고 있었다.
박아윤은 세안을 마치고 박씨 가문에서 준비해 준 랏소베어 파자마로 갈아입었다. 침대에 누운 그녀는 전에 없던 평온함이 온몸에 깃들었다.
앞이 보이지 않는 엄마, 늘 우는 아빠, 병든 오빠에 허름한 집.
앞으로 가야 할 길이 험난하지만 그녀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나았다. 적어도 가족들 모두 임지효가 말했던 것처럼 게으른 사람은 아니니까.
가난은 가장 쉽게 해결할 수 있는 문제였다. 그녀가 나중에 프로젝트를 더 많이 완성하고 돈도 많이 벌면 된다. 급선무는 병 치료였다.
엄마의 눈, 그리고 아직 만나보지 못한 넷째 오빠의 다리도 치료해야 했다.
사실 이런 것들은 박아윤도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수년 동안 그녀는 임씨 가문 몰래 많은 기술을 배웠고 임씨 가문에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 가끔 언급하기도 했지만 그들은 믿지 않았다.
박씨 가문 사람들은 그녀와 아직 서먹서먹한 사이라 믿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다른 사람의 도움을 청해야 한다. 괜히 치료를 늦출 순 없으니까.
종일 피곤한 여정과 머릿속을 가득 채운 걱정들로 박아윤은 금세 깊은 잠에 빠졌다.
한편 그녀를 제외한 다른 가족들 모두 선물을 받고 밤잠을 설쳤다.
박아윤의 작고 납작한 배낭에 본인 물건은 딱히 챙기지도 못했을 텐데 그들의 선물은 빠짐없이 넣어두다니.
저도 몰래 임지효가 떠올랐다.
수년 동안 어디를 가든 돌아올 때면 배낭은 빵빵했고 본인만을 위해서 산 물건들이 넘쳐날 지경이었다.
그들은 이미 익숙해져 있었다. 동생은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자신들이 사랑으로 보듬어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처음으로 이렇게 진심 어린 대우를 받자 적응하기가 힘들었다.
박동하가 찬물을 끼얹듯이 말했다.
“칫, 다들 잊지 마. 지효도 매번 뭔가 부탁할 일이 있을 때 이렇게 잘 보이려고 했거든. 별것 아닌 물건인데 뭘 호들갑이야.”
박아윤이 무슨 비장의 무기를 숨기고 있을지 누가 짐작할 수 있을까?
한편 박서준은 절망에 빠진 표정을 지었다.
“복에 겨운 소리! 아윤이 나한텐 오빠 소리도 안 했어. 대체 내가 뭘 어쨌다고 좋은 사람이 아닌 건데?”
...
박아윤은 신음에 잠에서 깼다.
고요한 밤, 억지로 참는 듯한 낮은 신음이 애처로운 울음소리처럼 들려왔다.
그녀는 눈을 비비며 몸을 일으켰다. 자세히 들어보니 옆방에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아직 만나보지 못한 넷째 오빠가 신음을 내고 있었다.
박아윤은 가봐야 할지 망설였다. 옆방의 신음은 억눌린 울음으로 변했고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무언가 내던지는 소리도 들렸다.
그녀는 침대에서 내려왔다. 다른 사람들이 잠을 깰까 봐 휴대폰 전등을 켜고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옆 방 문 앞에 다가가 노크하려고 하는데 문이 비스듬히 열려 있었다.
“도움 필요해요?”
그녀가 나직이 물었다. 아무런 대답이 없자 그제야 문손잡이를 잡고 고개를 들이밀었다. 방안은 약간 어두웠고 바닥에 웅크리고 있는 희미한 그림자가 보였다. 그녀는 재빨리 안으로 들어가 휴대폰을 옆에 두고 박유하를 일으키려 했다.
“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