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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성지원의 붉어진 눈가를 본 문정우는 시선을 돌렸다. 그는 더는 말을 하지 않았고 긴 속눈썹이 그의 모든 감정을 감춰버렸다. 그녀는 줄곧 이론 그의 모습을 좋아했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림 속에서 나온 듯한 그의 모습이 너무도 아름다워 보였다. 하지만 그녀의 가슴은 이미 차갑게 식어버렸다. 원망 가득한 눈으로 그를 보며 처음 봤던 그의 모습도 떠올렸다. 자신에게 온화하던 사람이 이렇게 차갑게 변할 줄은 몰랐다. 한참 지나서야 그녀는 다시 입을 열 수 있었다. “궁금한 게 있어서 찾아왔어. 결혼은 왜 취소한 거야?” ‘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미안해.” 문정우는 한참 침묵한 뒤 세 글자를 내뱉었다.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세 글자는 소금이 되어 상처로 가득한 그녀의 가슴에 뿌려졌다. 그녀는 너무도 아프고 숨 막혔다. 십여 분 뒤 성지원은 넋이 나간 얼굴로 문씨 가문을 나섰다. 문정우는 그런 그녀의 모습에 결국 마음이 약해져 강은호에게 연락했다. “지원이 잘 부탁해.” 강은호는 차갑게 대답했다. “오늘 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 잘 기억해. 지원 씨를 버린 건 너야. 앞으로 지원 씨 일에 참견하지 마. 너랑 아무 상관도 없으니까.” 돌아가는 길 내내 성지원은 미어지는 가슴에 목놓아 울었다. 너무도 울어 정신을 잃고 쓰러질 것만 같았다. 강은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저 그녀의 곁에 있어 주었다. 바닷가로 온 강은호는 창문을 열었다. 불어오는 바닷바람에 바닷물의 짠 내도 담겨 있었다. 귓가에는 철썩이는 파도 소리가 들려왔다. 오늘따라 바닷바람이 유난히도 차고 시리게 다가왔다. 얼마나 울었을까, 성지원의 눈에서는 더는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그제야 강은호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까 그 여자는 백설희라고 해. 백하민의 친동생이지. 정우와는 소꿉친구 같은 사이야. 7년 전 정우가 교통사고를 당한 후 백설희가 계속 옆에 있어 주면서 삶의 의지를 잃은 정우를 살려주었었어.” 강은호가 말해준 것은 그녀도 알고 있는 것들이었다. “그러다가 나중에 백설희는 정우 삼촌인 문성진에게 잡혀 해외의 어느 한 집에 갇히게 되었고 문성진은 백설희를 인질로 삼아 백하민과 문정우를 협박했어. 그동안 정우가 계속 백설희를 찾고 있었지만 죽은 줄 알았는데 살아 있을 줄은 몰랐네.” 그리고 이것들은 그녀가 모르는 것들이었다. ‘소꿉친구라고... 백설희, 백하민의 동생... 하, 그럼 그동안 문정우가 날 속이고 있었다는 거네!' “정우는 백설희가 죽은 줄 알고 나와 결혼하겠다고 한 거네.” 성지원은 자조적으로 웃었다. 티 없이 맑은 두 눈에서는 다시금 눈물이 흘러내렸다. 너무도 슬피 우는 그녀의 모습을 보니 강은호는 괜스레 가엾게 느껴졌다. “그동안 나만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네. 멍청하게 6년 동안 속고 있다는 것도 모르고 행복하다고 여겼으니.” 방금 문정우를 그녀를 향해 사과했다. 그의 두 눈에는 죄책감이 담겨 있었지만 유독 애정은 없었다. 그제야 그녀는 깨닫게 되었다. 그 6년 동안 문정우는 자신을 사랑한 적이 없었음을. 그녀는 결국 6년 동안 짝사랑만 한 것이다. 그런 것도 모르고 그녀는 오전에 부모님께 당당하게 말했다. 문정우는 절대 자신을 배신하지 않을 거라고. 분명 자신을 행복하게 해줄 거라고 말이다. 하루도 지나지 않아 그녀의 믿음이 전부 깨져버렸다. 그녀는 문정우가 자신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지원아, 미안해. 내가 그동안 널 속였어. 사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줄곧 백설희뿐이었어.” 그녀는 6년 동안 그의 곁에 있어 주며 헌신을 했건마는 돌아온 건 가슴을 미어지게 하는 미안하다는 말뿐이었다. 행복하다고 여겼던 시간과 순간들은 전부 그가 꾸며낸 것들이었다. “은호야, 정우가 사랑하는 사람은 백설희뿐이라고 했어. 결국 처음부터 지금까지 단 한순간도 나한테 마음이 흔들렸던 적 없다는 거지. 덕분에 저는 해성시에서 가장 처량한 여자가 되었네. 그동안 정우는 나한테 연기한 거야. 우리 집안을 이용해서 원하는 것을 손에 넣기 위해 말이야. 그런 것도 모르고 난 간이고 쓸개고 전부 다 내어줄 기세로 도와주고 지켜주었어. 심지어 어떻게든 정우의 여자가 되려고 노력했는데...” 열여덟을 넘긴 해 성지원은 문정우와 함께 밤을 보내기 위해 몰래 문정우의 방에 들어가 침대에 눕기도 했다. 그러나 문정우는 보수적인 모습을 보이며 결혼하기 전까지 그녀의 처음을 지켜주고 싶다고 했다. 설령 그녀의 유혹에 몸이 반응해도 그는 꾹 참으며 손조차 대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에야 알게 되었어. 내 몸에 손을 대지 않은 건 내가 소중해 지켜주고 싶었던 게 아니라 애초에 날 사랑한 적이 없었다는 걸 너무도 늦게 알아버렸네.” 가슴이 너무도 아파 그녀는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씁쓸하게 웃었다. 윤기 돌던 입술은 이미 색을 잃어 창백해졌다. “지원아.” 강은호는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지금 이 순간 꾹꾹 억눌러 숨기기만 했던 감정이 흘러나올 것 같았다. “괜찮아. 너에겐 우리 같은 친구가 있잖아. 너만 원하면 내 어깨 언제든지 빌려줄 수 있어. 그러니까 마음껏 기대.” 성지원은 강은호의 어깨에 기대며 피곤한 듯 눈을 감았다. “고마워, 은호야.” 그녀는 정말이지 너무도 힘들었다. 강은호는 지그시 눈을 감은 그녀를 보았다. 한참 후 쌕쌕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고 나서야 손을 들어 그녀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어주었다. 그간 숨겨왔던 마음이 결국 흘러나오고 말았다. 성지원은 아주 긴 꿈을 꾸게 되었다. 꿈속의 그녀는 문정우와 처음 만났던 때로 돌아갔다. 그녀가 열여섯이던 해 그녀의 부모님은 그녀를 위해 생일 파티를 아주 크게 열었다. 그때 그녀의 생일 파티에 꽤 많은 소년들이 참석했었다. 비록 그녀는 악기든 공부든 뭐든 잘했지만 유독 경영에 재능이 없었다. 성씨 가문은 대대로 가족 기업을 이어오고 있었지만, 성준혁에게는 자식이 성지원 하나뿐이었다. 행여나 딸이 거대한 회사를 감당하지 못할까 봐 걱정된 성준혁은 일찌감치 딸에게 짝을 맺어주어 후계자로 키우고 싶었다. 그래서 딸의 생일 파티에 열여섯부터 스무 살 정도 되는 소년을 많이 초대했었다. 성준혁과 김희영은 2층 테라스에 서서 소년들을 찬찬히 훑어보며 신중하게 골랐다. 한 바퀴 전부 둘러본 김희영은 그때 외모가 출중한 한 소년을 가리켰다. “여보, 저 아이는 어때요? 아무리 둘러봐도 저 아이가 우리 지원이 짝으로 딱인 것 같은데.” 성준혁은 김희영이 가리킨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한참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 “흠, 저 아이는 하씨 가문의 아이군. 하씨 가문은 사정이 복잡해서 우리 지원이가 힘들 거야.” 김희영이 가리킨 소년은 바로 하도하였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큰어머니 옆에 가만히 서 있었던지라 동년배의 아이들과 사뭇 다른 점잖은 분위기를 내뿜고 있었다. 그때의 하도하는 열아홉 살이었다. 그럼에도 키는 아주 컸고 외모도 출중했다. 특히 몸에서 흘러나오는 고귀한 기품은 다른 아이들이 평범하게 보이게 했다. 다만 하씨 가문은 아주 복잡했다. 게다가 하도하는 성격이 차갑고 말도 없어 어릴 때부터 사람들의 반감을 사게 되었다. 성준혁의 말을 들은 김희영은 아쉽다는 듯 시선을 돌려 빠르게 다른 소년을 찾아냈다. “그러면 쟤는 어때요? 문씨 가문의 아이인데 공부도 잘하고 예의도 참 바르게 생겼잖아요.” 성준혁은 미간을 구겼다. “문씨 가문이라고? 어느 아이인데?” 김희영은 친절하게 가리켰다. “목련 나무 아래 서 있는 저 아이 말이에요.” 성준혁도 드디어 목련 나무 아래 서 있는 소년을 발견하게 되었다. 열여덟인 소년은 인상이 온화했고 이목구비로 또렷해 그림을 찢고 나온 것 같았다. “저 아이?” 성준혁은 미간을 확 구겼다. 김희영은 기대하는 얼굴로 성준혁을 보았다. “어때요? 공부를 잘하는 아이일수록 성품이 좋다고 하잖아요. 뭐든 잘하고요.” 그러나 성준혁은 이번에도 고개를 저었다. “안 돼. 문씨 가문은 하씨 가문보다 더 복잡해. 게다가 저 아이는 일 년 전에 교통사고로 다리 한쪽까지 잃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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