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화
성지원은 정말로 순진하게 믿고 있었다. 문정우가 자신을 친구들에게 정식으로 소개하지 않은 건 ‘데릴사위' 때문일 거라고. 남자의 자존심이 상해서 소개하지 않은 것뿐이라고. 그래서 부모님을 설득해 어떻게든 자신이 출가하는 형식으로 만들고자 노력했다. 그러면 문정우는 더는 위축될 필요도, 눈치 볼 필요도 없을 테니까.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니 정말 어리석기 그지없었다.
세 사람은 투덜대느라 성지원과 강은호의 존재를 미처 발견하지 못했다. 두 사람이 앞으로 다가가고 나서야 그들은 알게 되었다.
“형... 형수님.”
마승진은 제일 먼저 성지원을 알아보고는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곧이어 최민성과 허원호도 성지원을 발견하고 어색하게 시선을 피하면서 성지원을 불렀다.
“형수님.”
절묘하게도 문정우와 백설희도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백설희는 담배 냄새에 얼굴을 찡그리더니 바로 기침을 하며 비틀대기 시작했다. 문정우는 그런 백설희의 허리에 손을 올리며 잡아 주고는 삼인방을 향해 불쾌한 듯 말했다.
“담배 피울 거면 좀 멀리 가서...”
문정우도 성지원을 발견하고 말았다. 단아한 옷차림을 하고서 차갑게 서 있는 성지원을 보니 순간 말문이 막혔다.
‘성지원이 왜 여기에 있는 거지?'
성지원은 담담한 표정을 지으며 걸음을 멈추었다. 그러고는 백설희를 흘끗 보더니 삼인방에게 말했다.
“앞으로 저분이 형수니까 착각하지 말아줬으면 좋겠네요.”
정말로 가소로웠다.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결혼을 약속한 연인이었는데 지금 문정우 품에는 다른 여자가 있지 않은가. 제일 가까웠던 사람이 일주일 만에 제일 낯선 사람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인생이란 참 잔혹하고 예측 불가능한 것이었다.
성지원은 시선을 거두고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갔다. 마승진 삼인방은 어안이 벙벙했다. 자연스럽게 시선을 문정우로 돌렸지만 문정우는 입술을 꼭 다물고 있었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제이원 라운지에서 나온 성지원은 그대로 진씨 가문으로 찾아갔다. 가는 도중에 강은호는 숙취해소제를 성지원에게 사다 줬고 성지원은 더는 머리가 어질거리지 않았다.
진씨 가문으로 들어오자 도우미 아주머니가 성지원의 몸을 훑었다. 그러면서 그녀의 가방과 핸드폰을 전부 가져가 버렸다. 몸수색이 끝난 후에야 성지원은 진형문을 만날 수 있었다.
진형문은 살집이 조금 있는 중년 남자였고 늘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어 줄곧 좋은 사람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지금은 생각이 완전히 바뀌게 되었다. 그간 진형문을 큰아빠라고 부른 것이 아깝게 느껴졌다. 진형문은 여전히 자애로운 눈빛을 하며 성지원을 보았다. 입가에는 미소도 걸려 있었다.
“지원이 왔구나. 얼른 앉아. 차를 내오라고 하마.”
“아니요. 제 동생은 어디에 있죠?”
성지원은 직설적으로 물었다. 그러자 진형문은 웃으며 말했다.
“젊은이들은 성격이 급하다니까. 네 엄마가 말해서 무슨 상황인지 알고 있겠지? 그래, 내가 원하는 건 가져왔고?”
성지원은 여유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저와 엄마 손에는 각각 10%의 지분이 있죠. 그걸 손에 넣는다면 최대 주주가 될 텐데 정말로 그 커다란 케이크를 소화해낼 자신이 있으세요?”
제이원 그룹은 대기업이었고 20%의 지분을 대충 계산해 보아도 대략 4천억 정도는 되었다. 살기가 담긴 날카로운 성지원의 눈빛에도 진형문은 태연하게 웃으며 말했다.
“지원아, 우린 가족이잖니. 가족끼리 돈 얘기를 하는 건 좀 그렇지 않니? 그러니까 돈 얘기는 안 하는 게 나을 것 같구나...”
진형문은 이내 멈칫하며 차갑게 픽 웃었다.
“돈이 네 아빠와 동생의 목숨보다 중요한 건 아니지 않니. 안 그래?”
그는 대놓고 성지원을 협박하고 있었다. 성지원은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
“돈 얘기를 하지 말라고요. 그럼 설마 거저 달라는 건가요?”
“지원아, 네 아빠 명의로 20%나 되는 지분이 있어. 매년 벌어들이는 수익으로 너희 가족 충분히 먹고살 수 있을 거야.”
진형문은 의미심장한 말을 꺼냈다. 다른 사람이 들으면 꼭 그녀를 걱정하는 것처럼 들리게 말이다.
“네 아빠는 혼수상태고 너도 문정우와 파혼한 상태이지 않니. 회사의 일이라고는 하나도 모르는 데 네가 그 지분을 갖고 있어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어. 안 그러니? 지원아, 사람이 욕심이 너무 많으면 화를 불러일으킨단다!”
“하, 진형문 씨. 정도껏 하시죠?”
‘뭐? 욕심이 너무 많으면 화를 불러일으킨다고? 그건 내가 할 말이 아닌가? 뻔뻔해!'
성지원의 분노에도 진형문은 태연하게 말했다.
“난 다 널 생각해서 그러는 거란다. 그리고 네게 좋은 남편감도 알아봤어. 외모도 꽤 괜찮으니까 온 김에 한 번 만나봐!”
말을 마치자마자 한눈에 봐도 서른이 넘은 듯한 남자가 들어왔다. 남자는 정장을 입고 있었고 머리는 한 가닥도 빠짐없이 올려 업계 엘리트처럼 보였다.
“박철민 씨?”
성지원은 남자를 단번에 알아보았다. 남자는 제이원 그룹에서 재무 이사로 일하고 있는 박철민이었다. 성준혁이 가장 신임하는 사람 중 한 명이었건마는 진형문의 사람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맞아요. 지원 씨가 절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네요.”
박철민은 다소 기쁜 표정을 지었다. 성지원을 보는 그의 눈빛에는 욕망으로 가득했다.
그러자 진형문이 말을 이었다.
“지원아, 우리 철민 씨가 널 오랫동안 좋아했다고 하더구나. 진취적인 사람이고 네 아빠도 굳게 믿는 사람이니 네게도 분명 좋은 남편일 거야. 네 아빠가 혼수상태인 지금 집에 남자가 없으면 얼마나 힘들겠어. 오늘 내가 네 아빠 대신 허락해줄게. 철민 씨와 결혼해.”
“진형문 씨, 지금 뻔뻔하게 무슨 소리를 하는 거죠?”
성지원은 주먹을 꽉 움켜쥐며 치밀어오르는 분노를 억눌렀다.
“내 동생을 납치했다고 정말로 내가 호락호락할 줄 알았어요? 하, 날 너무 얕잡아 보는 거 아니에요? 두고 봐요, 반드시 후회하게 해줄 테니까.”
말을 마친 성지원은 잔뜩 화가 난 채 밖으로 나가려 했다. 진씨 가문으로 오기 전부터 성지원은 생각해 두었다. 진형문이 선을 넘지만 않는다면 성준혁과 성지은의 안전을 위해 타협하리라고.
아무래도 그녀가 너무 순진했던 것 같았다. 인간에게 한번 욕심이 생기기 시작하면 끝도 없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 진형문이 원하는 건 그녀와 김희영의 지분뿐이 아니었다. 진형문은 성씨 가문을 장악해 성지원의 미래마저 좌지우지하려고 했고 그들에게 한 푼도 남지 않을 때까지 괴롭힐 생각이었다.
성지원은 절대 진형문의 뜻대로 움직일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이때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려와 걸음을 멈추었다. 그 울음소리는 바로 성지은의 울음소리였다. 일주일 내내 성지은과 붙어 있었던 성지원은 당연히 못 알아챌 리가 없었다. 성지원은 몸을 돌려 진형문을 노려보았다.
‘지은이를 어떻게 한 거지?'
진형문은 핸드폰을 내려놓고는 손뼉을 치자 한 남자가 예쁜 상자를 들고 들어왔다.
“지원아, 내 인내심에도 한계가 있단다. 일단 그 선물부터 열어봐. 열어보고 잘 생각해.”
말을 마친 진형문은 남자를 흘끗 보았다. 남자는 바로 성지원의 앞으로 상자를 내밀었다.
포장이 이상하리만큼 예뻐 성지원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상자를 여니 안에는 역겨운 것이 들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작은 손이었다. 갓난아기의 손이 피범벅이 된 채 상자 안에 있었다. 성지원은 자세히 들여다보고 나서야 그것이 케이크임을 알아챘고 헛구역질이 나올 뻔했다.
진형문은 가식적인 미소를 치우고 본성을 드러냈다. 그러면서 성지원을 향해 명령투로 말했다.
“오늘 밤 여기 남아서 철민과 좋은 시간을 보내거라. 네 결혼식은 내가 알아서 성대하게 치러줄 테니까 얌전히 있어. 내 말만 잘 들으면 너희 가족도 무사할 거야. 그렇지 않으면 그 상자 안의 것이 케이크가 아니라 진짜가 될 거니까.”
‘오늘 밤 박철민과 밤을 보내라고? 하, 어이가 없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