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화
문정우도 하도하 못지않게 공부를 잘했고 재능도 많아 문씨 가문에서 사람들의 관심 대상이 되었다. 만약 교통사고로 다리 한쪽을 잃지만 않았어도 문정우의 할아버지인 문민철이 분명 문정우를 후계자로 두었을 것이었고 이 생일 파티에도 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그 교통사고는 문정우의 삼촌인 문성진과 연관이 있었다. 성준혁은 복잡한 집안 사정에 자신의 딸이 휘말리지 않기를 바랐다.
김희영은 아쉬운 듯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여보, 우리 다른 아이들도 둘러봐요.”
그 순간 난간에 턱을 괴고 있던 소녀가 목련 나무 아래 서 있는 소년을 빤히 보았다. 그러더니 눈을 반짝거렸다.
‘걔가 왔어!'
성지원은 2년 전 자신의 마음을 설레게 한 소년이 자신의 생일 파티에 나타날 줄은 몰랐다. 목련 나무 아래 서 있는 소년을 보니 그녀의 마음이 다시금 두근두근 설레기 시작했다.
‘누군가에게 반한다는 게 이런 느낌이구나!'
이런 느낌은 낯설지 않았다. 고등학교 1학년이 된 첫날, 오후에 그는 하얀색 운동복을 입고 자신을 향해 달려오던 문정우를 처음 보았다. 그때의 그녀는 문정우가 꼭 평생 자신의 곁에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 후로 그녀는 매일 농구장으로 달려가 그를 보았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문정우는 교통사고로 다리 한쪽을 잃게 되었고 더는 농구하는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수능 전까지 그는 매일 휠체어를 타고 등교했다.
나중에 그는 해성대학교에 입학하게 되었고 그녀는 여전히 고등학교에 다녔다. 하지만 그의 소식은 하나도 빠짐없이 전해 듣고 있었다.
손님이 모두 도착하자 성준혁과 김희영은 성지원을 데리고 손님들이 있는 홀로 내려갔다.
사실 성지원도 해성시에서 아주 유명했다. 성지원이 태어난 그 날, 병원 근처의 꽃들이 전부 활짝 피었고 먹구름만 가득했던 하늘은 금방 환하게 개었다고 했다. 그때 해성에서 용하기로 소문난 최무영도 성지원과 같은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그는 병문안을 온 친구들을 보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성씨 가문에서 태어난 아이가 성씨 가문을 바꿔놓겠군.”
당시만 해도 성씨 가문에서는 이름도 제대로 알려지지 않는 회사를 운영하고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성지원이 자랄수록 회사의 규모는 점점 더 커졌고 최무영의 말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해냈다.
성지원이 태어난 지 몇 년도 지나지 않아 제이원 그룹은 이름도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회사로부터 해성시에서 이름만 들어도 누구나 아는 대기업으로 성장하면서 승승장구했다.
생일 파티를 크게 연 것도 각 가문에서 온 소년들을 살펴보며 후계자로 키울 생각이었다. 물론 선택된 아이는 데릴사위로 들일 생각이었다. 그래야만 후계자로 키울 수 있으니까.
김희영은 성지원 앞에서 소년들의 이름을 알려주었지만 성지원은 귀에 들리지 않았다. 그 속에는 문정우의 이름이 없었으니 말이다. 결국 김희영은 그녀를 데리고 한 바퀴 빙 돈 후 친구들에게 보내주었다. 성지원은 늘 성격이 시원해 친구가 많았고 남자아이들도 어떻게든 그녀와 친해지려고 했다. 집안도 빵빵하고 얼굴도 예뻤으니 성씨 가문의 데릴사위로 들어가려는 아이들도 꽤 있었다.
“너도 얼른 가봐!”
손연수는 옆에서 무뚝뚝하게 서 있는 소년을 보며 다급하게 말했다.
“도하야, 성씨 가문의 딸에서 선택되면 네 아빠도 감방에서 일찍 풀려날 수 있어.”
무뚝뚝하기만 한 소년의 얼굴에는 드디어 미세한 변화가 생겼다. 손연수는 그 변화를 눈치채고 이어서 말했다.
“오늘 여기 온 아이들 중에서 네가 제일 훌륭해. 성씨 가문 딸도 분명 널 선택할 거야. 네 아빠를 위해서라도 얼른 가서 말이라도 걸어!”
하도하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공주 취급을 받는 소녀를 보았다. 입꼬리를 올려 피식 웃던 그는 긴 다리를 뻗어 소녀를 향해 다가갔다. 드디어 움직이는 소년을 보며 손연수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하도하의 아버지가 감방에 들어간 후 하씨 가문은 휘청거리기 시작했고 날이 갈수록 망해가고 있었다. 그런데 하도하가 성지원의 마음에 들게 된다면 하씨 가문은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안녕, 내 이름은 하도하야. 해성대 다니고 있어...”
그는 겨우 소년들의 틈을 비집고 들어가 성지원에게 말을 걸었다. 그러나 성지원의 안중에는 오로지 문정우뿐이었고 그를 상대할 시간조차 없었다. 목련 나무 아래 서 있던 문정우가 떠나려고 하자 다급해진 성지원은 하도하의 말을 잘랐다.
“미안한데 길 막지 말아 줄래요?”
열여섯 살이던 성지원은 도도하기 그지없었다. 심지어 하도하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그대로 지나쳐 가버렸다.
하도하는 그런 성지원을 몇 초간 빤히 보다가 시선을 거두었다. 주위에서는 하씨 가문이 망해가고 있다며 대놓고 비웃고 있었다. 그럼에도 하도하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오히려 무신경한 얼굴로 고개를 돌려 떠나가는 성지원을 힐끗 보다가 다시 앞을 보았다. 그는 화나지도 슬프지도 않았다. 그저 아무런 감정도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막 자리를 옮기려던 때 인파 속에서 날카로운 말들이 튀어나왔다.
“쟤가 하도하야? 그 섹시 스타 안화연 아들?”
“맞아. 안화연도 참 가만히 좀 있지. 쯧쯧, 결혼하고 나서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남자한테 꼬리 쳤잖아. 결국 남편한테 들켜서 홧김에 남편이 안화연 내연남 죽이고 감방 간 거잖아.”
“어머, 그랬어? 어쩐지 갑자기 사람을 죽였다고 하니까 너무 뜬금없더라고. 그런데 나였으면 내연남이 아니라 안화연부터 죽였을 거야.”
‘섹시 스타', ‘내연남', ‘꼬리친 여자'라는 단어들이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그의 심장을 푹푹 찌르고 있었다. 무뚝뚝하기만 했던 소년의 얼굴에 드디어 다른 표정이 지어졌다.
사람들이 수군대는 소리를 들은 성지원은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고 미간을 찌푸린 채 소년을 보았다. 하도하는 어느새 주먹을 꽉 움켜쥐고 있었다. 분노로 잔뜩 붉어진 얼굴을 보니 살기가 느껴졌고 지옥에서 목숨을 앗으려고 온 악마 같았다. 그녀는 하도하가 분명 속으로 어머니를 원망하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도하가 떠날 때 성지원의 옆을 스쳐 지나가면서 그녀를 흘끗 보았다. 그의 시선이 닿자 성지원은 온몸이 굳어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고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가 시야에서 완벽히 사라진 후에야 성지원은 공포에서 나올 수 있게 되었다.
‘쟤는 분명 악마일 거야!'
물론 이 일은 스쳐 지나간 해프닝일 뿐이었다. 마치 돌멩이 하나가 호수에 떨어졌다가 아무 일도 없듯이 잠잠해지는 것처럼. 하도하를 신경 써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왜냐하면 하도하가 떠난 후 사람들의 시선은 다시 성지원에게 쏠렸으니까. 애초에 이 파티는 성지원을 위한 파티였고 그들의 목적 또한 성지원이었다.
성지원은 도도하게 하도하를 거절한 뒤 목련 나무 아래 홀로 서 있는 하얀 옷차림의 소년에게로 다가갔다. 모든 사람이 알고 있었다. 성지원이 소년을 선택하기 위해 다가가고 있음을. 하지만 성지원이 다리 한쪽을 잃은 문정우를 선택할 줄은 몰랐다.
그녀는 용기를 내어 소년에게로 다가갔다. 살면서 이렇듯 용기를 내본 것은 처음이었고 부모님의 뜻을 어긴 것도 처음이었다.
“난 쟤랑 결혼할래요.”
문정우는 사람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게 되었다. 그 시선에는 질투와 원망이 가득 담겨 있었지만 소년은 확고하게 그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그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왜 나야?”
“좋아하니까!”
성지원은 일부러 밝게 웃으며 말했다. 그녀는 웃을 때 눈이 예쁘게 접혔고 꼭 인형 같았다. 그녀의 두 눈은 밤하늘의 별처럼 빛났고 용기도 가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