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화 집주인
신지은은 휴대폰을 내려놓고 일어서려다가 문득 회귀 전 기억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그때 민유한이 건넨 물을 마시고 갑자기 기절하듯 쓰러졌었지? 그리고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는 옷이 다 흐트러진 채 남자 동기랑 같이 누워있었고.’
당시 민유한은 그 일로 그녀 옆에 누워있던 남자 동기를 미친 듯이 패버린 후 오늘 일은 없었던 일로 해주겠다고, 그러니 걱정하지 말라며 그녀를 안심시켰다.
하지만 신지은은 그날 이후, 민유한을 볼 때마다 깊은 죄책감을 느꼈고 그래서 그가 원하는 것이라면 뭐든 다 들어주려고 했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애초에 그녀는 그가 건넨 물 때문에 정신을 잃은 것이었다.
신지은은 다시금 휴대폰을 집어 들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민유한이 요 며칠 사이에 이상한 약물을 사들이지는 않았는지 한번 알아봐 주세요. 예를 들면 최음제 같은 거요.”
답변은 빠르게 돌아왔고 신지은의 얼굴은 차갑게 가라앉았다.
역시 그녀의 예상대로 최음제를 사들인 게 맞았다.
‘쓰레기 같은 새끼!’
신지은은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경호원과 함께 신온 별장으로 향했다.
그 시각, 해강 그룹 대표이사 사무실.
회의 하나를 마치고 돌아온 강인호는 30분 뒤에 있을 또 다른 회의를 위해 잠깐 눈을 붙였다.
그런데 그때 휴대폰이 울렸고 그는 눈을 가늘게 뜬 채 전화를 받았다.
“대표님, 아가씨께서 신온 별장으로 향하셨습니다.”
강인호는 익숙한 보고인 듯 미간을 주무르며 답했다.
“그래, 알았어.”
그를 안심시키고 민유한과 함께 새로운 작전을 짤 거라는 건 이미 예상했던 바였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보고드릴 게 있습니다. 그... 아가씨게서 민유한이 최음제를 사들였다는 얘기를 전해 들으셨습니다.”
“뭐?”
강인호의 눈빛이 단번에 날카롭게 변했다.
‘민유한이 약물을 사들였다는 얘기를 듣고도 거기로 갔다고?’
강인호는 주먹을 꽉 말아쥐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차 대기해 놔.”
...
신온 별장.
집 앞에 도착한 신지은은 내리기 전 경호원을 향해 말했다.
“일단 여기서 대기하고 있어요. 무슨 일 있으면 그때 다시 부를게요.”
“네, 아가씨.”
신지은은 문 앞으로 걸어간 후 곧장 비밀번호를 입력했다. 그런데 입력하자마자 비밀번호가 틀렸다는 경고음이 들려왔다.
반복되는 경고음에 결국 도우미가 달려와 문을 열어줬고 신지은은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비밀번호부터 바꿨다.
“이봐요! 남의 집 비밀번호는 왜 바꿔요!”
도우미가 눈을 부릅뜨며 외쳤다.
이에 신지은은 고개를 돌리며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이 별장의 주인이 누군지 말해보세요.”
도우미는 그녀의 눈빛에 움찔하더니 이내 버벅대며 답했다.
“그, 그야 당연히 손아영 아가씨죠.”
“아가씨? 하!”
신지은은 기가 막힌다는 듯 코웃음을 치고는 도우미의 멱살을 확 잡았다.
“귀 열고 잘 들어. 이 별장 주인의 이름은 신지은이야. 만약 다음에도 또 집주인을 헷갈리면 그때는 눈알을 파버릴 테니까 알아서 해!”
무시무시한 경고를 내뱉은 후, 그녀는 곧장 거실을 가로질러 1층 방 쪽으로 걸어갔다.
그런데 문고리를 잡고 문을 열려고 하자마자 안쪽에서 손아영에게 아부하는 목소리부터 들려왔다.
“아영아, 너희 집 진짜 엄청 크다. 완전 부러워!”
“내가 뭐랬어. 아영이가 흙수저일 리 없다고 했지? 아영이가 걸친 옷들이 다 짝퉁이라는 애들은 눈이 다 삔 거라니까?”
“나는 대체 언제쯤 이런 집에 살 수 있을까?”
손아영은 친구들의 말에 기분이 좋은 듯 입꼬리를 한껏 말아 올렸다.
“나는 티 내는 걸 좋아하지 않아. 주변에서 신분 차이 때문에 친구 관계가 멀어지는 걸 많이 봤거든. 그래서...”
“어? 이거 신지은 아니야?”
그때 친구 한 명이 손아영의 말을 자르며 물었다.
그러자 나머지 친구들도 동시에 구석 쪽에 있는 가족사진을 바라보았다.
4살짜리 아이의 사진이었지만 지금의 신지은과 거의 똑같은 얼굴이라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아영이 너희 집에 왜 신지은 가족사진이 있어?”
친구들이 손아영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건 음... 그러니까...”
손아영은 식은땀을 삐질 흘리며 한참 뒤에야 다시 입을 열었다.
“지은이가 우리 집에 자주 놀러 오거든. 아무래도 우리 집을 자기 집처럼 생각해서 가족사진을 두고 간 것 같아.”
“뭐?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친구 집에 가족사진을 두고 가는 게 말이 돼? 아영이 너 조심해. 그러다 신지은이 이 집이 자기 집이라고 거짓말할 수도 있어.”
“신지은이 들고 다니는 가방도 입고 있는 옷도 다 아영이 네가 선물한 거지? 집에 자주 드나든다는 걸 보면 뻔하지 뭐.”
손아영은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애써 미소를 지었다.
“나랑 지은이는 친자매 같은 사이야. 만약 지은이가 너희들한테 이 집이 자기 집이라고 해도 그냥 넘어가 줘. 들키면 얼마나 창피하겠어.”
신지은은 손아영의 말에 어이가 없어 웃음이 다 나왔다.
그리고 동시에 왜 그때는 손아영의 이런 얼굴을 알아채지 못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아니지. 차라리 잘 됐어. 이래야 나중에 더 큰 망신을 당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