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화
“아니.”
겨우 뺨 한 대로 화가 다 풀릴 리가 없었다.
한수혁은 조금 전 자신의 뺨을 때렸던 최지은의 손을 들어서 입을 맞췄다.
“아까 나 때리느라 아팠지? 집에 돌아가면 내가 얼음찜질해 주면서 다 설명할게. 응? 시답잖은 사람 때문에 나한테 화내지 말아 줘.”
최지은은 시선을 내려뜨리며 서글픔을 감췄다.
이것이 아마도 남자의 본성일 것이다. 바람을 피웠다는 걸 현장에서 들키지 않는 한 절대 영원히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시답잖은 사람? 누구? 진서연?”
최지은은 고개를 돌려 진서연을 바라보았다.
진서연은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 채로 그 자리에 얼어붙어 서 있었다. 조금 전 웨딩샵에 들어왔을 때처럼 도발적인 눈빛으로 최지은을 바라보던 때와 달리 모든 생기를 잃어버린 것만 같았다.
“응.”
한수혁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힘주어 대답했다.
진서연의 안색이 또 한 번 창백해졌다.
웨딩샵에서 나온 뒤 최지은이 자신의 차로 걸어가는데 한수혁이 그녀의 팔을 잡으며 억지로 그녀를 자신의 곁으로 끌고 왔다.
“내 차에 타. 내가 데려다줄게.”
최지은이 손을 뿌리치려고 했지만 한수혁이 힘을 아주 많이 주어서 그의 손을 뿌리칠 수가 없었다. 결국 그녀는 한수혁의 손에 이끌려 그의 차로 갈 수밖에 없었다.
한수혁이 조수석 문을 열자 그레이와 블랙이 어우러진 차 내부 좌석에 핑크색과 화이트가 섞인 머리핀이 보였다.
한수혁은 태연하게 손을 뻗어 머리핀을 치웠고 최지은은 냉소를 흘렸다.
“더 확인해 봐야 하지 않겠어? 다른 게 더 있을지도 모르잖아. 혹시라도 내가 안에서 브래지어나 팬티 같은 걸 발견하면 어떡해? 눈병이라도 걸릴까 봐 무서워서 말이야.”
조금 전까지 차분하던 한수혁은 그 말을 듣더니 마치 꼬리를 밟힌 고양이처럼 버럭 화를 냈다.
“최지은, 왜 그런 추잡한 생각을 하는 거야? 나는 널 사랑하지만 네가 이렇게 억지를 부리는 건 용납할 수 없어. 오늘이 처음이자 마지막이길 바라. 혁운은 지금 비약을 앞두고 있어. 우리 협력사 직원들 중에 이성이 한 명도 없을 수는 없어. 오늘 네가 진서연에게 창피를 줘도 내가 가만히 있은 이유는 진서연이 별 볼 일 없는 직원이기 때문이야. 하지만 만약 앞으로 네가 높은 지위의 여성을 의심한다면 혁운은 절대 오래 발전할 수 없을 거야.”
최지은은 한수혁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그녀의 맑고 예쁜 눈동자는 한없이 차가웠다.
최지은은 한수혁이 가스라이팅을 얼마나 잘하는지 이제야 알게 되었다.
최지은은 한수혁과 싸우지 않았고 그의 차에 타지도 않았다. 그녀는 몸을 돌려 자신의 차로 걸어가서 차에 탄 뒤 시동을 걸어 그곳을 떠났다.
웨딩샵 밖에는 오가는 사람들이 많았기에 한수혁은 최지은을 더 붙잡지 않았다. 그가 어두운 얼굴로 차 문을 연 뒤 허리를 숙이며 차에 타려고 할 때 진서연이 창백한 얼굴로 밖으로 나오는 걸 보았다.
그는 잠깐 침묵하다가 진서연을 향해 손을 흔들어 보였다.
“타.”
다른 한편, 최지은은 난감한 표정으로 앞 차 뒷부분이 찌그러진 걸 바라보았다. 앞 차는 특이한 번호판을 달고 있는 검은색의 비싼 차량이었다.
조금 전 최지은은 넋을 놓고 있다가 실수로 앞 차를 막았다.
최지은이 뒤에서 앞의 차를 박았으니 당연히 모든 책임을 져야 했다.
최지은은 차에서 내린 뒤 앞의 차에서 내린 사람을 향해 사과를 건넸다.
“죄송합니다. 제가...”
앞 차의 운전기사는 말없이 최지은을 힐끗 보더니 공손한 태도로 뒷좌석 문을 열었다.
차 문이 열리자 잘생긴 남자가 차에서 내렸다. 남자는 셔츠 단추를 목 끝까지 잠갔고 뚜렷한 이목구비를 가진 얼굴에서는 냉담함이 보였다.
그를 본 순간 최지은은 뭔가를 떠올렸다. 그녀는 눈앞의 남자가 누군지 알았다.
최지은이 입을 열기도 전에 남자는 이미 멀어졌다. 그는 길가의 난간에 비스듬히 기댄 채 왼손으로 휴대전화를 들고 통화를 하고 있었다. 이따금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와 그의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려서 잘생긴 이마가 드러났다.
“차가 수리되면 제가 연락드릴 테니 직접 오시면 됩니다.”
운전기사가 최지은에게 명함 한 장을 내밀었다.
최지은은 잠깐의 틈을 타 옆에 서 있는 남자를 힐끗 보았다. 남자는 계속 전화를 하고 있었는데 일이 잘 풀리지 않는 것인지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로 이따금 손을 뻗어 난간 위에 앉아서 쉬고 있는 새에게 장난을 쳤다.
10분 뒤, 차 한 대가 도착했고 남자는 빠르게 차에 탔다. 운전기사는 그곳에 남아 그쪽 일을 처리해야 했다. 남자는 차에 타기 전 최지은 쪽을 힐끔 보았고 최지은은 켕기는 게 있는 사람처럼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모든 일을 다 처리한 뒤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늦은 밤이었다.
도중에 한수혁이 그녀에게 문자를 하나 보냈지만 최지은은 답장하지 않았다.
그녀는 너무 피곤해서 씻은 뒤 바로 침대에 누워 잠을 잤다.
다음 날, 최지은은 그녀가 등록한 매물에 관심이 있는 구매자와 약속을 잡고 집을 보여주기로 했기 때문에 물건을 좀 정리하면서 버려야 할 건 버렸다.
그중 대부분이 한수혁이 학창 시절 때 그녀에게 선물한 자질구레한 것들이었다.
한때 소중히 여기던 것들이었지만 한수혁이 바람을 피운 뒤 정신을 차리고 다시 보니 모두 볼품없는 싸구려들이었다. 마치 한수혁처럼 말이다.
사흘 뒤, 한수혁이 집으로 돌아왔을 때 최지은은 마당에서 갓 핀 장미를 손질하고 있었다.
한수혁은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뒤에서 최지은을 끌어안으며 다정히 몸을 밀착했다.
“자기야, 나 보고 싶었어?”
최지은은 차갑게 웃었다.
“네 옆에 다른 여자가 있는데 굳이 나까지 네 생각을 해야 해? 굳이 따지자면 두 사람 데이트에 방해가 되지 않게 내가 너를 떠올리지 말기를 바라야 하는 거 아니야?”
최지은은 차갑게 대꾸한 뒤 한수혁이 잠깐 넋을 잃은 사이 그의 품에서 벗어났다.
한수혁의 몸에서 여자 향수 냄새가 은근히 나서 구역질이 났다.
한수혁은 아주 빠르게 반응을 보였다. 그는 손을 들어 최지은의 허리를 잡으며 그녀를 다시 자기 품으로 끌어당겼다.
한수혁의 근육은 셔츠를 사이에 두고 있는데도 매우 뜨거웠다.
최지은은 저항했지만 그에게 허리를 붙잡혀서 꼼짝할 수가 없었다.
“내가 사랑하는 건 너뿐이야. 그러니까 그만해. 응?”
한수혁은 허리를 살짝 숙이며 그녀의 귓가에 대고 섹시한 목소리로 낮게 속삭이면서 화해를 요구했다.
최지은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바람에 장미꽃 줄기에 자란 가시가 그녀의 손을 찌르게 되었다. 그러나 손끝에서 느껴지는 고통조차도 토하고 싶은 느낌을 이길 수가 없었다.
최지은이 손을 내리자 장미꽃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한수혁은 뭔가를 눈치채고는 최지은의 손을 들어 그녀의 손가락에 생긴 상처를 바라보면서 미간을 찌푸렸다.
한수혁은 허리를 숙이며 아직 피가 흐르고 있는 최지은의 손을 빨았다.
최지은은 한수혁의 입술이 자신의 손끝에 닿는 순간 곧바로 안색이 달라졌다.
한수혁은 어떻게 감히 3일 동안 진서연과 몸을 섞다가 안색 하나 바뀌지 않고 그녀의 앞에서 이렇게나 순애보인 척할 수가 있는 것일까?
심지어 진서연과 수도 없이 입을 맞춘 그 입술을 감히 그녀의 몸에 가져다 대다니.
‘더러워. 진짜 너무 더러워.’
최지은은 본능적으로 빠르게 한수혁의 뺨을 때렸다.
손이 저릴 정도였다.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그저 어두운 얼굴로 최지은을 싸늘하게 바라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