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화
배아현이 다가와 창백해진 얼굴로 연약한 척하는 진서연을 바라보며 비웃었다.
“어머, 우리 삼촌이랑 친한 사람들이 봤으면 정말 보기 드문 훌륭한 여자라며 아주 환장했을 텐데.”
배아현의 삼촌은 도성에서 방탕하기로 소문난 사람이었다.
진서연은 몸을 흠칫 떨더니 무서운 듯 한수혁의 뒤로 숨으며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그녀의 눈시울이 지나칠 정도로 붉었다.
한수혁은 손을 들어 진서연을 자신의 뒤로 숨기면서 매서운 눈빛을 해 보였다.
“최지은, 선 넘지 마. 너 언제부터 이렇게 약자를 괴롭히는 사람이 된 거야?”
최지은은 평온한 얼굴로 대답했다.
“난 항상 그런 사람이었는데. 혁운이 오늘처럼 발전할 수 있었던 건 그동안 내가 약자를 무참히 짓밟으며 무자비한 수단으로 모든 경쟁자를 다 처리한 덕분이잖아. 잊은 거야?”
한수혁이 차가운 표정을 해 보였다.
최지은은 계속하여 말했다.
“한 대표, 그런데 기득권자인 한 대표가 무슨 자격으로 날 비난하는 거야? 진서연 앞에서 정의로운 척, 영웅인 척하며 허영심 채우고 싶어서 그래? 아니면 그냥 진서연이 정말로 안타까워서 그러는 거야?”
진서연이 팔을 뻗어 한수혁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대표님, 저 때문에 지은 언니랑 싸우지 마세요. 그러면 제 마음이 불편할 것 같아요.”
진서연이 입을 열자 한수혁과 함께 있던 사람들이 분위기를 풀려고 했다.
“최 대표님, 저희가 다 남자들이라 이런 농담이 습관이 됐나 봐요. 괜히 저희 때문에 한 대표님을 오해하신 것 같은데 한 대표님과 진서연 씨는 정말 아무 사이 아니에요.”
남자들은 서로를 감싸주는 걸 잘했다. 그들은 황급히 한수혁을 편들었다.
“맞아요. 정말 뭔가 있었다면 한 대표님이 진서연 씨를 최 대표님 앞에 데리고 오지도 않았겠죠.”
눈앞의 남자들이 한수혁에게 잘 보이려는 듯이 음흉한 표정을 짓고 있는 걸 본 최지은은 문득 모든 것에 흥미를 잃었다.
친구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더니, 아주 정확한 말이었다.
최지은은 한수혁과 싸울 기분이 아니었다.
그녀는 어떤 말을 해서 진서연의 정체를 까발릴지 다 생각해 두었지만 이젠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두 사람이 만나고 최지은은 홀로 행복하게 사는 것도 좋았다.
최지은은 한수혁과 진서연이 아닌 가장 구석 자리에 서 있는 한수혁의 비서를 바라보았다.
“오늘 밤 낙찰받은 것들 다 나한테 줘요.”
7년간의 감정이 허무하게 사라졌으니 그녀가 마땅히 받아야 하는 재산은 한 푼도 남기지 않고 다 받을 것이다.
비서는 잠깐 당황하며 한수혁을 바라보았다.
지금 그는 한수혁의 비서였기에 뭘 하든 한수혁의 동의가 있어야 했다.
한수혁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고 비서는 그제야 몸을 돌려 룸 안으로 들어간 뒤 직원에게 모든 경매품을 챙겨 최지은에게 주라고 했다.
“최 대표님, 여기 다 있습니다.”
최지은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뒤 한수혁을 바라보며 물었다.
“이거 다 네가 자발적으로 나한테 증여하는 거지?”
한수혁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는 최지은이 거리를 두며 말하자 불만스러웠다.
“내 건 다 네 거야. 네 마음에 드는 건 다 가져가도 상관없어.”
최지은은 덤덤히 대답했다.
“나랑 네 재산은 확실히 나누었으니 분명히 해두는 게 좋아서 물어본 거야. 괜히 누가 애교 한 번 부렸다고 나한테 줬던 걸 다시 그 사람한테 주겠다고 나한테 돌려달라고 할 수도 있으니까 미리 방지해야지.”
한수혁의 표정은 매우 어두웠다.
“그만해! 내가 자발적으로 준 거니까 다 챙겨 가.”
최지은은 무심한 얼굴로 고맙다고 한 뒤 직원에게 모든 경매품을 자기 차에 실으라고 했다.
진서연은 조용히 한수혁의 옆에 서서 경매품들 중 하나인 비취 팔찌를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한수혁은 시선을 내려뜨리더니 이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비취 팔찌는 남기고 가.”
최지은은 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리더니 우아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한 대표, 아까 한 대표가 그랬잖아. 이것들 다 한 대표가 나한테 자발적으로 준 거라고. 내 마음에 들지 않는 것들이라고 해도 이젠 다 내 소유야.”
진서연은 입술을 살짝 깨물면서 몰래 한수혁의 옷소매를 잡아당기며 고개를 저었다.
한수혁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최지은은 진서연이 하는 짓을 지켜보다가 경멸 어린 미소를 지어 보인 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모든 경매품을 챙겨서 당당하게 떠났다.
경매장 밖으로 나온 최지은은 경매품들을 배아현에게 건네며 대신 처리해달라고 했다.
배아현은 자신의 차에 가득 쌓인 경매품들을 바라보며 눈썹을 치켜올렸다.
“너 요즘 돈 부족해?”
혁운의 주식뿐만 아니라 경매품들까지 모조리 팔려고 하다니.
최지은은 고개를 저으며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언니가 나한테 한 달 내에 이쪽 일을 다 처리하고 돌아오라고 했어. 이제 보름 정도 남았네.”
보름 뒤, 최지은은 은행 카드에 차가운 숫자들만 남긴 채 미련 없이 깔끔히 도성으로 돌아갈 것이다.
모든 경매품 중 최지은은 한수혁이 두고 가라고 했던 비취 팔찌만 남겨두었다.
깊은 밤, 한수혁은 최지은의 외할머니 집으로 찾아왔다. 그의 손에는 최지은의 외할머니가 살아생전에 좋아했던 간식이 들려 있었다.
최지은은 한수혁이 자신의 앞에 간식을 내미는 걸 차가운 얼굴로 지켜보았다.
한수혁은 간식을 들고 집 안으로 들어와 최지은을 지나치며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외할머니께서는 이미 잠이 드신 거야? 요즘 몸은 괜찮으시대?”
최지은은 걱정스러운 표정의 한수혁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은 매우 싸늘했다.
한수혁은 최지은의 감정 변화를 눈치챈 것인지 목소리를 더 낮추었다. 마치 최지은의 외할머니가 깰까 봐 걱정되는 듯이 말이다.
“지은아, 내가 몇 번이나 설명했잖아. 나랑 서연이는 네가 생각하는 그런 사이가 아니라고. 보름 뒤면 우리 결혼식이야. 나는 진서연 때문에 우리 사이가 멀어지는 걸 원치 않아. 프로젝트가 끝나면 서연이는 바로 돌려보낼게. 응?”
최지은이 말했다.
“진서연 참 능력이 좋네.”
한수혁은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
“최지은, 말을 꼭 그렇게 해야겠어?”
최지은이 말했다.
“칭찬하는 것도 안 돼? 사회생활 한 지 얼마 안 됐을 텐데 이젠 걔 하나 빠진다고 프로젝트가 제대로 굴러가지도 않나 봐. 정말 대단하지.”
미간을 찌푸린 한수혁은 점점 더 치솟아 오르는 분노를 애써 억누르며 얼마 남지 않은 인내심을 발휘해서 말했다.
“서연이는 협력사에서 중점적으로 키우는 인재야.”
최지은은 짧게 대꾸한 뒤 차가운 눈빛으로 말했다.
“여긴 왜 온 거야?”
“네가 말없이 여기로 왔잖아. 나는 네가 여전히 화가 난 상태일까 봐 걱정돼서 널 찾으러 온 거야.”
최지은은 한수혁이 케이스를 힐끗 바라보는 걸 발견했지만 굳이 까발리지는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허리를 잡는 한수혁의 손을 뗀 뒤 쌀쌀맞게 말했다.
“별장으로 돌아간 거야?”
한수혁은 그렇다고 한 뒤 다시 최지은을 안으려고 했다. 최지은이 저항하자 그는 조금 더 힘을 주어 그녀를 자신의 품에 억지로 안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지은아, 움직이지 마. 조금 안고 있자.”
힘 차이가 컸기 때문에 최지은은 그에게서 벗어날 수 없어 가만히 있었다.
최지은이 옴짝달싹하지 못하자 한수혁은 입꼬리를 올리며 한참 동안 그녀를 안고 있다가 다시 최지은을 놓아주고 그녀의 손을 잡았다.
“우리 같이 집으로 돌아가자.”
최지은은 꼼짝하지 않고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조용히 한수혁을 바라보며 웃었다.
한수혁은 별장으로 돌아갔지만 별장의 물건들이 다 처리되었다는 걸 알지 못했다. 진서연 때문에 주의력이 분산되어 그것조차 발견하지 못하다니.
‘집?’
이제 그곳은 더 이상 최지은의 집이 아니었다.
최지은이 변심한 남자와 가정을 이룰 일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