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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여기가 내 집이야. 여기 말고 다른 곳에 가고 싶지는 않아.” 최지은은 자연스럽게 자신의 손을 빼면서 몸을 돌려 의자에 앉았다. 한수혁은 최지은의 눈 밑에서 은근한 웃음기를 발견하고는 자기도 모르게 짜증이 치밀어올라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지은아, 외할머니 집에서 이렇게 나한테 성질을 부려야겠어?” 이미 설명까지 했는데 뭘 더 바라냐는 식이었다. 마치 한수혁이 설명을 했는데도 최지은이 그를 용서하지 않는다면 최지은이 잘못한 것이라는 듯이 말이다. 최지은은 대체 무엇 때문에 한수혁은 다른 남자와 다를 거라고 생각했던 걸까? 최지은의 입가에 경멸 어린 미소가 걸렸다. 그녀는 비취 팔찌를 케이스 안에서 꺼내며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그것을 만지작댔고 그 순간 한수혁의 눈빛이 살짝 어두워졌다. 최지은은 시선을 들어 한수혁의 간절한 눈빛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이것 때문에 날 찾아온 거지?” 시선을 내려뜨린 한수혁은 최지은의 입가에 걸린 차가운 미소를 보더니 더는 자신의 목적을 감추지 않았다. “그래. 안씨 가문 어르신께서 곧 생신이라...” 한수혁이 말을 이어가기 전에 최지은이 그의 말허리를 잘랐다. “이 팔찌는 이제 내 거야. 이걸 갖고 싶다면 돈을 내.” 한수혁은 표정이 차가워지면서 화가 난 기색을 드러냈다. “최지은, 우리 곧 결혼할 사이야. 그런데 굳이 이렇게 선을 그어야겠어?” 최지은은 냉담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한수혁은 무엇 때문에 바람까지 피워놓고 최지은이 당연히 자신과 결혼할 거라고 굳게 믿는 걸까? “응.” 최지은은 아무런 감정도 없이 단호히 대답했고, 한수혁은 미간을 찌푸린 채로 최지은의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최지은은 시선을 들어 한수혁을 바라보았다. 양보할 생각은 전혀 없어 보였다. 서로 노려보고 있으면 한쪽이 패배하기 마련이다. 결국 한수혁은 휴대전화를 꺼냈다.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던 최지은의 휴대전화 화면이 밝아지면서 입금 알림이 도착했다. 그러나 최지은은 굳이 확인해 보지 않았다. 한수혁은 최지은을 바라보면서 경멸 어린 눈빛으로 말했다. “충분한지 확인해 보지 않아도 돼?” 최지은은 그의 말대로 휴대전화를 들어 금액을 확인해 보았고 그 순간 한수혁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네가 이렇게 돈을 밝히는 사람인 줄은 몰랐는데.” 최지은은 그를 바라보지 않고 덤덤한 어조로 말했다. “사람 보는 눈이 없네. 7년 동안 봤으면서 아직도 날 모르는 걸 보면.” 한수혁의 표정이 차가워졌다. 최지은은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 앞으로는 나를 아주 잘 알게 될 테니까.” 최지은은 그렇게 말하면서 들고 있던 비취 팔찌를 그에게 건넸다. 한수혁은 굳은 표정으로 손을 뻗어 팔지를 건네받았다. 그의 손끝이 팔찌에 닿자마자 최지은은 곧바로 손을 놓았고 그 순간 팔찌가 바닥에 떨어지며 깨졌다. 최지은은 입꼬리를 올리면서 먼저 입을 뗐다. “제대로 쥐어야지.” 한수혁의 안색이 좋지 않았다. 그는 싸늘한 눈빛으로 깨진 팔찌를 바라보다가 최지은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일부러 그런 거야?” 최지은은 고개를 저었다. “돈까지 받았는데 내가 왜 굳이 그러겠어?” 한수혁은 위로 올라간 최지은의 입꼬리를 바라보며 눈빛이 점점 더 어두워졌다. “이번에 아주 단단히 화가 난 모양인데 그러면 결혼식 전까지는 서로 얼굴 안 보는 게 좋겠다. 당분간은 여기서 지내며 마음 잘 추스르길 바라.” 한수혁은 차가운 얼굴로 그렇게 말한 뒤 최지은이 한없이 평온한 얼굴로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자 미간을 찌푸리며 그곳을 떠났다. “잠깐.” 한수혁이 문가에 도착하자 최지은이 그를 불렀다. 한수혁의 안색이 그제야 조금 좋아졌다. 만약 최지은이 잘못을 인정한다면 그는 최지은에게 기회를 줄 것이다. 기분이 좋아진 한수혁은 몸을 돌리며 말했다. “왜...” 하수혁이 말을 내뱉자마자 최지은이 그의 말을 가로챘다. “이 팔찌는 네가 제대로 받지 못해서 깨진 거니까 네가 아까 준 돈은 돌려주지 않을 거야.” 한수혁은 그 순간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방금 좋아진 기분이 순식간에 곤두박질쳐서 진창으로 처박혔다. 화가 난 그는 잇새로 말을 내뱉었다. “그래. 평생 그렇게 돈에 환장한 채로 살아. 돈이랑 평생 살도록 해.” 최지은이 대꾸했다. “그래. 좋은 말 해줘서 고마워.” 방 안이 순식간에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 한수혁의 표정은 섬뜩할 정도로 날 서 있었다. 그는 낡은 집 안의 어둑어둑한 조명 아래 태연자약한 표정으로 의자에 앉아 있는 최지은을 바라보며 말없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는 한참 뒤 타협한 듯이 조금 무력한 모습으로 먼저 입을 열었다. “왜 그렇게 변한 거야?” 최지은은 묵묵히 한수혁을 바라보았다. “나한테 그런 질문을 하기 전에 네가 그동안 무슨 짓을 했는지 먼저 되돌아봐야 하지 않아?” 7년간 이어진 사랑을 포기한다는 것은 최지은에게 뼈에서 살을 발라내는 것과 다름없었다. 최지은이 그런 고통을 느껴야 했던 건 오롯이 한수혁 때문이었다. 한수혁은 바람을 피워놓고 뻔뻔하게 최지은에게 왜 그렇게 변한 거냐고 물었다. 참으로 우스운 일이었다. 바람을 피워 7년간 이어진 그들의 사랑을 짓밟은 건 한수혁인데, 그는 모든 잘못을 최지은에게로 돌리려고 했고 최지은은 그의 그런 모습이 역겨웠다. “최지은, 자꾸 그런 말도 안 되는 일로 물고 늘어지면서 나랑 싸워야겠어?” 최지은의 냉담한 태도에 한수혁은 화가 났다. 최지은은 검지를 입가에 가져다 대면서 조용히 하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조용히 해. 우리 외할머니 깨셔.” 한수혁은 잠깐 침묵을 유지하며 평정심을 되찾았다. “내일 데리러 올게. 당분간은 일 다 미뤄놓고 집에서 너랑 같이 있을게.” 최지은은 대꾸하지 않았고 한수혁은 침묵 속에서 떠났다. 다음 날, 한수혁은 그녀를 데리러 오지 않았다. 최지은은 SNS를 통해 진서연이 새로운 게시물을 올린 걸 보았다. [여러분, 큰일 났어요. 저 임신했어요. 2주 뒤면 남자 친구랑 헤어질 예정인데 갑자기 아이가 생겨버렸어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다들 충고 좀 해줘요. 악플은 사절할게요.] 게시글 위에는 줄 두 개가 그어진 임신 테스트기 사진이 있었다. 그것은 한 시간 전 작성한 게시글이었는데 아래 이미 댓글들이 가득 달렸고 대부분이 비난하는 내용이었다. 잠시 뒤 댓글창 상단에 진서연이 적은 댓글이 고정되었다. [남자 친구한테 임신 사실을 얘기하니까 일단 병원에 가서 검사해 보자네요. 오늘 반응을 보니 내가 아이를 낳기를 바라는 것 같았어요.] 최지은의 손이 떨렸다. 그 게시물을 보고도 아무렇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이내 차분해졌고 미간을 주무르면서 앱을 껐다. 창밖에서는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휴대전화를 내려놓은 최지은은 외할머니가 예전에 손수 만들었던 작은 바구니가 비에 젖는 걸 보고는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마당에는 이끼가 많이 끼었는데 빗물에 젖어서 매우 미끄러웠다. 최지은은 발이 미끄러져 바닥에 넘어지게 되었고 뼈가 어긋나는 엄청난 고통 때문에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하게 질렸다. 근처에 살던 이웃들은 다들 이사를 간 상태라 도와달라고 소리를 질러도 소용이 없었다. 결국 최지은은 아픈 걸 참으며 바닥에서 일어나려고 했으나 극심한 통증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다시 창백해진 얼굴로 바닥에 쓰러지게 되었고 비도 맞게 되었다. 잠시 뒤, 통증이 살짝 가신 뒤 최지은은 겨우 방으로 기어들어 가서 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전화로 구급차를 불렀다. 구급차가 오는 길에 한수혁이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최지은은 전화를 받았다. “지은아, 회사에 문제가 조금 생겨서...” 또 거짓말이었다. 한수혁이 말을 끝맺기도 전에 최지은은 전화를 끊었고 한수혁은 더 이상 전화를 걸지 않았다. 최지은은 눈을 감으며 눈동자 속 실망을 감추려고 했다. 그녀는 한수혁에게 솔직히 얘기할 기회를 수도 없이 주었다. 그러나 한수혁은 끝까지 거짓말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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