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화
성지원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하도하의 손이 닿은 손등은 무언가에 데인 것처럼 뜨거워 서둘러 손을 치웠다. 그러나 술잔이 기울어지더니 그대로 하도하의 다리에 술을 쏟고 말았다.
하도하는 고개를 들어 다소 차가운 눈빛으로 성지원을 보았다.
“죄송해요. 제가 얼른 닦아드릴게요.”
성지원은 실수했다는 생각에 얼른 티슈를 뽑아 하도하의 다리를 닦아주려고 했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커다란 손이 그녀의 손을 꽉 잡으며 차갑게 치워냈다. 성지원을 향한 하도하의 반감이 조금 전보다 더 짙어졌고 목소리도 어느새 불쾌감이 묻어나 있었다.
“성지원 씨, 자중하세요.”
성지원은 그제야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알게 되었고 황급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남자의 다리를 만졌다는 생각에 순식간에 얼굴이 붉어졌다.
“죄송해요... 고의는 아니었어요.”
그녀는 너무도 다급해 그런 행동을 하고 만 것이었다. 윤재현의 안색도 어두워져 있어 성지원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아무래도 차려진 밥상을 엎은 것 같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조금 전 윤재현이 공손하게 말을 건 것을 보아 성지원은 자신의 옆에 있는 남자가 윤재현마저도 함부로 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눈치채게 되었다. 그런데 그런 남자에게 성지원은 이런 큰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뭘 멍하니 서 있어요. 얼른 도련님께 사죄의 의미로 벌주라도 마셔요.”
이때 홍유빈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성지원에게 한 줄기의 빛과 같았다. 얼른 정신을 차린 성지원은 빠르게 테이블을 닦은 후 술잔에 술을 따라 하도하를 보면서 나직하게 말했다.
“정말 죄송했어요. 방금은 제가 무례를 저질렀네요. 벌주로 세잔 마실 테니 용서해 주세요.”
하도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이의 접시에 아이가 평소에 즐겨 먹는 음식을 담아주었다.
반면 아이는 하도하를 사납게 째려보고 있었다. 자그마한 주먹을 꽉 쥔 채 말이다. 아무래도 하도하가 성지원을 괴롭히고 있는 것으로 여겨 화가 난 듯했다.
“정말 죄송해요.”
성지원은 술잔을 들고 고개를 돌린 후 마셔버렸다. 입가로 흘러나온 술이 그녀의 목을 타고 흘러내렸다. 세잔을 연거푸 마신 성지원은 목이 타버리는 것처럼 아팠다. 평소에 와인만 마셨던 그녀는 이런 독한 술은 거의 입에 대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술기운이 너무도 빠르게 올라왔고 볼이 어느새 불그레해졌다. 그런 성지원의 모습은 너무도 아름다웠다.
하도하의 시선이 불그레해진 성지원의 볼로 향했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곧이어 윤재현은 하도하의 술잔에 공손하게 술을 따라주었다. 성지원은 하도하 대신 전부 마셨고 결국 머리가 어질거리며 다소 알딸딸해졌다.
다행히 그들의 식사는 얼마 지나지 않아 끝나게 되었다. 룸에서 나가려던 때 홍유빈이 그녀의 어깨를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이제야 누구한테 부탁해야 하는지 알겠죠? 내일 하씨 가문에 파티가 있을 거예요. 그때도 성지원 씨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말하면서 홍유빈은 가방에서 초대장을 꺼내 성지원의 손에 쥐여주었다.
“제가 도울 수 있는 건 여기까지예요. 기회는 성지원 씨가 직접 붙잡아요.”
성지원은 멀어져가는 홍유빈의 뒷모습을 보다가 초대장을 열어보았다. 안에는 하도하의 아들, 하우주의 생일 파티라고 적혀 있었고 시간은 내일 저녁이었다.
‘하도하? 하도하라고...?'
‘그럼 방금 그 남자가 그때 하씨 가문에서 왔던 악마였단 말이야?'
룸으로 들어온 강은호는 성지원의 몸에서 나는 짙은 술 냄새에 걱정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지원아, 괜찮아요? 무슨 술을 이렇게 마셨어?”
성지원은 괜찮다며 대답한 후 초대장을 가방에 넣으려고 했지만 강은호가 빠르게 채갔다. 초대장의 내용을 본 강은호의 표정이 굳어졌다.
“내일 이 파티에 가려고?”
성지원은 조금 전 자신을 계속 흘끗흘끗 쳐다보던 아이가 떠올라 저도 모르게 부드러운 미소가 지어졌다.
“응.”
홍유빈이 직접 길을 만들어주었으니 이 기회를 단단히 잡아야 했다.
성지원의 대답에 강은호는 순간 화가 났다.
“지원아, 하도하가 누군지 알아? 누군지도 모르면서 내일 이 생일 파티에 가겠다고?”
조금 알딸딸해진 성지원은 강은호의 언성에 다소 눈물을 머금은 눈으로 강은호를 보았다. 조금 서러웠다. 원래부터 예쁜 얼굴이었는데 이런 표정까지 지으니 정말이지 보호 욕구가 샘솟게 했다. 그래서인지 강은호는 더는 화를 낼 수 없었다. 결국 작게 한숨을 내쉬며 성지원에게 말했다.
“내일 생일 파티에 분명 할 일 없는 어르신들도 오실 거야. 해성의 재벌이란 재벌이 다 모이는 자리니까.”
그 말인즉 하도하 아들의 생일 파티는 거대한 맞선 자리가 될 것이라는 의미였다.
“홍유빈 씨가 그런 의미로 준 거였네!”
성지원은 술기운에 다소 어지러웠을 뿐 정신은 멀쩡했다. 문정우는 그녀와의 결혼을 취소했고 성준혁은 혼수상태, 김희영은 그녀를 낳은 뒤로 육아와 성준혁의 내조만 하며 살았던지라 회사 일에서 손을 뗀 지 오래였다. 게다가 성지원은 경영에 재능이 없었다.
현재 모녀에게는 몇조의 재산이 있었다.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호시탐탐 그들의 재산을 노리고 있었고 이번은 어찌 해결했다고 해도 다음에는 무슨 수단으로 빼앗아 가려고 할지 몰랐다. 그에 비해 하도하는 ‘악명'이 자자하지만 몇 년간 해성에서 유성 그룹의 위세는 독보적이었다. 잠시 위를 모면할 인맥을 찾는 것보다 아예 성씨 가문의 ‘골칫거리'를 한꺼번에 처리해 줄 남자를 선택하는 게 나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성지원은 자신의 결혼을 거래처럼 내주고 낯선 남자에게 인생을 맡기고 싶지 않았다.
강은호는 그녀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정말로 가려는 것인 줄 알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너와 정우 일은 아직 잠잠해지지 않았어. 그 파티에 간다면 분명 다들 널 보면서 웃을 거라고. 정말로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어도 괜찮아?”
성지원은 해성시에 가장 유명한 재벌 2세였다. 가문도, 외모도, 약혼자까지 그간 사람들은 부러워하면서 질투하고 있었다. 그런데 문정우는 결혼식 날에 도망쳤고 아버지 성준혁은 혼수상태였다. 그간 그녀가 망하기만 기다렸던 사람들은 분명 이때다 싶어 비웃고 그녀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할 것이었다. 성지원이 맞선이 목적인 그 생일 파티에 나타나는 순간 그들은 분명 기다렸다는 듯이 성지원을 비웃고, 헐뜯고, 어떻게든 끌어내리려 들 것이다.
사실 강은호가 말하지 않아도 성지원은 잘 알고 있었다. 여자들만의 기 싸움이 얼마나 사납고 독기가 가득한지를.
성지원은 한참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은호야, 나랑 같이 진씨 가문에 가줘.”
성준혁이 혼수상태가 된 후로 여러 주주가 부단히 성지원과 김희영에게 연락해 압박하기 시작했다. 회사에 대표가 없으면 안 된다느니 하면서 임시 대표라도 정해두라고 했다. 그리고 그들이 추천한 ‘임시 대표'는 바로 진형문이었다.
진형문은 아주 대놓고 제이원 그룹 대표 자리를 노리고 있었다. 그 수단은 더럽고 치사할 정도로 비열했고 지금까지의 상황을 봐서는 이틀 내로 답을 주지 못하면 정말로 갓 태어난 성지원의 동생을 해칠지도 몰랐다. 이런 생각에 성지원은 불안이 온몸으로 퍼졌다.
복도 한가운데로 나온 성지원은 익숙한 얼굴 세 명을 마주치게 되었다. 그들은 문정우의 오랜 친구들이었고 셋 다 입에 담배를 물고 있었다. 성지원은 그들이 불평하는 걸 들었다.
“아니, 그 여자는 왜 그렇게 유난이냐? 예전에 형수님이 있었을 때는 우리가 담배 피워도 뭐라 한 적도 없었잖아. 고작 담배 피우는 거로 왜 그런 거냐고. 뭐 자기가 형수님보다 더 잘난 줄 아나?”
성지원은 순간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 고작 며칠이 지났다고 문정우가 벌써 그 여자를 자기 친구들에게 소개하고 있지 않은가. 예전의 성지원은 문정우의 친구 무리에 녹아들기 위해 오랜 시간이 걸렸다. 문정우는 단 한 번도 그녀를 친구에게 정식으로 소개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