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화
외할머니의 장례식까지 치르고 나니 일주일이 눈 깜짝할 사이에 흘렀다.
현재 최씨 가문을 지탱하고 있는 것은 최지은의 언니였다. 장례식이 끝난 뒤 최지유는 한시도 쉬지 않고 바로 도성으로 돌아갔다.
최지유는 떠나기 전 최지은에게 당부했고, 최지은은 창백해진 얼굴로 모든 걸 깔끔히 처리한 뒤 때가 되면 도성으로 돌아갈 거라고 약속했다.
공항에서 별장으로 돌아와 보니 그녀가 자리를 비운 일주일 사이 마당에 있던 딥 퍼플 장미가 시든 게 보였다.
딥 퍼플 장미의 꽃말은 사랑의 수호자였다.
이 별장을 산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한수혁이 직접 장미를 심었었다.
시들어버린 장미를 바라보던 최지은의 눈동자에 조롱이 어렸다. 그녀는 걸음을 옮겨 모든 장미를 뿌리째 뽑아버려 쓰레기통 안에 버렸고 그 후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안녕하세요. 지난번에 말씀하신 가격에 팔게요. 그리고 가능하다면 최대한 빨리 계약하고 싶은데 가능하실까요?”
상대방이 동의를 얻은 뒤 두 사람은 약속을 잡았다.
최지은은 전화를 끊은 뒤 위층으로 올라가서 짐을 정리했다.
그녀는 자신의 귀중품을 전부 챙겨 그것들을 외할머니께서 살던 집으로 가져간 뒤 한수혁과 관련이 있는 모든 것들을 전부 쓰레기와 함께 버렸다.
한수혁의 비서가 별장에 도착했을 때, 별장 문 앞에 있던 쓰레기통은 당장이라도 터질 듯한 상태였다.
한수혁의 비서는 조금 의아해져서 쓰레기통 쪽을 힐끔댔는데 너무도 익숙한 옷들이 보였다.
최지은을 발견한 그가 최지은을 불렀다.
“사모님...”
최지은이 손을 들어 그의 말을 시정했다.
“최 대표님이라고 불러주세요.”
“최 대표님, 한 대표님께서 오늘 저녁에 파티에 참석해야 하셔서 슈트를 가져오라고 하셨습니다. 최 대표님께서 대신 골라주실 수 있으실까요?”
최지은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왜 본인이 직접 오지 않는대요?”
비서는 켕기는 게 있는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한 대표님께서는 출장에서 돌아오신 지 얼마 되지 않아 곧바로 회사로 복귀하셔서 업무를 보고 계십니다.”
최지은이 말했다.
“그래요? 난 또 출장 가서 너무 행복한 나머지 돌아오는 걸 깜빡한 줄 알았죠.”
비서는 감히 고개를 들지 못했다.
최지은은 그를 더 난감하게 할 생각은 없었기에 쓰레기통을 힐끗 보면서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기 가서 뒤져봐요.”
비서는 최지은의 시선을 따라가 보았다. 그곳에는 쓰레기를 수거하러 온 직원이 가득 찬 쓰레기통을 비우려고 하고 있었다.
“네?”
비서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의아해했다.
최지은은 덤덤히 말했다.
“빨리 가봐요. 멀쩡한 것들은 다른 사람들이 가져갈지 모르니까요.”
최지은은 말을 마친 뒤 비서 옆을 지나쳐 차에 오른 뒤 그곳을 떠났다.
비서의 얼굴에 경련이 일었다. 한수혁이 준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비서는 어쩔 수 없이 쓰레기통으로 걸어가야 했다.
혁운.
비서는 쓰레기통을 뒤지고 있던 사람들에게서 빼앗은 슈트를 들고 한수혁의 사무실로 들어갔다.
최지은이 버린 것들은 전부 귀중품이었기에 쓰레기통을 뒤지고 있던 사람들 모두 미친 듯이 달려들었다. 그러던 와중에 한수혁의 비서는 누군가의 팔꿈치에 눈을 맞아서 눈두덩이 빨갛게 부어올랐다.
“대표님...”
한수혁의 비서는 사무실 안에서 얼굴을 거의 맞대고 있던 한수혁과 진서연을 보자 원망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바람을 피운 건 한수혁인데 고생한 건 그였으니 말이다.
비서의 목소리를 들은 한수혁은 진서연에게 프로젝트의 세세한 부분을 알려주다가 고개를 들어 비서의 비참한 꼴을 보고 흠칫했다.
“지은 언니가 때린 거예요?”
진서연은 깜짝 놀라면서 안타까운 표정으로 한수혁의 비서를 바라보았다.
최지은은 미친 여자였다. 얼마 전 웨딩샵에서 그녀에게 커피를 부은 전적도 있으니 말이다.
비서는 몰래 한숨을 쉬었다. 그는 차라리 최지은이 자신을 때리기를 바랐다. 한수혁의 비서로 일하기 전 그는 최지은의 비서였다.
반년 전, 최지은은 건강에 이상이 생겼고 그로 인해 그는 한수혁의 비서가 되었다.
그동안 그는 한수혁과 진서연이 지금과 같은 사이로 발전하는 걸 지켜보기만 했고 그 일로 자신의 능력을 알아봐 준 은인 최지은에게 매우 미안했다.
“아니요. 제가 실수로 다른 곳에 부딪친 겁니다.”
진서연은 조금 실망했지만 그래도 눈치가 있어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한수혁은 고개를 살짝 끄덕인 뒤 아주 짧게 말했다.
“조심해.”
비서는 입술을 달싹거리면서 자신이 본 모든 것을 한수혁에게 얘기해야 할지 고민했다.
이때 패션 브랜드 직원 몇 명이 드레스를 들고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이번 시즌 신상들을 가져와 한수혁과 진서연의 앞에 늘어놓았고, 그 순간 살짝 실망한 표정이던 진서연은 곧바로 기쁜 표정을 해 보였다.
한수혁은 진서연의 표정에 기분이 좋아진 건지 눈썹을 올리며 웃음기 어린 눈으로 진서연을 바라보았다.
“하나 골라. 그리고 오늘 나랑 같이 파티에 참석하자.”
진서연은 두 눈을 빛내면서 선망의 눈빛으로 한수혁을 바라보았다.
“정말요? 그래도 돼요?”
한수혁은 손을 들어 진서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럼.”
한수혁의 허락이 떨어지자 진서연은 소파에서 일어나 드레스를 고르기 시작했다.
비서는 결국 턱끝까지 차오른 말을 삼키고 조용히 한수혁의 사무실에서 나왔다.
그날 밤, 기업인수합병 중개인인 절친한 친구가 최지은을 경매 파티에 초대했다.
마침 최지은도 그녀를 찾아가 혁운 그룹 주식의 가치를 물어보고 싶었다.
최지은은 자신이 가진 혁운의 모든 주식을 판매할 생각이었고 마침 친구가 그쪽으로 전문가라 그녀에게 이 일을 맡긴다면 본인이 직접 주식을 판매하기보다 훨씬 더 비싼 가격에 팔 수 있을 터였다.
파티 현장에 도착한 뒤 최지은은 곧장 친구가 있는 2층 룸으로 향했고, 문을 열자 친구가 어두운 표정으로 홀로 의자에 앉아 있었다.
“누가 널 괴롭힌...”
그곳은 방음이 좋지 않은 편이라 최지은의 친구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옆 방에서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수혁 씨는 정말 인생을 제대로 즐기시네요. 다음 달 결혼인데 곁에 진서연 씨처럼 아름다운 애인을 두었으니... 그러고 보면 진서연 씨도 참 사려 깊고 착하네요. 결혼하지도 못하는데 수혁 씨랑 만나는 걸 보면 말이죠. 물론 그건 별로 놀랄 일이 아니죠. 그것보다 저는 수혁 씨가 집에 있는 예비 신부를 어떻게 달래는 건지 궁금하네요. 저도 좀 배우고 싶거든요.”
한수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옆에 있는 사람들이 알랑거리며 말했다.
“수혁 씨가 가르쳐준다고 해도 수혁 씨만큼 매력적이지 않다면 불가능하죠. 최지은 씨는 수혁 씨를 죽도록 사랑해서 버림받는 걸 두려워하는데 어떻게 감히 난리를 치겠어요?”
“남자라면 다들 수혁 씨처럼 집에는 아름다운 현모양처를 두고 밖에는 예쁜 애인을 두고 살아야 하는 법이죠.”
최지은의 친구 배아현은 너무 화가 난 나머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그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고 최지은은 황급히 그녀를 붙잡았다. 그런데 치맛자락 때문에 테이블 위 유리잔이 떨어지며 쨍그랑 소리를 냈다.
이때 한수혁의 낮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런 쓸데없는 말은 그만하고 경매품이나 구경하죠.”
배아현은 속이 뒤집어지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인 최지은은 한없이 평온하고 덤덤해 보였다. 모든 걸 알고 있다는 듯이 말이다.
배아현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냥 참으려고?”
최지은은 느긋한 어조로, 옆 방에서 들을 수 있을 정도의 목소리로 말했다.
“사람이 살다 보면 똥도 먹을 때가 있는 법이지. 그냥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빠르게 똥을 치워버리는 게 나아. 괜히 온 세상에 내가 똥을 먹었다는 사실을 알릴 필요는 없잖아.”
“...”
옆 방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그곳에서 적막이 감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