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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이소희는 눈을 내리깔며 말했다. “알겠어요. 예전에는 제가 너무 좋아하는 마음에 선을 넘었지만 앞으로는 제 분수를 제대로 알게요. 두 분, 행복하길 바랄게요.” 그 말을 듣자 주변에 있는 친구들이 기다렸다는 듯 키득거리며 끼어들었다. “예전 일이라면 어떤 거 말하는 거야? 새벽마다 지훈이한테 전화해서 데리러 오라고 한 거? 아니면 술 취해서 사람들 앞에서 꼭 지훈이랑 결혼하겠다고 한 거? 그것도 아니면 지훈이 집까지 찾아가서 도우미 아줌마들을 붙잡고 지훈이의 취향을 캐물었던 걸 말하는 거야?” “소희야, 이제 지훈이는 가정이 있는 사람이야. 네가 계속 그렇게 들러붙으면 망신당하는 건 너랑 이씨 가문이야. 그러니까 철 좀 들어. 너 하나 때문에 네 오빠랑 지훈이 사이까지 틀어지면 어떡하려고?” 농담처럼 던지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그녀의 상처를 건드렸다. 이소희는 무의식적으로 유지훈을 바라봤는데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서 있는 그는 그저 무심한 표정이었다. 그 순간 그녀는 유지훈이 정말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느껴졌다. 늘 그녀를 살뜰히 챙겨주던 기억 속의 그가 아니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유지훈은 다른 여자들에게도 이렇게 차가운 태도였고 단 한 번도 그녀들에게 희망을 준 적이 없었다. 그가 그동안 이소희의 마음을 받아준 척했던 건 결국 친구 이민준의 체면 때문에 함부로 거절하지 못했을 뿐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하게 되었으니 그녀와의 관계도 확실히 정리하려는 것 같았다. 최가인은 그의 마음속에서 그 어떤 것보다 중요한 존재일 테니까. 그 생각이 미치자 이소희는 가슴이 저려 더 말하지 않고 고개만 끄덕인 뒤 뒤돌아섰다. 마침 생일 파티가 본격적으로 시작됐고 늦게 도착한 이민준은 손님들을 응대하느라 정신이 없어서 동생을 살필 겨를도 없었다. 반면 유지훈은 기다렸다는 듯 모든 사람에게 당당하게 최가인을 자신의 아내라고 소개하고 있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그녀에게 술을 건넬 때마다 대신 막아주고 직접 디저트를 집어 먹여줬으며 흐트러진 치맛자락을 정리해 주고 최가인이 피곤해 보이면 어깨를 주물러주기까지 했다. 사람들은 입을 모아 유지훈을 ‘사랑꾼’이라고 칭찬했고 최가인이 복이 많다며, 둘이 천생연분이라고 말했다. 멀리서 그 장면을 지켜보던 이소희는 마음이 더 씁쓸해졌고 애써 시선을 돌렸다. 구석에 혼자 앉아 있는 그녀를 보고 최가인이 와인잔을 들고 다가와 말을 건넸다. “소희 씨 오빠의 생일인데 왜 여기서 아무 말도 안 하고 있어요? 혹시 화났어요?” 최가인이 다가올 줄 몰랐던 이소희는 본능적으로 두 걸음 물러섰다. “저 화 안 났어요. 지훈 오빠에 대한 마음도 이미 완전히 정리했어요.” 최가인은 멈칫하더니 복잡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내가 나이가 많으니까 말을 편하게 할게요. 지훈이한테서 들었는데 네가 오랫동안 지훈이를 따라다니며 언젠가는 꼭 사귀자고 했다며?” “그건 이미 지난 일이에요. 지훈 오빠가 언니를 오랫동안 좋아했다는 걸 알고 나서는 저도 마음을 접었어요. 이제 저는 두 분이 진심으로 행복하길 바라요.” 그 말을 끝으로 이소희가 자리를 뜨려는데 최가인이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지훈이가 나를 오랫동안 좋아했다고? 그 얘기는 어디서 들은 거야? 지훈이가 직접 말한 거야?” 이소희는 더 이상 최가인과 대화하고 싶지 않았다. “다들 그렇게 말하던데요. 궁금하면 직접 물어보세요. 저는 잘 몰라요.” 하지만 최가인은 그녀를 쉽게 놓아주지 않았고 끝까지 사실을 확인하려는 듯 그녀의 손목을 붙잡고 있었다. 그런데 두 사람이 실랑이를 벌이고 있을 때 갑자기 머리 위에서 무언가가 덜컥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천장의 샹들리에가 느슨해진 것이다. 검은 물체가 빠르게 추락하는 걸 보자 이소희의 머릿속은 새하얘졌다. 그때 마침 이쪽으로 다가오던 유지훈은 급격히 얼굴이 굳더니 망설임 없이 최가인을 끌어안고 멀리 피했다. 수십 킬로그램은 되어 보이는 조명이 이소희 머리 위로 떨어졌고 그녀는 바로 바닥에 쓰러졌다. 그녀의 머리에서 피가 멈추지 않았고 온몸이 부서질 듯한 고통이 몰려왔다. 피 웅덩이 속에서 이소희의 몸이 경련하듯 떨렸고 옆에서 사람들의 비명이 들렸다. 그녀는 눈앞이 점점 흐려지다가 완전히 의식을 잃기 직전에 유지훈이 최가인을 안고 낮은 목소리로 달래주는 모습을 지켜봤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이소희는 몽롱한 정신으로 눈을 떴고 병실 침대 곁에 눈이 새빨갛게 충혈된 이민준이 앉아 있었다. “미안해, 소희야. 오빠가 널 지켜주지 못해서 네가 이렇게 심하게 다쳤어.” 이소희는 고개를 저으며 쉰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야, 오빠. 너무 갑작스러웠잖아. 오빠가 멀리 있어서 어쩔 수 없었지.” 그 말에 이민준은 사고 직전의 상황이 떠올라 더 괴로워졌다. “난 그렇다 쳐도 지훈이는 바로 네 옆에 있었잖아. 그런데도 널 안 구했어. 네가 최가인이랑 이야기를 안 하고 있었으면 피할 수 있었을 텐데...” 이소희는 다시 고개를 저으며 차분하게 말했다. “내가 위험한 상황이었던 건 맞지만 지훈 오빠가 좋아하는 가인 언니도 옆에 있었잖아. 지훈 오빠가 본능적으로 가인 언니를 구한 건 잘못한 게 아니야. 예전에 내가 착각했었는데 이번 일을 겪고 나니까 정말 다 내려놓게 됐어.” “그래. 네가 이제 지훈이에 대한 마음을 내려놨으니 어떤 선택을 하든 오빠가 응원해 줄게.” 이민준은 그녀의 손을 꼭 잡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소희는 힘겹게 웃으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며칠이 지나 그녀의 상태가 안정되자 계속 곁을 지키며 잠도 못 자던 이민준은 그제야 쉬러 갔다. 병실은 다시 조용해졌고 이소희는 휴대폰을 꺼내 열흘 뒤 출발하는 비행기 티켓을 예약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항공사에서 확인 전화가 걸려왔고 그녀는 안내 내용을 다 듣고 나서 대답했다. “네, 맞아요. 19일에 출발하는 미국행 첫 항공편이고요, 퍼스트 클래스로 예약해 주세요.” 그때 문가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퍼스트 클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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