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화
최지은은 한수혁과 크게 소리치며 싸우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억누르며 몸을 돌려 집 안으로 들어갔다.
지난 사흘 동안, 한수혁은 매우 바빴고 최지은 역시 한가하지 않았다.
한수혁과 진서연이 같은 아파트에 함께 드나드는 사진이 끊임없이 최지은의 휴대전화에 전해졌다.
결혼을 앞둔 시점에서 한수혁은 버젓이 다른 여자와 동거했다. 그는 그것을 결혼이라는 무덤에 들어가기 전 마지막 쾌락쯤으로 여기는 듯했다.
한수혁은 최지은의 뒤를 따라 안으로 들어간 후 서랍 안에서 약상자를 꺼내 그 안에서 요오드와 면봉을 집어 들고 최지은의 앞에 섰다.
한수혁은 굳은 표정으로 말없이 최지은의 손을 잡고 그녀의 상처를 치료해 주기 시작했다.
“네가 제일 좋아하는 손이잖아. 나 때문에 네 몸에 상처를 남기지는 마.”
최지은은 차갑게 입꼬리를 올렸다.
“나한테 상처를 준 사람은 너잖아.”
최지은은 그 주제를 더 이어가지 않고 옆에 놓여있던 서류를 한수혁의 눈앞에 내밀었다.
“확인해 보고 문제없으면 사인해.”
서류를 건네받은 한수혁은 내용을 확인하더니 이내 미간을 찌푸렸다.
“재산 분할 합의서?”
최지은은 덤덤히 그렇다고 대꾸했다.
한수혁은 서류를 내려놓은 뒤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우리 곧 결혼하는데 재산 분할 합의를 보는 게 무슨 의미가 있어?”
한수혁은 그날 최지은이 홧김에 그런 말을 한 거라고 여겼다.
무려 7년을 만났는데 최지은이 그를 떠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최지은은 시선을 들어 한수혁을 바라보며 말했다.
“결혼을 앞두고 있으니까 합의를 봐야지. 결혼 전 재산은 개인 소유니까.”
최지은은 자신이 정말로 한수혁을 떠나야만 한수혁이 그날 그녀가 한 말이 그저 홧김에 한 말이 아니라는 걸 믿을 거라는 걸 알았다.
한수혁은 차가운 눈빛으로 최지은을 바라보면서 냉소를 흘렸다. 그러나 뜻밖에도 그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흔쾌히 승낙했다.
“그래.”
최지은이 한수혁에게 펜을 건넸다.
한수혁은 최지은을 힐끗 보더니 불쾌함을 억누르며 합의서에 사인을 한 뒤 그것을 최지은에게 건넸다.
“이제 화 풀렸지?”
한수혁이 팔을 뻗어 최지은을 안으려고 했다.
최지은은 서류를 거두어들이면서 한수혁의 스킨십을 피했다.
“이거 공증기관을 통해 공증할 거야. 때가 되면 연락할 테니까 협조해 줘.”
한수혁의 안색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나한테 그 정도의 믿음도 없는 거야?”
최지은은 대답하지 않고 서류를 조심스럽게 서류봉투 안에 넣었다.
최지은의 행동이 모든 걸 보여줬다.
한수혁은 차가운 얼굴로 평온한 표정의 최지은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번졌다.
“최지은, 너 지금 허영심 가득한 속물 같아. 왜 이렇게 변한 거야?”
최지은은 한수혁의 까만 눈동자를 마주 보았다. 그녀는 한수혁이 자신을 속물이라고 욕해도 개의치 않고 느긋하게 말했다.
“사랑이 밥 먹여주는 건 아니잖아? 권력과 돈이야말로 삶에 없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것들이지.”
남자가 주는 사랑에는 변수가 너무 많았고 오직 물질과 돈만이 인간을 배신하지 않는 법이었다.
한수혁의 표정이 완전히 어두워졌다.
최지은은 서류봉투를 들고 위층으로 올라가면서 한수혁의 곁을 지날 때 잠깐 걸음을 멈추고 말했다.
“네 저녁은 따로 준비하지 않았으니 알아서 챙겨 먹어.”
최지은은 말을 마친 뒤 고개 한 번 돌리지 않고 위층으로 올라갔다.
한수혁의 안색은 섬뜩할 정도로 어두웠다. 그는 밖으로 나갈 때 쾅 소리 날 정도로 힘주어 문을 닫았다.
최지은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서류를 금고 안에 넣은 뒤 외할머니를 뵈러 갔다. 그녀는 외할머니와 도성으로 돌아가는 일에 관해 얘기를 나눠볼 생각이었다.
최지은의 엄마는 이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암으로 돌아가셨고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최지은은 외할머니와 함께 살게 되었다.
낡고 허름한 집 마당 안으로 석양이 드리워졌고, 노인은 대나무로 만들어진 의자에 누워 아름다운 노을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은이 왔니? 수혁이는?”
예전에 한수혁은 매주 빠짐없이 최지은과 함께 외할머니를 보러 왔었다.
최지은은 외할머니가 걱정하는 걸 원치 않아 시선을 내려뜨리며 애써 차분하게 대답했다.
“바빠서요.”
외할머니는 잠깐 침묵했다가 잔소리를 시작하더니 꼭 한수혁을 봐야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그녀는 한수혁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다.
결국 외할머니의 고집을 꺾지 못한 최지은은 한수혁에게 연락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한수혁은 전화를 받지 않았고 최지은도 더 연락하지 않았다.
감정을 추스른 뒤 최지은은 웃으며 몸을 돌렸다.
“외할머니, 수혁이...”
조금 전까지 멀쩡히 그녀와 대화하던 노인이 석양 아래 조용히 눈을 감고 있었다. 그녀의 손은 아주 자연스럽게 의자 아래로 축 늘어졌다. 마치 잠든 것처럼 아주 평온한 얼굴이었다.
불안감에 휩싸인 최지은의 머릿속에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의 광경이 떠올랐다.
“외할머니...”
최지은의 목소리가 애처롭게 떨렸다. 그녀는 손을 뻗어 외할머니의 손을 잡았다. 손에서 여전히 온기가 느껴졌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구급대원들은 그곳에 도착해서 상황을 확인해 본 뒤 최지은에게 자연사라고 하며 명복을 빌어줬다.
조금 전까지 그녀와 대화를 나누고 있던 외할머니가 돌아가시자 최지은은 본능적으로 한수혁에게 연락했다.
그러나 전화를 받은 건 한수혁이 아닌 진서연이었다.
“지은 언니, 무슨 일이에요? 저 지금 대표님과 함께 근처 도시로 가는 길...”
그 목소리를 들은 순간 최지은은 곧바로 얼굴이 창백해진 채로 전화를 끊었다.
곧이어 그녀는 도성에 있는 언니에게 연락했고 상대방이 전화를 받은 뒤 애써 덤덤히 말했다.
“언니, 외할머니께서 돌아가셨어.”
최지유가 말했다.
“지금 당장 갈게.”
전화를 끊은 뒤 최지은은 얼굴을 가리고 외할머니 앞에 쭈그리고 앉아 서서히 굳어져 가는 그녀의 몸에 살며시 얼굴을 파묻었다. 최지은의 어깨가 형편없이 떨렸다.
최지은은 살면서 이렇게나 후회한 적이 없었다.
한수혁 같은 남자를 위해 사랑하는 가족을 포기했었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