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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서아진은 대답하지 않고 하던 일을 계속했다. 그때 벨 소리가 울렸다. 신지환이 문을 열어보니 배달기사가 커다란 장미꽃다발과 정교한 선물함을 들고 서 있었다. “서아진 씨 계세요? 예약한 꽃다발과 선물입니다. 수령은 이쪽입니다.” 배달 기사가 이렇게 말했다. 신지환은 장미꽃다발과 선물을 보고 뭔가가 떠올랐다. “오늘이...” 신지환이 멈칫하더니 말했다. “우리 몇 번째 기념일이지?” 서아진은 그런 신지환이 참 우스웠다. 함께한 지 몇 년째가 되는 지마저 잊어버린 것이다. “아진아.” 신지환이 미안한 기색을 드러냈다. “미안해. 요즘 너무 바빠서 이렇게 중요한 날까지 잊어버렸네. 이 꽃다발과 선물은 네가 미리 준비한 거지? 매년 너만 챙기는 것 같은데...” 신지환이 서아진을 안아주려는데 후자가 피했다. “오늘 너와 함께 있으려고 시간 비워뒀어.” 신지환이 말했다. “가고 싶은 데 없어? 어디든 함께 가자.” 서아진은 그런 신지환을 보며 시스템 공지를 떠올렸다. 공지대로라면 한 주 후 화재가 일어난다. 그렇다는 건 지금으로부터 4일 후면 이 세상을 떠난다는 말이다. “그래.” 서아진이 말했다. “같이 갈 데가 여러 군데 있어.” 서아진은 신지환을 데리고 전에 데이트했던 곳으로 향했다. 맨 처음 향한 곳은 두 사람이 첫 데이트를 즐긴 오래된 레스토랑이었다. 서아진은 안으로 들어가 그때 두 사람이 앉았던 창가 자리로 향했다. 그러더니 가방에서 작은 칼 하나를 꺼내 테이블 한쪽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새긴 이니셜을 긁어버렸다. “아진아. 뭐 하는 거야?” 신지환이 깜짝 놀라며 서아진의 팔목을 잡았지만 후자가 밀쳐내며 덤덤하게 말했다. “낡아서 예쁘지 않아.” 두 번째 장소는 두 사람이 대학교에 입학하고 캠퍼스에 심은 작은 오동나무였는데 이제는 잎이 우거질 정도로 자라나 있었다. 서아진은 미리 준비한 톱을 나무에 가져다 대고 힘껏 자르기 시작했다. “아진아. 이거 우리 함께 심은 거잖아.” 신지환이 말리려 했다. “길을 막았잖아.” 서아진이 고개도 들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 땀이 손등에 후드득 떨어졌지만 신경 쓰지 않고 톱질을 이어갔다. “걸리적거리는 건 진작 없애야 했는데.” 세 번째로 간 곳은 도심에 자리 잡은 유명한 자물쇠 다리였다. 다리에는 수백수천이 넘는 자물쇠가 걸려 있었는데 위에는 커플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서아진은 정확하게 두 사람이 걸어둔 자물쇠를 찾아내 절단기로 끊어내려 했지만 어찌나 튼튼한지 힘이 많이 들어갔다. 신지환은 따라다니기만 하다가 서아진의 이상한 행동과 차가운 옆모습을 보고 마음이 불안해졌다. 서아진이 자물쇠를 끊다가 손가락이 까질 것처럼 빨개지는 걸 보고 신지환이 절단기를 낚아챘다. “내가 할게.” 신지환이 이렇게 말하며 손에 힘을 주자 10년간 달려있던 자물쇠가 툭 하고 끊어지며 강으로 빠져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갑자기 왜 망가트리려고 하는 거야?” 신지환이 절단기를 돌려주며 미간을 찌푸렸다. “이거 다... 우리 추억 아니야?” “낡았잖아.” 서아진이 말했다. “이제 질렸어.” 신지환이 미간을 찌푸리며 입을 열려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주여린이 문자를 보내온 것이다. 내용을 확인한 신지환이 서아진에게 말했다. “잠깐만. 문자에 답장 좀 하고.” 서아진은 신지환이 고개를 숙이고 타자하는 모습을 보고 문득 10년 전 처음 이 소설로 들어왔을 때를 떠올렸다. 그때 신지환은 주여린이 형 신지석과 결혼하는 바람에 너무 힘들어 몇 날 며칠을 뜬눈으로 지새우며 술로 퍼부었다. 서아진은 그런 신지환의 곁을 지키며 하소연을 들어주고 따듯한 집밥을 해주는가 하면 술이 떡이 되도록 마셔도 원망 한마디 없이 묵묵히 보살펴줬다. “서아진, 왜 너야? 내 옆에 있는 사람이 왜 너냐고?” 이 말에 서아진이 답했다. “나인 게 싫어?” 신지환이 답했다. “내가 원하는 사람은 여린이야.” 서아진이 말했다. “알아. 그래도 옆에 있을게.” 10년, 서아진이 신지환의 곁을 지킨 시간만 10년이지만 결국 주여린의 문자에 밀려나고 말았다. 마지막으로 간 곳은 야외 스키장이었다. 이곳은 두 사람이 첫 키스를 나눈 장소였다. 스키가 서툴렀던 서아진은 실수로 넘어지면서 신지환의 품에 안기고 말았다. 거리가 어찌나 가까운지 서로의 심장 소리가 들릴 정도였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키스를 나눴다. 부드러운 키스는 꽤 오래 이어졌고 서아진은 그것을 사랑의 시작으로 생각했다. 키스가 점점 뜨거워지는데 신지환이 흐느끼듯 누군가의 이름을 불렀다. “여린아...” 그 목소리는 들리지 않을 정도로 가벼웠지만 서아진은 똑똑히 들었다. 몸이 그대로 굳어버린 서아진은 신지환을 밀어내며 아무 일도 없는 척했고 신지환도 설명하지 않았다. 그 후로 서아진은 알게 되었다. 신지환이 그녀와 키스를 나눌 때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따로 있다는 걸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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