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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화

그렇게 시간이 6년이나 흐른 것이다. 그리고 오늘 모든 걸 끝내기로 했다. 성지원은 침대 위 중앙에 놓인 작은 상자를 한참 바라보다가 결국 조용히 드레스룸 깊은 구석에 밀어 넣었다. 모든 걸 정리한 후 욕실로 들어가 샤워했고 평소보다 조금 더 신경 써서 연보라색의 롱 드레스를 골랐다. 그러고는 화장대 앞에 앉아 연한 화장을 했다. 거울 속 비친 성지원의 모습은 화장 덕에 평소보다 더 우아한 분위기가 흘렀다. 성지원은 곰곰이 생각하더니 긴 머리를 단정하게 묶어 올렸고 잔머리와 앞머리는 고데기로 살짝 손질했다. 묘하게도 인상이 확 달라졌다. 분위기도 전보다 훨씬 밝아졌고 단아한 느낌이었다. 연보라색의 드레스는 그녀의 하얀 피부와도 잘 어울렸다. 곧이어 그녀는 심플한 액세서리를 골라 착용했다. 이 정도는 어른들이 좋아하리라 생각했다. 원래 향수를 뿌리고 싶었지만 여자에게 관심이 없는 하도하가 떠올라 향수 냄새도 그다지 좋아하지 않으리라 생각해서 뿌리지 않았다. 성지원은 하이힐을 신고 다시 거울 앞에 나타났다. 거울 속 자신을 바라보는 성지원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지어졌다. ‘살면서 문정우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 이렇게까지 꾸며본 게 정말 처음이네...' 성지원은 그간 문정우를 만날 때만 이렇게 열심히 꾸며보았었다. 시간은 많지 않았다. 성지원은 얼른 표정 관리를 한 후 자신의 생년월일이 적힌 종이를 가방에 챙겨 넣었다. 미리 준비해둔 선물도 잊지 않고 챙겨 집을 나섰다. 오늘은 아이의 생일 파티였다. 그래서인지 시간은 이른 오후부터 시작되었고 이미 해성시에서 쟁쟁한 집안의 사모님들과 자제들이 속속들이 하씨 가문에 도착하고 있었다. 늘 조용하기만 했던 하씨 가문의 저택은 오늘만큼은 북적였다. 성지원은 차 안에서 눈치를 살폈다. 사람이 적어진 틈을 타 조용히 차에서 내려 저택 안으로 들어간 후 생일 선물과 생년월일을 적은 종이를 바쳤다. 하씨 가문의 저택은 크고 호화로웠다. 심지어 메인 홀에는 고급스러운 샹들리에가 있었고 이미 누군가 피아노를 연주하기 시작했는지 잔잔하게 울리는 피아노 선율이 넓은 공간을 감쌌다. 홀 밖에서는 사람들이 웃으며 대화를 주고받는 소리가 들려왔다. 성지원은 그런 사람들을 피해 구석 자리에 앉았다. 그러면서 ‘진짜' 파티가 시작되기를 기다렸다. 그 시각 하씨 가문 본채 안에서. 하도하의 표정은 먹구름이 낀 것처럼 어두웠고 싸늘한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생일 파티가 곧 시작인데 그의 아들인 하우주는 방 안에 틀어박힌 채 좀처럼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도우미들은 문밖에서 전전긍긍하며 하우주를 달래고 있었다. “우주 님, 우주 님 문 좀 열어주세요...” 하지만 대답은커녕 인기척도 들려오지 않았다. “도련님, 열쇠 가져왔습니다.” 백 집사가 급히 열쇠를 들고 왔다. 그러자 하도하는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열어요.” 백 집사는 고개를 끄덕인 후 조심스럽게 앞으로 나섰다. 열쇠를 꽂은 후 문을 열었다. “아아...” 곧이어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왔고 남자아이는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하도하는 방으로 들어가다가 하우주가 던진 스탠드가 머리 위로 떨어졌다. 순간 뒤에 있던 도우미들은 숨을 꾹 참았다. 문을 굳게 닫아버리는 하도하를 보며 하우주가 오늘 단단히 혼나리라 생각했다. 그러면서 그들은 고개를 돌려 백 집사를 바라보았다. 백 집사도 미간을 구긴 채 걱정스러운 얼굴로 지켜보고 있었다. 하늘색으로 꾸며진 하우주의 방에는 하도하와 하우주만 서 있었다. 하도하는 하우주를 보며 냉기를 뿜어내고 있었고 하우주는 작은 짐승처럼 하도하를 째려보고 있었다. “이리 와.” 하도하는 먼저 앞으로 한 걸음 걸어갔다. “아악!” 하우주는 소리를 지르며 한 걸음 물러났다. 소리를 지르는 것이 하우주가 감정을 표현하는 유일한 방식이었다. 하도하가 한발 다가설 때마다 하우주는 소리를 지르며 하도하를 향해 물건을 던졌다. 그만 다가오라는 경고였다. ‘이게 무슨 소리지?' 같은 시각 성지원은 자신 외에 아무도 없는 공간에서 점점 뚜렷해지는 소음에 의아함을 느끼며 고개를 들었다. 물건이 깨지는 소리와 어린아이가 지르는 비명이 더 크게 들려와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잔뜩 성이 난 채 씩씩대며 난간 위로 올라간 작은 형체를 발견하게 되었다. ‘어? 그때 그 귀여운 강아지?' 성지원과 눈이 마주친 하우주는 멍하니 서 있었다. 성지원은 자신이 이런 상황에서 하우주를 만나게 되리라고는 전혀 몰랐던지라 얼른 난간 아래로 달려가 팔을 벌렸다. 행여나 아이가 떨어질까 봐 말이다. 하우주에게 위험하다고 얼른 방으로 들어가라고 말하기도 전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는 무서울 정도로 위압적이었다. “내려와. 이런 식으로 떼쓰면 뭐가 바뀌는 줄 알아?” 말은 차가웠지만 행여나 아이가 떨어질까 봐 걸음을 멈추었다. 하도하의 차갑기만 했던 두 눈에 걱정도 담겨 있었다. 하우주는 난간을 꽉 잡은 채 가만히 쪼그려 앉았다. 그 조그마한 몸이 언제든지 떨어질 것처럼 아슬아슬했다. 아래층에 있는 성지원은 가슴을 졸이며 아이를 보았다. “움직이지 마. 얼른...” “내려와. 같은 말 반복하게 하지 말고.” 강압적인 어투가 들려오며 성지원의 말을 잘랐다. 남자의 명령투는 성지원이 들어도 화가 날 정도였다. ‘아들한테 하는 말인 거야, 부하 직원한테 하는 말인 거야? 아니, 아이가 지금 얼마나 위험한 상황인데 그렇게 말하면 어쩌자는 거지? 이럴 때일수록 아이를 잘 달래야 하는 거 모르나?' 아이는 강아지 같은 눈망울로 성지원만 바라보았다. 입술을 꼭 틀어 다문 채 두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달려 있었다. 정말이지 보기만 해도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아이가 아무리 불쌍한 얼굴을 하고 있어도 성지원은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여하간에 성지원은 어디까지나 외부 손님일 뿐 두 사람 사이에 함부로 끼어들 자격은 없었다. 성지원은 아이가 손에 힘이 풀려 난간 아래로 떨어질까 봐 걱정되었지만 커다란 손 하나가 조심스럽게 아이를 향해 다가가더니 이내 들어 올렸다. 안도의 한숨을 쉬기도 전에 위층에서 귀가 찢어질 듯 들려오는 아이의 소리가 들려왔다. ‘설마 혼나고 있는 건가?' 성지원의 머릿속에 순간 하도하의 ‘악명'이 떠올랐다. 조금 전 난간에서 뛰어내리려던 듯한 아이의 두려운 눈빛까지 떠오른 성지원은 지금 들려오는 아이의 비명까지 겹쳐 끔찍한 가정 폭력 장면을 상상하게 되었다. 더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던 성지원은 초조한 목소리로 위층을 향해 소리쳤다. “하도하 씨, 아직 어리잖아요! 무슨 일이 있어도 말로 해결해야죠! 때리면 안 돼요!” 말을 마치자마자 이상하게 아이의 비명이 뚝 끊겼다. 곧이어 성지원의 시야에는 한 남자의 얼굴이 들어왔다. 그 얼굴은 바로 수많은 여자들의 가슴을 설레게 한 얼굴이었다. 불과 몇 미터 거리였던지라 성지원은 하도하가 뿜어내는 강렬한 한기를 고스란히 느끼게 되었다. 칠흑같이 어두운 눈동자는 날카롭기 그지없었고 성지원은 등골이 서늘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성지원이 마주한 사람은 바로 해성에서 절대 권력을 소유한 하도하였다. 다행히 하도하의 시선은 성지원에게 몇 초만 머물렀을 뿐 그는 걸음을 옮겨버렸다. 아이의 비명도 더는 들려오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남자들의 비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다들 성지원이 주제도 모르고 오지랖을 부린다며 조롱하고 있었다. 성지원은 조금 후회가 되었다. 자신이 냉철하고 잔인하기만 한 남자에게 모든 희망을 건 것이 무모한 선택은 아니었는지 말이다. 그러나 성지원은 몰랐다. 하우주가 이렇듯 하도하에게 격하게 반항한 이유가 바로 그녀 때문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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