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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심태우는 곁에 서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감정이 완전히 쏟아져 나오기를 기다린 뒤에야 그는 입을 열었다. “이연아, 아빠는 널 탓하지 않는다. 이게 다 운명인 게지. 더 이상 네 자신을 해치지 마라. 아빠 마음이 찢어지는구나.” 심태우는 두 눈에 눈물을 가득 머금은 채 심이연의 손목에 남은 상처를 보며 눈시울을 붉혔다. 심이연은 목이 메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입버릇처럼 사랑한다 말하던 남자가 보지 못한 상처를 3년 만에 만난 아빠는 단번에 알아본 것이다. 사랑하는 마음이 있고 없고가 이토록 선명할 줄이야. 심태우는 천천히 몸을 굽혀 그녀를 안아주었다. “우리 심씨 가문의 딸은 결단력이 있어야지. 불행하다면 미련 없이 떠나렴. 나 때문에 네 발걸음이 무거워지는 건 아빠도 원치 않는다.” 심이연은 울면서 약속했다. “알았어요. 그 사람 떠나서 잘 살게요.” 이혼 숙려 기간이 끝나기까지 이제 딱 사흘이 남았다. 이혼 증명서만 받으면 그와는 이제 남남이었다. 하지만 심이연은 꿈에도 몰랐다. 그녀가 자리를 뜨자마자 심태우가 스스로 목숨을 끊으리라고는. 그는 떠나기 전 사람을 통해 유언을 남겼다. [이연아, 아빠는 안다. 내 누명을 벗기려고 네가 얼마나 애쓰고 고생했는지. 아빠는 널 사랑한다. 네게 짐이 되고 싶지 않구나. 부디 앞으론 작은 새처럼 자유롭게 날아오르길 바란다.] 심이연은 바닥에 주저앉아 실성한 듯 통곡하다 기절할 지경에 이르렀다. 눈물이 다 마르고 나서야 그녀는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심태우의 장례를 치렀다. 지친 몸을 이끌고 집에 돌아온 그녀를 맞이한 건 거실을 가득 채운 엄하설의 쇼핑백들이었다. 유현준은 망가진 심이연을 보며 죄책감이 스친 얼굴로 말했다. “이연아 미안해. 하설이가 갑자기 우울증 발작을 일으켜서 쇼핑이라도 같이 해줘야 했어. 아버님 일은 내가 다시 방법을 찾아볼게.” 심이연은 그저 조용히 그를 바라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몇 번을 반복해도 결과는 같을 테니까. 그리고 이제 그녀에겐 그의 도움 따위 필요 없었다. 심이연이 반응이 없자 유현준은 준비한 장미꽃을 내밀었다. “이연아, 네가 제일 좋아하는 꽃 사 왔어. 기분 풀어, 너무 슬퍼하지 말고.” 화려한 장미는 아름다웠지만 유현준은 잊고 있었다. 그녀가 좋아하는 건 장미가 아니라 사계장미라는 것을. 장미를 좋아하는 건 엄하설이었다. ‘유현준, 당신이란 사람을 이제 정말 모르겠어.’ 하지만 이젠 상관없었다. 어차피 내일이면 떠날 수 있으니까. 이 추잡한 인간들도, 신물 나는 기억들도 이제 전부 안녕이다. 심이연은 꽃을 받아 들며 유현준에게 예의상 한마디를 건넸다. “고마워.” 위층으로 올라가는 심이연의 가냘픈 뒷모습을 보며 유현준은 못내 마음이 놓이지 않는 듯 덧붙였다. “이연아, 며칠 뒤에 하설이가 좀 나아지면 같이 아버님 면회 가자.” 심이연은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됐어. 아빠가 조용히 있고 싶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아빠였다. 아빠가 원하던 그 평온함을 그녀는 지켜주고 싶었다. 아빠의 유일한 유언은 그녀가 잘사는 것이었기에, 그녀는 이제 스스로를 구하기로 했다. 그리고 그 구원의 전제 조건은 바로 유현준을 떠나는 것이었다. ‘유현준, 사실 난 당신에게 선택의 기회를 줬어. 날 밀어낸 건 당신 자신이야.’ 방으로 들어온 심이연이 짐을 챙기기 시작했을 때, 엄하설로부터 또다시 도발적인 메시지가 도착했다. 유현준과 엄하설의 대화가 담긴 녹음 파일이었다. “현준아, 오늘이 이연이네 아빠 재판 날인데 정말 안 갈 거야?” 남자의 목소리에는 피곤함이 묻어났다. “이미 끝난 사건이야. 다시 들춰서 득 될 게 뭐가 있다고. 안 그래도 어떻게 빠져나갈까 궁리 중이었는데 네 덕분에 잘됐네. 이연이가 이혼하겠다고 하도 극성이니 대충 받아주는 척이라도 해야 조용해지지 않겠어? 전에는 애교로 봐줬지만 요새는 저러는 거 보면 정말 진저리가 나.” 녹음된 말을 들으며 심이연의 옷깃은 눈물로 흠뻑 젖어 들었다. 이것이 그의 진짜 속마음이었던 것이다. 그날 밤, 유현준은 엄하설이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또다시 그녀의 곁을 지키러 떠났다. 심이연은 이혼 서류와 함께 엄하설이 자백했던 증거들을 화장대 위에 나란히 올려놓았다. 이 증거들은 심태우가 세상을 떠난 뒤, 그날 호텔에서 근무했던 미화원이 몰래 전해준 것이었다. 번거로운 일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던 그녀였지만, 수년간 이어진 불안과 죄책감이 결국 양심을 깨웠던 것이다. 망설임 끝에 그녀는 심이연에게 직접 연락해 증거를 건넸다. 하지만 슬프게도 모든 것이 너무 늦어버렸다. 죽은 이는 되살아날 수 없고 아버지는 끝내 누명을 벗고 당당히 감옥을 나서지 못했다. 심이연은 여행 가방을 챙겨 들고 별장을 나서며 이곳에 남겨진 자신의 흔적을 남김없이 지워버렸다. 대문 앞에 선 그녀는 도끼를 들어 두 사람이 함께 심었던 어린나무를 단번에 베어 넘겼다. “유현준, 이번에는 내가 널 자유롭게 해줄게. 다시는 널 귀찮게 하지 않을 거야. 너와 나의 부부로서의 인연은 여기서 끝이야. 다시 만날 땐, 넌 그저 내 아버지를 죽인 원수일 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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