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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유현준이 엄하설을 안고 떠나려던 찰나, 발밑에서 무언가 밟혔다. 빈 병이었다. 심이연이 복용하던 우울증 약통이었다. 엄하설의 안색이 굳어지며 황급히 가리려 했으나 유현준이 한발 앞서 그것을 집어 들었다. “우울증? 이게 네 새로운 수법이야?” 심이연은 눈시울이 따가울 정도로 아파왔다. 진실이 눈앞에 놓여 있어도 그는 믿지 않을 사람이었다. 남자가 비꼬듯 말했다. “심이연, 난 널 공주처럼 모셨어. 궂은일 한번 안 시키고 외출할 때 무거운 거 하나 안 들게 할 만큼 지극정성이었다고. 내가 너한테 못 해준 게 뭐야? 그런데 우울증이라니, 기가 막혀서. 적당히 좀 해. 가식 떨지 말고.” 유현준의 경멸 섞인 말들이 심이연의 가슴에 비수처럼 꽂혔다. 치명상은 아니었으나 죽을 만큼 고통스러웠다. 남자는 팔을 휘둘러 약병을 멀리 던져버렸다. “이런 수작은 이제 그만해. 식상하니까.” 그가 엄하설을 이끌고 떠나려던 찰나, 심이연은 어디서 그런 기운이 났는지 벌떡 일어나 엄하설을 붙잡았다. “이 여자 못 보내! 방금 자기 입으로 우리 아빠 사건 자기가 꾸민 거라고 자백했어. 여기 CCTV 있으니까 조사하면 돼. 유현준, 당신이 나에 대해 뭐라고 하든 이제 상관없어. 하지만 우리 아빠 일만큼은 반드시 결판을 내야겠어!” 엄하설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심이연을 자극하는 데만 정신이 팔려 이곳에 CCTV가 있다는 사실을 깜빡한 것이다. 그녀가 초조함에 안절부절못하고 있을 때, 유현준이 단칼에 거절했다. “허, 조사할 필요 없어. 네 말 따위, 난 안 믿으니까.” 그 말을 듣는 순간 심이연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결혼식장에서 평생 서로 의심하지 말자고 맹세했던 남자였다. 그런데 불과 몇 년 만에 마음이 이토록 철저히 변할 수 있다니. 그가 고개를 숙여 그녀를 한 번이라도 봐주었더라면 피가 흐르는 그녀의 팔을 볼 수 있었을 것이고 믿음을 가지고 CCTV 한 번만 확인했더라면 과거의 진실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결과는 참혹했다. 유현준은 그녀를 위해 단 한 점의 신경도 쓰고 싶어 하지 않았다. 서울에서 유현준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고 그를 막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심이연은 집으로 끌려가 감금되었고 유현준은 그녀의 ‘미친 병'을 제대로 고쳐놓겠다고 말했다. 결국 어둠을 가장 두려워하던 심이연은 암흑뿐인 지하실에 내던져졌고 유현준은 잘못을 빌지 않으면 밥도 주지 말라고 명령했다. 연일 경호원들이 찾아와 잘못을 아느냐고 물었다. 첫째 날, 심이연은 구석에 웅크린 채 자신을 꽉 끌어안고 침묵을 지켰다. 둘째 날, 잘못을 빌게 하려고 지하실에 수많은 쥐를 풀었고 심이연은 겁에 질려 울었지만 끝내 굴복하지 않았다. 셋째 날, 핏자국이 굳어갔고 심이연의 희망도 완전히 사라졌다. 그녀는 끝없는 어둠을 바라보며 절망 속에 중얼거렸다. “난 잘못 없어. 죽일 거면 당장 죽여보든가.” 이제 심이연은 오로지 죽음만을 바라고 있었다. 마침내 지하실에 갇힌 지 7일째 되는 날, 그녀는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생기가 완전히 사라진 그녀의 모습을 본 유현준은 순간 당황하며 경호원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 “이 여자 죽기라도 하면 니들 전부 다 지옥으로 보내버릴 거야!” 소란스러운 소리 속에 심이연의 눈이 아주 살짝 떠졌다. 그녀는 이해할 수 없었다.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차라리 죽는 게 더 낫지 않아? 유현준, 내가 이 지경이 된 건 다 당신 덕분인데 이제 와서 무슨 착한 척이야.’ 심이연이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이미 병원이었다. 유현준은 예전처럼 그녀의 곁을 세심하게 지켰고 마치 그들이 다시 예전으로 돌아간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심이연은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은 절대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한 번 금이 간 것은 아무리 꿰매고 고쳐도 흉터가 남는 법이다. 유현준은 3일 동안 심이연을 지켰고 그녀가 깨어난 것을 보고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연아, 이번엔 내 잘못이야. 네 몸이 이렇게까지 약해진 줄 몰랐어, 난...” 그런 말 따위 듣고 싶지 않았던 심이연은 곧바로 화제를 돌렸다. “일주일 뒤면 우리 아빠 2심 항소 날이야. 그 사건, 당신이 계속 맡아줄 거야?” 유현준은 목구멍까지 차올랐던 걱정 어린 말들을 도로 삼켰다. 왠지 모르게 심이연이 변한 것 같다는 이질감이 들었다. 예전의 심이연은 그를 증오하면서도 눈동자 깊은 곳에 가느다란 애정을 숨기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눈엔 그 실낱같던 애정마저 사라진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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