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화
저녁이 되자 김시안은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기어코 나를 끌고 회사의 파티에 가야 한다고 했다.
우리가 함께한 2년 동안 김시안이 나를 사람들 앞에 공식적인 자리로 데리고 나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파티는 순조롭게 흘러갔고 김시안의 기분도 꽤 좋아 보였다.
꼭 흰 토끼 같던 임설아가 불쑥 나타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임설아는 한 부유한 사업가가 들고 있던 와인잔을 치고 말았다.
붉은 와인은 그 사업가의 전신에 쏟아졌고, 그의 얼굴은 당장이라도 물을 뚝뚝 흘릴 듯 어둡게 변했다.
“당신 뭐야? 앞도 제대로 안 보고 다니나!”
임설아는 곧바로 눈을 붉히더니 억울한 표정으로 김시안을 올려다보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김시안은 미간을 찌푸리고 임설아를 등 뒤로 감추며 딱딱한 말투로 말했다.
“어린 아가씨가 아직 어려서 실수했습니다. 천 회장님, 그냥 넘어가 주시죠.”
그 건조한 말은 사업가의 안색을 더욱 어둡게 만들었고, 그는 김시안 뒤에 숨은 임설아를 가리키며 차갑게 비웃었다.
“좋아. 그럼, 저 아가씨가 나에게 와서 술이라도 한잔 올리며 사과하면 내가 더 이상 문제 삼지 않지.”
임설아는 구원이라도 청하듯 김시안의 옷자락을 잡아당겼을 뿐 여전히 입을 열지 않았다.
김시안은 임설아의 손을 달래듯 두드리고는 불쑥 시선을 나에게로 돌렸다.
“세린아, 네가 설아 대신 천 회장님께 술을 올려드려.”
나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즉시 거절했다.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김시안은 내가 상황 파악을 못 한다는 듯 얼굴을 찌푸렸다.
“설아는 아직 어려서 이런 일 겪어본 적 없어.”
“넌 다르잖아, 넌 이미 익숙해졌으니까.”
주변은 순식간에 조용해졌고 손님들은 서로를 쳐다보았고 그들의 눈빛에는 재미있는 구경거리를 발견했다는 빛이 반짝였다.
이윽고 누군가 참지 못하고 김시안을 향해 눈짓 하며 말을 걸었다.
“세상에, 젊은 나이에 이렇게 경험이 많으신 줄 몰랐네요. 김 대표님, 복도 많으십니다.”
“맞아요, 맞아요. 역시 김 대표님이 잘 가르치시네요. 옆의 여자분도 참 유능하시네.”
“저희도 김 대표님께 좀 배워야겠어요.”
그들의 악의 가득한 말에 내 얼굴은 하얗게 질렸다가 다시 핏기가 돌았다.
김시안의 눈빛이 날카로워지며 막 입을 열려는 찰나 임설아가 놀란 것처럼 기절하듯 쓰러졌다.
김시안은 순간 혼비백산하여 임설아를 안고 밖으로 황급히 나갔다.
나 혼자만이 점차 노골적으로 변해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마주하며 그 자리에 남겨졌다.
결국, 그 사업가가 나서서 나를 보호하며 그곳을 빠져나올 수 있게 도와주었다.
작별 인사를 할 때 그는 자신의 재킷을 나에게 건네며 말했다.
“아가씨, 당신은 아직 젊어요.”
그 한마디가 내가 억지로 꾸며낸 모든 자존심을 부숴버렸다.
집으로 돌아와 나는 옷장 앞에 한참 동안 서 있었다.
안에는 많은 물건들이 있었는데 거의 전부가 김시안이 나에게 선물한 것들이었다.
나는 그것들을 하나하나 꺼내 침대 위에 늘어놓았다.
빨간 레이스 치마는 연애 백일 기념 선물이었고 검은색 망사 스타킹은 연애 일 년 기념일 선물이었으며 누드톤 하이힐은 스무 살 생일 선물이었다.
모든 선물은 김시안이 나에게 맞추어 준비한 것들이었다.
이 모든 물건이 나를 김시안의 욕망을 채워주는 도구로 만들었다.
그런데 나는 이제야 깨달았다.
이것은 사랑이 아니었다.
휴대전화 화면이 갑자기 밝아졌고 김시안의 메시지였다.
[설아는 괜찮아졌어. 금방 데리러 갈게.]
[새 반지 사놨어. 돌아가면 바로 줄게.]
[오늘 밤 일은... 미안해.]
갑자기 전화가 걸려 왔고 유 교수님이었다.
“주세린, 계획이 바뀌었다. 우리 하루 일찍 출발해야 해야 할 것 같구나.”
“자네를 태우러 갈 차가 이미 아래층에 도착했으니 서둘러 짐 챙기도록 해.”
“네.”
나는 눈물을 닦고 짐 가방을 끌고 나를 옭아매었던 이곳을 떠났다.
비행기에 오르기 전 나는 김시안에게 마지막 메시지를 보냈다.
[김시안, 더 이상 너를 사랑하지 않아.]
그 순간 오랫동안 잠잠하던 메시지 창이 미친 듯이 진동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