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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어쩌다 여기로 올 생각을 했어?” 신지환이 물었다. “마지막이야.” 신지환은 서아진이 무슨 뜻으로 이런 말을 하는지 몰랐지만 되묻지는 않았다. 두 사람이 스키복으로 갈아입는데 주여린이 나타났다. 빨간 스키복을 입은 주여린은 하얀 눈밭에서 유난히 눈에 띄었다. 주여린은 두 사람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지환아. 아진 씨. 어떻게 이런 우연이 다 있어요?” 신지환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여린아. 네가 여기는 어쩐 일이야?” “갑자기 스키 타고 싶어서.” 주여린이 걸어왔다. “여기서 마주칠 줄은 몰랐네. 괜찮으면 같이 탈래?” “당연히 괜찮지.” 신지환이 말했다. 그렇게 세 사람은 함께 스키를 타기 시작했고 신지환은 자연스럽게 주여린의 코치를 맡았다. 인내심 있게 동작을 설명해 주는가 하면 주여린을 부축해 천천히 스키를 탔고 넘어질 것 같을 때 바로 잡아줬다. 한편, 서아진은 옆에서 혼자 스키를 타다가 넘어지면 알아서 일어나야 했다. 신지환은 서아진이 넘어졌다는 사실조차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의 시선과 관심은 전부 주여린에게 쏠려 있었다. 그렇게 스키를 반쯤 타다가 신지환이 주여린에게 따뜻한 음료수를 사주겠다며 자리를 비웠다. 서아진이 대기존에 앉아 있는데 주여린이 그쪽으로 다가갔다. “아진 씨.” 주여린이 웃으며 물었다. “스키 꽤 잘 타는 것 같던데 지환이 가르쳐준 거예요?” 서아진은 대꾸하지 않았다. “말하자면...” 주여린이 서아진의 옆에 앉으며 가벼운 말투로 말했다. “지환은 어릴 적부터 나를 좋아했어요. 그러다 내가 지환의 형을 만나면서 많이 슬퍼했죠. 그래도 잘해주는 건 예전이나 지금이나 다름없어요. 내가 먹고 싶다고 하면 팔도를 다 뒤져서라도 찾아줬고 바다가 보고 싶다고 하면 바로 티켓부터 예매했어요. 내가 슬퍼 보이면 밤새 곁을 지켜줬고요...” 주여린이 잠깐 뜸을 들이며 서아진을 바라봤다. “왜 지환은 나를 이렇게 좋아할까요?” 서아진은 주여린이 과시한다는 걸 알고 대꾸하기 싫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멀리서 굉음이 들려왔고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눈사태야. 눈사태.” 서아진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거침없이 몰려오는 눈보라에 묻히고 말았다. 춥고 어두운 눈 속에서 숨이 막혀 왔다. 두꺼운 눈에 눌려 몸을 조금도 움직일 수 없었다. 눈이 사방에서 쉴 새 없이 굴러와 몸이 점점 무거워졌고 끝도 없는 한기가 몰려오기 시작했다. ‘이렇게 죽는 건가?’ 의식이 점점 흐릿해져 가는데 신지환의 목소리가 들렸다. 신지환의 목소리는 볼품없이 갈라져 있었고 두려움과 절망이 잔뜩 묻어났다. “여린아. 주여린. 어디 있어? 대답해.” 신지환은 주여린을 찾고 있었다. 미친 듯이 위험도 무릅쓰고 오직 주여린만을 찾아 헤맸다. 눈밭에 깔렸어도 서아진은 신지환의 다급한 목소리를 똑똑히 들었다. 그건 오직 주여린을 위한 처절한 울부짖음이었다. 이미 싸늘하게 얼어버린 심장이 다시 날카롭게 아프기 시작했다. 죽음의 고비에서 신지환이 본능적으로 보인 반응은 주여린이었고 목숨을 걸고 구하려는 사람은 서아진이 아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고작 몇 분일 수도 있었지만 100년처럼 길게 느껴졌다. 머리 위를 덮고 있던 눈이 조금 걷히는가 싶더니 약한 불빛과 차가운 공기가 들어오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눈에 들어온 건 신지환의 얼굴이었다. 얼굴은 눈으로 범벅이었고 빨갛게 충혈된 눈과 이마에 올라온 핏줄이 그가 얼마나 조급한지 그대로 보여주었다. 눈이 마주친 순간 서아진은 신지환의 눈에서 실망을 보아냈다. 절대 착각이 아니었다. 아마도 구조된 사람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주여린이 아니라서 그런 것 같았다. “아진아, 잠깐만. 일단 여린부터 찾고 올게.” 그러더니 서아진을 버리고 방향을 틀어 그가 정말로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을 찾아 떠났다. 눈밭에 버려진 서아진은 가슴이 갈기갈기 찢기는 것처럼 너무 아파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신지환은 서아진을 먼저 발견했지만 그녀를 구하지는 않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신지환은 드디어 주여린을 찾아냈다. 조심스럽게 주여린을 품에 안아 든 신지환은 상태를 살폈다. “여린아. 여린아. 괜찮아?” 주여린이 허약하게 말했다. “추워... 너무 추워...” 신지환은 자신의 외투를 벗어 주여린을 감쌌다. 뒤늦게 도착한 구급대원이 서아진을 구출해냈지만 기쁨도 잠시, 구급대장이 이렇게 말했다. “눈사태 피해 범위가 너무 커서 이쪽으로 출동한 구급차는 단 한대입니다. 부상자가 두 명이지만 일단은 한 명만 이송할 수 있습니다. 남은 부상자는 다음 순서를 대기해야 합니다.” 신지환은 서아진과 주여린을 번갈아 봤다. 서아진은 온몸이 눈으로 범벅이었고 얼굴이 창백할뿐더러 입술이 퍼렇게 질린 게 호흡이 미약했다. 주여린은 몸이 춥긴 했지만 의식은 멀쩡했고 조금 놀랐을 뿐이었다. 구급대장이 말했다. “이 여성분이 더 위급해 보이는데 먼저 이송하시죠.” 신지환이 말했다. “주여린 씨부터 이송하세요.” 서아진은 그런 신지환을 보며 손을 내밀어 후자의 팔목을 잡았다. 차가운 손은 힘이 별로 들어가지 않았지만 신지환은 느낄 수 있었다. “지환아...” 서아진은 신지환을 보며 허약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 너무 힘들어...” 신지환은 고개를 숙이고 그런 서아진을 바라봤다. “10년이야...” 서아진이 눈물을 흘렸지만 이내 차가운 얼음으로 굳어버렸다. “매번... 나는 너를 선택했는데... 너도 한번만 나를 선택해주면 안될까...?” 서아진은 신지환을 보며 간절히 부탁했다. “딱... 한번만...” 신지환이 멈칫했다. 서아진이 이런 말투로 말한 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신지환의 기억 속에 서아진은 늘 착하고 강했고 원망도 강요도 한 적이 없는 사람이었지만 지금은 이토록 절망적이고 나약해 보였다. 그러면서 10년간의 세월이 떠올랐다. 주여린이 신지석과 결혼하면서 절망한 신지환이 술을 퍼마시다 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는데 그때 서아진이 한시도 곁을 떠나지 않고 병상을 지키며 이렇게 타일렀다. “신지환, 세상이 너를 밀어내도 나는 너 사랑해. 세상이 너 버려도 나는 아니야.” 경쟁사의 모함으로 회사가 망하기 직전에 놓이자 곁을 지키던 사람들이 하나둘 떠나갔지만 오직 서아진만이 모든 주얼리와 부동산을 처리하고 소유한 자산을 처리해 신지환과 함께 힘든 나날을 이겨내며 응원했다. “지환아. 괜찮아. 다 지나갈 거야. 내가 옆에 있을게.” 주여린이 인스타에 올린 키스 사진을 보고 힘들어할 때면 서아진이 그를 현실로 끌어내 부드럽고 따듯한 일상으로 마음의 구멍을 채워줬다. 신지환이 차갑게 굴면 서아진이 한발 먼저 다가갔다. 주여린 때문에 힘들어하면 서아진이 옆을 지켰고 부모님의 홀대를 받으면 서아진이 위로했고 신지환이 수도 없이 약속을 어겨도 서아진은 어김없이 눈감아줬다. 10년간 누가 뭐래도 흔들리지 않고 신지환을 선택한 사람은 오직 서아진이었다. 신지환이 망설이는데 주여린이 허약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환아... 나 너무 힘들어...” 신지환이 정신을 차리고 주여린과 서아진을 번갈아봤다. 그러다 서아진의 손을 억지로 뜯어낸 신지환이 이렇게 말했다. “아진아. 조금만 기다려. 다음에는... 다음에는 꼭 너를 선택할게.” 그러더니 구급대장에게 이렇게 말했다. “주여린 씨부터 이송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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