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화
어젯밤 제이원 라운지에서 나온 뒤로 하우주는 집으로 돌아가는 것을 거부했다. 계속 제이원 라운지 입구를 가리키며 안에 있는 성지원을 만나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결국 하도하가 억지로 집으로 데리고 오자 하우주는 심술을 부리며 방 문을 꼭 잠그고 물 한 모금도 먹지 않은 채 방 안에서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성지원은 하도하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어제보다 더 차가워졌다는 것을 느끼게 된 것이다. 하도하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싸늘한 기운은 사람을 얼어붙게 할 만큼 무시무시했다.
그 시각 방으로 들어간 하도하는 누군가 자신의 바지를 잡아당기고 있음을 느꼈다. 고개를 숙이자 그곳에는 하우주의 작은 손이 보였다. 하우주는 그의 바지를 잡아당기며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고 다른 한 손으로는 테라스 밖을 가리켰다. 얼른 자신을 데리고 성지원을 만나러 가자는 의미였다.
하도하는 드디어 조용해진 하우주를 보며 몸을 굽혀 시선을 맞추었다. 조금 전의 싸늘함은 점차 사라졌고 다정함만 남았다.
“내려가고 싶어?”
하우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커다란 눈으로 하도하를 보았다. 하도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팔을 벌려 아이를 안은 후 방 밖으로 나왔다.
성지원은 아래층에 한참 서 있었다. 다행히 하씨 가문은 아주 크고 넓었고 사람들은 대화를 나누느라 정신이 없었기에 조용히 구석에 머물 수 있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성지원은 익숙한 얼굴을 보게 되었다. 그 사람은 바로 강은호였고 그도 올 것이라는 몰랐다.
“지원아, 역시 여기 있었네.”
강은호는 몇 미터 떨어진 곳에서 성지원을 불렀다. 어젯밤 진형문과 협상이 실패했으니 분명 이곳에 올 것으로 생각했지만 정말로 올 줄은 몰랐다.
어딘가 어두워진 강은호의 안색을 보며 성지원은 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강은호는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가자, 지원아. 지금 나가도 늦지 않았어.”
그러나 성지원은 고개를 저었다.
“안 가. 아니, 못 가.”
“지원아, 하도하는 좋은 사람이 아니야. 그 사람은...”
“하지만 내게 남은 방법이라고는 이 방법뿐인걸.”
성지원은 강은호의 말을 잘랐다.
“이 일은 나 혼자 해결할 수 없어. 네가 도와줘도 해결 안 될 거고 네 형도 도와줄 수 없어요. 동생은 갓난아기고 부모님에게 남은 희망이라고는 나뿐이야. 그러니까 하도하 씨 도움이 꼭 필요해.”
강은호는 성지원의 말에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지금 이 순간 무능한 자신이 너무도 미웠다. 만약 자신이 강한 그룹을 이끄는 대표였다면 어쩌면 성지원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는 아니었다. 그저 강씨 가문의 놀기만 하는 둘째 아들일 뿐 가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럼 내가 정우한테 가볼게.”
“은호야, 그러지 마. 나와 계속 친구로 지내고 싶다면 하지 마.”
성지원의 말에 강은호는 결국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성지원을 보았다. 성지원은 단호한 얼굴로 서 있었다. 꼭 하룻밤 사이에 모든 감정을 도려낸 듯 차가웠다. 강은호는 그런 성지원이 너무도 안쓰러웠다.
“지원아, 너도 알잖아. 그 백설희라는 여자는 정우한테 어울리지 않는 여자라는 거. 정우도 잠깐 판단이 흐려졌을 뿐이야. 언젠가 다시 너한테 돌아올 거라고. 네가 정우와 함께 한 6년이라는 시간은 아무도 없애버릴 수 없어.”
강은호는 줄곧 알고 있었다. 성지원의 마음속에 자신이 없다는 것을. 그래도 성지원이 하도하를 찾아가는 것보단 문정우의 곁으로 돌려보내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았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었으니 설령 얻지 못한다고 해도 행복하길 바랐다. 악마 같은 사람에게 절대 보낼 수 없었다.
그러나 성지원은 강은호의 말에도 별다른 고민을 하지 않았다.
“정우가 돌아올지는 모르겠지만 이번에는 더는 기다려주지 않으려고. 기다리고 싶지 않아.”
성준혁이 교통사고를 당했는데도 무시하고 떠나갔을 때부터 성지원의 마음은 차갑게 식어버렸다. 6년 동안 성지원은 문정우를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해주었고 그녀의 부모님도 아들처럼 여기며 아주 잘해주었다. 그런데 문정우는 그들을 버리고 떠나지 않았는가. 사람이 그렇게나 매정하리라고는 전혀 몰랐다. 어쩌면 백설희는 문정우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아닐 수도 있지만 문정우가 선택한 것이니 그녀와 무슨 상관이겠는가.
“파티가 시작되네. 이만 들어가 봐야겠어.”
홀에서는 소리가 울려 퍼지고 성지원은 가방을 챙기며 마지막으로 강은호를 보았다.
“은호야, 날 정말로 친구라고 생각한다면 앞으로 그 사람 앞에서 내 얘기는 하지 말아줘. 내가 행복하게 살고 있든 아니든.”
성지원은 문정우의 동정 따위는 필요 없었고 축복 또한 받고 싶지 않았다. 그저 생판 모르는 남처럼 지내고 싶을 뿐이다.
떠나가는 성지원의 뒷모습을 보며 강은호는 더는 말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악마의 소굴로 들어가는 성지원을 무시할 수 없었다. 결국 짜증스럽게 핸드폰을 꺼내 문정우에게 연락했다. 연결음이 한참 들려서야 상대는 그의 전화를 받았다. 그러나 문정우의 목소리가 아닌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정우 오빠 찾아요? 잠시만요.”
강은호는 목소리의 주인이 백설희라는 것을 당연히 눈치채고 있었던지라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문정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인데?”
문정우와 강은호의 사이는 문정우와 성지원이 헤어지면서 함께 나빠졌다. 서로의 마음이 어떤지 잘 알고 있었지만 굳이 드러내지는 않았다. 문정우의 쌀쌀맞은 목소리를 들으니 강은호는 화가 났지만 꾹 억누르며 말했다.
“지금 어디야. 할 얘기가 있어. 지원 씨에 관한...”
강은호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문정우는 짜증을 내며 말을 잘랐다.
“강은호, 난 이미 걔랑 헤어졌어. 나한테는 백설희뿐이니까 앞으로 더는 내 앞에서 걔 얘기 꺼내지도 마. 네가 걔를 좋아한다는 거 알고 있으니까 걔는 네가 알아서 지켜!”
문정우의 말에 강은호는 더는 화를 참을 수 없었다.
“문정우, 너 그러고도 남자냐? 그래, 손 놓고 있겠다는 거지? 나중에 후회나 하지 마.”
이 말을 끝으로 강은호는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 시각 백설희는 고개를 들어 문정우를 보았다. 창백했던 안색은 문정우의 보살핌 덕분에 다시 혈색이 돌기 시작했고 청순한 분위기를 내고 있었다.
“정우 오빠, 방금 누구 얘기하고 있었던 거야?”
백설희는 억지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그러자 문정우는 핸드폰을 내려놓으며 애정이 흘러넘치는 얼굴로 백설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면서 부드러운 목소리로 설명했다.
“걔는 그냥 내 인생에서 스쳐 지나간 여자일 뿐이야. 신경 쓸 필요 없으니까 얼른 자. 내일 아침 일찍 공항 가야지.”
백설희는 수줍은 미소를 지었다.
“오, 오빠, 나 어두운 거 싫어...”
다시 하씨 가문 본가.
성지원은 커다란 메인 홀로 걸음을 옮겼다. 마침 하도하의 할머니인 이연자가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무대 위로 올라갔고 고귀한 기품이 흘러넘쳐 아주 자애로운 할머니 같아 보였다.
소문에 하도하는 가족이라도 봐주지 않는다고 했지만 유독 이연자에게만은 효도하며 다른 모습을 보였다고 했다. 이연자는 농담을 즐기는 사람이었던지라 무대 위로 올라간 지 몇 분 만에 사람들을 웃게 했다.
곧이어 그들은 여한결, 최예성, 하도하의 이름을 듣게 되었고 여자들은 저마다 얼굴을 붉히며 기쁜 표정을 지었다. 성지원은 그들이 해성에서 권력도 크고 재산도 많아 3대 갑부라고 불리는 가문의 사람들도 초대할 줄은 몰랐다.
이곳에 모인 모두가 알고 있었다. 여한결, 강은호, 최예성, 하도하, 문정우가 해성의 잘생긴 5대 재벌 2세라는 것을. 그들은 집안은 물론이고 능력도 뛰어났다. 그랬기에 해성의 여자들은 어떻게든 그들에게 시집가고 싶어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