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더 이상 그 자리에 머물고 싶은 마음이 사라져 버린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 쪽으로 걸어 나갔다.
갑작스러운 나의 움직임에 다른 사람들은 잠시 놀랐으나 곧 정신을 차리고 김시안에게 속삭이듯 알렸다.
“시안 형, 형수님 아직 안 가셨어요.”
김시안은 눈살을 찌푸리며 무의식적으로 입을 열었다.
“있으면 있는 거지, 어차피...”
그 역시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듯 임설아의 눈을 가리고 있던 손을 슬그머니 놓았다. 그러고는 변명처럼 설명했다.
“설아는 아직 어리고 이런 것에 익숙하지 않아. 너하고는 달라.”
나는 웃어 보였지만 눈가에는 비치는 쓸쓸함은 어쩔 수 없었다.
김시안은 잊고 있었다.
임설아가 나보다 한 살 더 많다는 것을.
하지만 김시안의 마음속에 나는 없었으니, 나의 감정 따위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들을 비켜서서 방을 나서려는데 임설아가 갑자기 나를 붙잡았다.
임설아는 나지막이 수줍은 듯 입을 열었다.
“언니 화내지 마세요. 저, 실은 오빠한테 물건을 돌려주러 온 거예요.”
임설아는 말하면서 반지 케이스를 열어젖혔고 그 안의 커다란 다이아몬드가 드러났다.
“지난번에 언니 손의 반지를 보고 부럽다고 저도 하나 갖고 싶다고 제가 그냥 흘려 말했거든요.”
“그런데 글쎄...”
임설아는 부끄러운 듯 김시안을 힐끗 올려다보았는데 그녀의 목소리는 마치 갈고리를 단 듯 위로 끌어올려졌다.
“시안 오빠가 그걸 마음에 새겨두셨지 뭐예요. 저 달래주려고 이렇게 값비싼 다이아몬드 반지를 선물해 주실 줄은 몰랐어요. 세상에 평생 단 하나만 주문 제작할 수 있는 반지라던데 제가 너무 미안해서요. 그래서 이렇게 언니한테 돌려드리러 온 거예요.”
돌려준다고 말은 하면서도 임설아가 그 케이스를 꽉 쥐고 있는 손은 단 한 순간도 풀리지 않았다.
나는 고개를 숙여 내 손가락에 끼워진 단출한 은반지를 내려다보며 문득 나 자신이 너무 우스워졌다.
2년간의 감정과 730일의 나날을 곁에 있었다.
김시안은 4만 원도 채 안 되는 은반지 하나로 나를 얼렁뚱땅 해치웠다.
침대 위에서든 아래에서든 나는 너무나 값싼 존재였던 셈이다.
나는 두 발짝 물러섰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김시안의 체면을 봐주지 않고 그대로 문을 열고 나섰다.
정적이 감돌던 방 안은 이내 와글와글 소란스러워졌다.
누군가 콧방귀를 뀌며 큰 소리로 말했다.
“뭐 저런 게 다 있어. 감히 시안 형한테 얼굴을 찡그려?”
“닥쳐!”
김시안이 그를 노려보자, 그의 얼굴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클럽을 벗어났을 때는 이미 새벽 3시였고 길 위에는 사람 그림자도 없었다.
가끔 성가신 찬바람만이 불어와 나를 자꾸만 기억 속으로 밀어 넣었다.
2년 전의 어느 아르바이트 자리에서 나는 김시안을 만났다.
김시안은 나처럼 순수한 사람은 본 적이 없다며 헤어지지 않을 연애를 하고 싶다고 했다.
나는 김시안의 말이 우스워 몇 번이고 거절했다.
그러다 그해 설날 밤에 의붓아버지가 몰래 내 방문을 따고 들어왔고 나는 두려움 속에서 김시안에게 전화를 걸었다.
눈발이 흩날리던 그 밤 김시안은 나를 지옥에서 데리고 나왔고 나에게 가정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나는 집이 간절했다.
2년 동안 함께하며 김시안은 나를 수없이 유혹했고 수없이 결혼을 약속했다.
하지만 약혼한 지 반년이 지난 지금에야 나는 깨달았다.
손가락에 끼워진 이 더할 나위 없이 단출한 은반지 외에 나는 김시안의 가족조차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다는 것을.
거짓 같은 약혼, 거짓 같은 사랑, 거짓 같은... 나...
눈물이 시야를 가렸고 나는 약혼반지를 빼서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김시안, 나 당신에게 시집가지 않겠어.’
비밀 프로젝트에 합류하기까지 이틀이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