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유한나는 그 문자를 보고도 얼굴에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그녀는 답장도 하지 않았고 특별한 감정의 동요조차 없이 핸드폰으로 강주혁이 보낸 주소를 입력하고 콘돔 한 박스를 주문해 퀵으로 보냈다.
유한나도 강주혁이 일부러 도발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이제는 싸우는 것조차 지쳐 다시 들고일어날 힘도 의지도 없었다.
다음 날 아침 유한나는 졸린 눈을 비비는 민지의 머리를 정성스레 땋아주고 있었다.
그때 침실 문이 열리며 강주혁이 들어왔다.
“아빠!”
민지는 눈을 반짝이며 작은 팔을 벌려 달려갔고 강주혁은 자연스럽게 몸을 굽혀 딸을 한 번 들어 올려 무게를 가늠하듯 흔들며 웃었다.
“우리 민지, 하룻밤 안 봤다고 벌써 아빠 보고 싶었어?”
강주혁이 턱으로 민지의 볼을 비비자 민지는 깔깔 웃음을 터뜨렸다.
유한나는 화장대 앞에 서서 빗을 든 채 그 장면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두 사람 사이가 얼마나 엉망이든 민지 앞에서만큼은 강주혁은 흠잡을 데 없는 좋은 아버지였다.
좋은 남편은 아니었지만 딸의 순수한 세계를 지켜야 한다는 점에서는 그녀와 뜻이 맞았다.
적어도 강주혁의 수많은 여자 문제는 단 한 번도 민지에게 닿지 않았다.
딸과 몇 마디 더 놀아준 뒤 강주혁이 고개를 들어 유한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어젯밤의 모욕적인 문자가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아주 평범한 목소리였다.
“오늘 민지 예방접종 있는 날이지?”
“네. 아홉 시 예약이에요.”
유한나는 시선을 내린 채 민지의 다른 쪽 머리도 차분히 땋아주며 답했다.
“좋아. 내가 데려다줄게.”
병원으로 가는 차 안에서 민지는 이른 기상 탓에 곧 어린이 카시트에서 잠들었다.
강주혁은 운전대를 두드리다 문득 낮게 웃었다.
그리고 옆자리를 힐끗 보며 탐색하듯 장난스러운 눈빛으로 말했다.
“어젯밤에는 기자들이 들이닥치거나 경찰이 단속 나올 줄 알았어. 그런데 퀵이 오더라? 한나야, 이건 좀 너답지 않던데?”
유한나는 창밖으로 빠르게 스쳐 가는 거리 풍경을 보며 담담하게 답했다.
“당신이 원하던 게 점잖고 사고 안 치는 강씨 가문의 안주인이었잖아요.”
강주혁은 순간 말문이 막힌 듯했지만 곧 아무렇지 않게 덧붙였다.
“걱정하지 마. 어쨌든 내 아내는 너밖에 없어. 그 여자들은 그냥 한시의 즐거움일 뿐이야.”
강주혁의 말은 가느다란 바늘처럼 심장을 살짝 찔렀다.
치명적이지는 않았지만 은근한 통증이 남았다.
유한나는 입꼬리를 아주 조금 올릴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랑 결혼할 때는 평생 나뿐이라고 했으면서 즐거움을 나누는 여자는 하루하루 늘어나네.’
차가 동네 병원 앞에 멈춰 섰다.
유한나는 가방에서 서류 한 묶음을 꺼내 강주혁에게 건넸다.
“사인해 줘요. 민지 내년에 유치원 들어가려면 확인받아야 하는 서류들이에요.”
두툼한 서류 속에는 이혼 합의서도 끼어 있었다.
강주혁은 자세히 보지도 않은 채 재킷 안주머니에서 만년필을 꺼내 페이지마다 사인했다.
“이런 건 네가 알아서 하면 되지.”
서류를 돌려주고 차에서 내린 그는 반대편으로 돌아가 잠든 민지를 안아 들려 했다.
그때 병원 입구 쪽에서 소란이 일었다.
안색이 창백한 한 여자가 수납 창구 직원에게 거칠게 밀려나고 있었다.
“돈 없으면 비켜요! 뒤에 사람들 줄 서 있잖아요!”
여자는 비틀거리며 넘어질 뻔했다.
강주혁이 무심하게 한 번 흘겨봤고 유한나의 시선도 그쪽으로 향했다.
유한나는 단번에 그 여자가 과거에 강주혁이 자신 때문에 정리했던 여자들 중 하나라는 것을 알아봤다.
유한나가 담담히 말했다.
“가서 도와주지 그래요? 그래도 예전에 알던 사람일 텐데.”
강주혁은 웃으며 민지를 안아 들었다.
“나랑 무슨 상관이야. 오늘은 내 딸이 제일 중요한 날이야.”
예방접종이 끝나고 유한나가 고개를 들었을 때 강주혁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
그때 핸드폰이 진동하며 강주혁의 문자가 도착했다.
[급한 일이 생겨서 먼저 갈게. 민지는 네가 데리고 들어가. 며칠 뒤 민지 생일에는 꼭 제대로 시간 낼게.]
유한나는 아무 표정 없이 핸드폰을 집어넣었다.
그녀에게 강주혁이 어디로 갔는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유한나는 민지를 데리고 아이가 좋아하는 식당으로 갔다.
예상대로 병원 입구에서 찍힌 선명한 사진과 함께 강호 그룹 황태자가 병원 앞에서 미녀를 구출했다는 실시간 검색어가 떠 있었다.
유한나는 아이스크림을 한 숟갈씩 떠먹는 민지를 바라보다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민지야, 만약에 앞으로 엄마랑 아빠가 같이 살지 않게 되면 엄마랑 같이 살고 싶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