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화
“그래요. 당신 말이 맞아요. 나는 반드시 할아버지의 소원을 이뤄드리고 할아버지를 구해야 해요.”
나는 방 안에서 한참을 서성였다. 비록 이곳은 허름했고 황영수가 내게 살갑게 말을 건 기억도 없지만, 이곳을 떠나려니 마음이 매우 착잡했다.
“짐을 챙겨서 떠나요. 지금 원태 씨의 몸은 음기가 아주 강해요. 마침 점심이니까 어서 여기를 떠나요.”
조옥정의 목소리가 다시금 내 귓가에서 울려 퍼졌다.
나는 사실 조옥정을 꽤 불편해했지만 오늘 밤 일을 겪은 뒤로 조옥정의 목소리를 들으니 왠지 모르게 마음이 따뜻해졌다. 비록 조옥정도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인간은 아니지만 그건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래요.”
나는 침울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나는 방 안과 마당을 간단히 정리한 뒤 나의 낡은 가방을 메고 그곳을 떠나려고 했다.
“여보, 중요한 걸 챙기지 않으셨네요. 어르신께서 남기고 가신 짐을 챙기셔야죠.”
조옥정의 말대로 나는 하마터면 황영수가 내게 남겨준 유일한 것을 두고 갈 뻔했다. 나는 죄책감이 들어 자신의 뺨을 한 대 때렸다.
그리고 황영수가 남기고 간 캐리어를 여는 순간, 눈앞이 아찔함과 동시에 머리가 어지러우면서 썩은 냄새가 코를 찔러 나는 하마터면 그 자리에서 토할 뻔했다.
“이게 뭐야?”
나는 코를 틀어막으면서 욕을 하고 싶은 충동을 억눌렀다.
자세히 살펴보니 낡은 옷들을 제외하면 별것 없었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황영수는 그동안 나를 위해 갖은 고생을 했는데 그에게서 무슨 엄청난 보물이라도 물려받기를 바란다면 너무 파렴치한 인간 아닌가?
“이걸 챙겨야 하는 거예요?”
황영수의 물건들을 챙기기 싫은 건 아니었다. 다만 그의 옷들을 챙겨봤자 내게는 아무 소용이 없을 뿐이다. 게다가 그 옷들에서 나는 냄새는 마치 시체가 썩는 냄새와도 같아 평범한 인간은 절대 견딜 수가 없었다.
“옆에 있는 지퍼를 여세요...”
내가 어찌할 바를 몰라 하고 있을 때 조옥정이 입을 열었다. 나는 비록 조옥정이 눈에 보이지는 않았으나 그녀가 줄곧 내 옆을 지키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고 그 점이 내게는 아주 큰 위안이 되었다.
울며 겨자 먹기로 캐리어의 지퍼를 여는 순간, 코를 찌르는 냄새가 내 온몸 곳곳을 파고드는 것만 같아 나는 자기도 모르게 연달아 뒷걸음질 쳤다.
내가 황영수를 오해한 게 틀림없었다. 그의 옷에서 나는 냄새가 아니라 캐리어 안쪽에 들어있던 봉투 안에서 나는 냄새였다. 나는 그것을 열어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한 번 꺼내 보세요.”
“뭐라고요? 안 보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조옥정이 그것을 꺼내보라고 하자 나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여보, 어르신의 당부를 잊은 건 아니죠?”
황영수는 나를 위해 거의 평생을 바쳤다. 사실 나만 아니었더라면 황영수는 지금쯤 편히 노후 생활을 즐겼을 텐데 나를 구하려다가 행방불명되었다.
그런 생각이 들자 나는 손을 쭉 뻗어서 캐리어 안에 넣었다. 황영수가 캐리어 안에 내게 줄 물건을 넣어두었다고 했으니 아까의 그 낡은 옷 몇 벌이 아니라 분명히 다른 것이 있을 것이다. 나는 반드시 그것을 찾아내야 했다.
“끄아악...”
손을 뻗어 안에 넣는 순간, 나는 겁을 먹고 혼비백산했다. 뭔가 물컹한 살덩이 같은 것이 만져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힘을 너무 많이 쓴 탓인지 봉투 안에 들어있던 것들이 전부 딸려 나왔다.
곁눈질로 확인해 보니 썩은 눈알 두 개가 마침 황영수의 옷 위에 떨어져 있었다. 나는 두려운 마음이 들면서도 제대로 확인해 보고 싶은 마음이 컸다.
그런데 눈알들이 갑자기 나를 빤히 바라보면서 꿈틀거렸다.
‘이럴 수가.’
황영수는 대체 뭘 어쩌고 싶은 걸까? 설마 그것이 바로 그가 내게 주려던 것인 걸까? 왜 이렇게 겁을 주는 것일까? 나는 그동안 충분히 고된 삶을 살았고 앞으로는 그를 구할 방법도 생각해 봐야 하는데 말이다.
“어서, 어서 옆에 놓인 책을 챙겨요.”
조옥정은 내가 넋을 놓고 있자 다급히 날 향해 외쳤다.
나는 당시 제정신이 아니었기에 조옥정의 말을 듣자마자 빠르게 책을 집어 들었다. 조옥정이 얘기해주지 않았다면 나는 눈알을 제외하고도 책 한 권이 들어있다는 걸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다.
“어서, 어서 열어봐요...”
조옥정이 나에게 책을 열어보라고 했다. 그녀는 아주 다급한 어투로 말했고 나는 망설이지 않았다. 지금으로서는 그녀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사람이든 귀신이든 나는 이미 그녀와 부부가 되었으니 그녀가 나를 해칠 리는 없었다.
누렇게 바랜 책을 들어서 펼치려는 순간, 나는 그것이 책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것은 누런색의 단단한 종이로 엮어진 노트인 듯했는데 표지에는 아무것도 없었고 첫 장을 넘기자 종이 한가운데 ‘구처명부’라고 네 글자가 떡하니 쓰여 있었다.
구처명부?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비록 그것의 의미를 다 이해한 것은 아니지만 글로만 봤을 때는 황영수가 내게 전해주려던 것이 맞는 듯했다. 황영수가 어제 나와 결혼할 아홉 명의 여자를 찾았다고 했던 걸 생각해 본다면 말이다.
“한 장 더 펼쳐 보세요...”
조옥정은 나보다도 더 다급해 보였다.
곧이어 다음 장으로 넘어가니 확실히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글씨가 흐릿하게 번져서 잘 읽히지 않았다. 그럼에도 대충 그 내용을 짐작할 수는 있었다.
이름은 염효남, 키는 165cm에 몸무게는 47.5kg.
나이를 보니 나보다 세 살 더 많은 듯했고 사주팔자와 주소는 전혀 알아볼 수 없었다.
“그 사람이 당신의 첫 번째 아내인가 봐요. 꽤 예쁘게 생긴 것 같은데...”
조옥정이 장난스러운 말투로 내게 말을 건넸다.
“그러면 당신은요?”
나는 조옥정의 생각을 알 수 없었다. 비록 우리는 명혼을 올린 사이지만 그럼에도 조옥정이 내 아내인 건 사실이었다. 그런데 염효남이 내 첫 번째 아내라고 하다니. 게다가 조옥정은 전혀 질투하지 않는 듯했다. 설마 조옥정은 내게 아무런 마음이 없는 걸까?
“저는 그 사람들과 다르죠. 저는 원태 씨의 본처잖아요.”
“나는 당신이 싫지 않아요.”
나는 조옥정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나 또한 그녀처럼 살아있지만 살아있는 사람이라고 칭하기 애매한 존재였으니 그녀가 어떤 존재든 상관없었다.
나는 그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펼쳐 보았다. 총 열두 장이었는데 표지에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고 첫 번째 장에는 구처명부라고 적혀 있었다. 그리고 두 번째 장부터 열 번째 장까지는 여자들의 정보가 적혀 있었다. 기본적으로 이름, 사주팔자, 집 주소 등이 적혀 있었는데 대부분이 흐릿하게 번져서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마지막 장은 첫 번째 장과 굉장히 비슷한 형식으로 한가운데 ‘남편 황원태’라고 적혀 있었다.
“왜 그래요? 왜 넋이 나갔어요?”
조옥정은 내가 책을 다 읽고도 가만히 있자 내게 물었다.
“이만 가죠.”
나는 금방 정신을 차렸다. 황영수는 나를 살리겠다고 나를 위해 아홉 명의 아내를 찾아주었는데 정체불명의 눈알이 그 책을 부식시켜 버렸다.
“이 책은 챙기셔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그 사람들을 어떻게 찾겠어요?”
조옥정은 내가 몸을 돌려서 떠나려고 하자 다급히 말했다.
“어차피 잘 보이지도 않아요. 운명이라는 건 내가 알아서 만들어가는 거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그리고 나는 꼭 할아버지를 구할 생각이에요.”
나는 일부러 아무렇지 않은 척 대꾸했다.
“안 돼요! 이건 어르신께서 챙기라고 하신 거예요. 그게 없으면 제가 난감해져요. 그리고 저 눈알도 같이 챙겨야 해요.”
조옥정은 내가 그것들을 챙기려고 하지 않자 한껏 엄숙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순간 나는 속이 울렁거렸다.
“저렇게 악취를 풍기는 걸 갖고 다니라고요? 미쳤어요?”
“저 눈알이 없었다면 저 책이 멀쩡히 저기에 있을 수 있었을 것 같아요?”
조옥정은 말하면 말할수록 더욱더 화가 났다.
나는 그녀의 말에 완전히 얼이 빠졌다. 누가 그걸 안에 넣어둔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눈알 때문에 구처명부의 내용이 잘 보이지 않는 것은 확실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저 눈알이 아니었다면 저 책은 이미 발각됐을 거예요. 그놈은 진짜 강했어요. 그래서 눈알조차 견디지 못하고 부식되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