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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심명준의 뒷모습이 잠깐 멈칫했다. 심명준은 뒤돌아보지 않은 채, 무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연이는 몸이 약해. 빈혈도 조금 있고, 의사가 햇볕을 자주 쬐어야 한대. 안방은 아침 햇살이 잘 드니까, 일단 지연이가 거기서 지내게 했어.” 심명준은 그대로 말을 이었다. 오히려 돌아서서 신유리를 바라보며, 당연하다는 듯 덧붙였다. “그리고 유리야, 넌 방금 돌아왔잖아. 완전히 조용한 곳에서 쉬면서 회복해야 해. 여기가 더 낫겠어.” ‘여기가 더 낫다고...’ 너무도 가볍게 흘러나온 한마디였다. 신유리는 이상하게도, 결혼하던 해에 이 집으로 처음 들어왔을 때가 떠올랐다. 별장이 너무 넓고 차갑다며 신유리가 항성으로 돌아가겠다고 떼를 쓰자, 심명준이 그날 밤 바로 디자이너를 불러 집 구조를 다시 손보게 했다. 옆방까지 터서 햇살이 가득 들어오는 유리 온실을 만들고, 꽃으로 채운 공간을 신유리에게 내주었다. 그때 심명준은 신유리를 꽉 끌어안고, 귓가에 대고 이렇게 말했다. “우리 유리는 세상에서 제일 좋은 것만 받아야 해. 여기서 보내는 하루하루, 눈만 뜨면 햇살이랑 네가 제일 좋아하는 꽃부터 보게 해줄게.” 그런 말을 하던 심명준이, 지금은 아무렇지 않게 말하고 있었다. 햇볕이 필요한 사람은 신유리가 아니라 허지연이라는 뜻이었다. 멍하니 서 있던 순간, 허지연이 우유 한 잔을 들고 조심스레 다가와 신유리의 회상을 끊었다. “유리 언니.” 허지연은 잔을 내밀었지만, 눈빛에는 조금도 겁이 없었다. “따뜻한 우유야. 마음 좀 가라앉히고 푹 쉬어.” 신유리가 거절하려고 입을 열기도 전에, 허지연의 손목이 툭 꺾였다. “아!” 뜨겁게 달아오른 우유가 통째로 신유리의 손등에 쏟아졌다. 피부가 순식간에 붉게 부풀어 올랐다. 그런데 허지연은 놀란 비명과 함께 뒤로 휘청이며 넘어지더니, 문틀 모서리에 이마를 세게 부딪쳤다. 그러자 피가 바로 흘러내렸다. 허지연은 눈물에 젖은 얼굴로, 억울한 듯 서럽게 울먹였다. “명준 오빠, 미안해. 나, 나 손에 힘이 풀려서... 유리 언니를 탓하지 마.” 그러자 심명준의 얼굴이 단숨에 굳었다. 심명준은 허지연을 번쩍 안아 올렸고, 차갑게 가라앉은 시선이 신유리에게 꽂혔다. 신유리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실망이 눈에 담겨 있었다. “유리야, 3년밖에 안 됐는데... 너 왜 이렇게 낯설어졌어?” 신유리는 고개를 살짝 기울인 채 두 사람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옆에 놓인 다른 우유 잔을 집었다. 그리고 허지연을 향해 그대로 부어 버렸다. “방금 건 내가 쏟은 거 아니야. 지금 이건, 내가 한 거고...” 그러자 심명준은 잠깐 굳어섰다. 심명준의 시선이 신유리의 붉게 부은 손등을 스쳤지만, 끝내 마음을 굳히지 못한 듯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속상한 건 알아. 그래도 지연한테 화풀이하지 마. 지연은 심장도 약해.” 심명준은 한 박자 쉬고, 못을 박듯 말했다.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야. 다음에 또 이런 일 있으면... 유리야, 그때는 네 편 안 들 거야.” 말을 마친 심명준은 신유리를 한 번 더 보지도 않았다. 심명준은 계속 흐느끼는 허지연을 안은 채 급히 아래층으로 뛰어 내려갔다. 텅 빈 복도에 발소리만 멀어졌다. 그 뒷모습을 보던 신유리는 낮게 웃었다. 신유리의 웃음소리가 넓은 복도에 울려 퍼졌고, 그 안에는 끝없는 씁쓸함만 남았다. 예전에는 신유리 손에 작은 상처 하나만 나도, 심명준이 병원 의사들을 죄다 불러야 마음이 놓인다고 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손이 이렇게 데어서 붉게 부풀어 올랐는데도, 심명준은 다른 여자를 안고 고개 한 번 돌리지 않은 채 가 버렸다. ‘좋아. 심명준, 이게 내가 너를 살리겠다고 목숨 걸고 지옥에서 기어 나와 여기까지 돌아온 벌이라면... 제대로 받는 거네.’ 그때, 귀를 찢을 듯한 휴대폰 벨 소리가 신유리의 생각을 끊어냈다. 휴대폰을 꺼내 보니, 모르는 번호로 문자가 와 있었다. [봤지? 내가 진작 말했어. 심명준은 너랑 어울리지 않아.] [다시 내 곁으로 돌아와. 유리야.] 신유리는 아무 표정도 바꾸지 않은 채 문자를 삭제하고, 그대로 작은 방으로 돌아갔다. ... 다음 날, 심명준이 신유리를 위해 준비한 환영 파티가 예정대로 열렸다. 경성에서 가장 호화롭다고 불리는 운정 클럽은 불빛으로 번쩍였고, 손님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모두가 재계 태자 심명준이 잃었다가 되찾았다는 진주 같은 아내를 직접 보고 싶어 했다. 원래라면 주인공은 두 사람이어야 했다. 그런데, 그 자리에는 누가 봐도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 하나 더 끼어 있었다. 신유리는 검은 드레스를 입고 서늘하게 서 있었다. 신유리 옆에 선 심명준은 팔 한쪽이 허지연에게 단단히 붙잡힌 채였다. 허지연이 은색 포크로 푸아그라를 떠서 심명준의 입가로 가져갔다. “명준 오빠, 이거 진짜 맛있어. 오빠도 한입 먹어 봐.” 주변 시선이 순식간에 달라졌다. 호기심과 의미심장한 웃음이 섞인 눈길이 이쪽으로 몰렸다. 심명준의 시선이 아주 짧게 신유리의 무표정한 얼굴을 스쳤다. 심명준은 망설이는 듯하다가, 결국 입을 벌려 허지연의 친밀함을 받아들였다. 그 순간, 신유리의 가슴이 바늘로 콕 찔린 것처럼 아렸다. 한 번에 무너질 정도는 아니였으나 잔잔하게 오래 아렸다. 신유리는 기억하고 있었다. 예전의 심명준은 밖에서 신유리가 먹여 주려 하면 늘 막았다. 체면이 깎인다며 그런 건 집에서만 하라고 했다. 하지만 지금의 심명준은 곧바로 삼키고, 담담하게 말했다. “음...” 허지연의 입가에는 승리의 미소가 번졌다. 허지연은 더 다가붙어 심명준의 팔에 몸을 기대고, 애교 섞인 목소리로 투정을 부렸다. “명준 오빠... 오래 서 있으니까 나 발이 너무 아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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