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화
하지민과 윤수아는 차건우의 시선과 매장 안의 싸늘한 분위기를 의식했다. 이때 하지민이 이를 악물고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이 일은 제 잘못이에요. 제가 서아라 씨가 건네준 팔찌를 제대로 못 받았으니까... 이 손해는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그 말을 들은 윤수아가 깜짝 놀라 소리쳤다.
“지민아, 왜 그래! 이건 명백히 서아라가 일부러 그런 거잖아! 우리가 왜 보상해야 돼?”
“수아야.”
하지민이 단호하게 그녀의 말을 끊었다.
“그건 내가 제대로 못 받은 거지, 아라 씨 탓은 아니야.”
그러고는 서아라가 있는 쪽을 향해 고개를 숙이며 정중히 인사했다.
“서아라 씨, 아까 제 행동이 무례했던 점... 사과드릴게요. 정말 죄송해요.”
겉보기에는 분명 사과였지만 하지민의 눈가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고 당장이라도 떨어질 듯 고개를 숙인 모습은 누가 봐도 ‘피해자’ 그 자체였다.
서아라는 그 장면을 담담하게 바라봤다. 그 타이밍에 윤수아가 다시 나섰다.
“이건 지민이랑 아무 상관없어! 내가 서아라라는 여자 꼴 보기 싫어서 그 팔찌 뺏으려고 한 거야! 지민이는 그 팔찌 갖고 싶다고 한 적 없다고!”
윤수아는 고개를 빳빳이 들고 마치 정의감에 불타는 사람처럼 말했다. 그리고 옆에 서 있던 직원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못 믿겠으면 여기 직원한테 직접 물어봐!”
차건우의 시선이 점원에게 향하자 점원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맞습니다. 하지민 씨는 팔찌를 원한다고 말씀하신 적 없습니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차건우가 입을 열었다.
“지민아, 넌 먼저 들어가 있어. 여긴 내가 처리할게.”
하지민의 얼굴에는 어쩔 수 없다는 듯한 쓸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 모습은 딱 억울하게 오해받고 쫓겨나는 순진한 여자 같았다.
“그래도... 어쨌든 내가 제대로 받지 못해서 부서진 건 사실이니까, 보상은 내가 하는 게 맞는 것 같아.”
서아라는 그 광경을 조용히 바라보며 속으로 비웃고 있었다.
‘정말, 이 정도 연기면 시상식에서 상 받아야 하지 않을까?’
책임을 떠넘기지도 않고 사과도 했지만 끝내 하지민은 그 팔찌를 갖고 싶었다는 핵심은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거기에 윤수아가 또 나서서 책임을 뒤집어쓰고 나니 하지민은 더더욱 ‘피해자’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그에 비해 서아라는 계속 따지고 물러서지 않는 고집 센 아내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
서아라는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느끼며 시선 한 번 돌렸다.
역시나, 사람들의 눈빛이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 하지민을 향한 동정과 이해, 그리고 그래도 예의는 있는 여자라는 인식까지 덧씌워지고 있었고 심지어 윤수아조차 감동한 듯한 표정으로 하지민을 바라보고 있었다.
차건우의 표정 역시, 처음보다 훨씬 부드러워져 있었다.
“지민아, 먼저 들어가. 난 여기서 마무리 좀 하고 갈게.”
하지민은 상황 파악이 빠른 여자였다. 지금 이 타이밍에서 억지로 더 엮이면 오히려 역효과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순순히 물러섰다.
“응, 알겠어.”
...
하지민은 윤수아와 함께 매장을 나섰다. 사람들이 하나둘 흩어진 뒤, 차건우는 서아라를 향해 냉랭하게 입을 열었고 그의 눈빛에는 차가운 기운이 서려 있었다.
“서아라, 넌 왜 항상 하지민한테 시비를 거는 거야? 내가 뭐라고 했지? 얌전히만 있으면 네 자리, 누구도 못 건드린다고.”
서아라는 눈썹을 살짝 올리며 헛웃음을 지었다.
“난 조용히 내 팔찌 고르고 있었거든? 근데 그쪽 두 분이 갑자기 들이닥쳐서 그걸 뺏겠다고 한 건데... 그게 어떻게 내가 먼저 시비 건 게 되는 거야?”
서아라는 눈을 가늘게 뜨며 차건우를 바라봤다.
“CCTV라도 한 번 확인해 보지 그래? 누가 먼저였는지 금방 나오잖아?”
차건우의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네가 일부러 팔찌를 떨어뜨린 거 내가 모를 줄 알아?”
하지만 서아라의 표정은 전혀 흐트러지지 않았고 놀라는 기색도 없이 오히려 입가에 담담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예전에는 네가 눈썰미 없는 줄 알았는데 오늘 보니까... 의외로 눈치는 좀 있네? 놀랍다.”
그 안에 담긴 비아냥을 차건우가 모를 리 없었다. 더 놀라운 건, 서아라가 마치 일부러였다는 듯 당당하게 태도를 드러냈다는 거였다.
“그러면 지금까지 네가 하지민한테 해왔던 짓들, 다 고의였다는 거야?”
서아라는 가볍게 웃으며 받아쳤다.
“그거야말로, 하지민 씨가 나한테 먼저 해온 것들이잖아. 지금 와서 입장 바뀌니까 억울한 척하는 거, 좀 웃기지 않아?”
그 말에 차건우의 머릿속에 어느 장면 하나가 떠올랐다. 하지민이 와인을 건네다 서아라가 잔을 못 받아서 옷에 와인이 쏟아졌던 날. 그때 서아라는 하지민이 일부러 놓은 거라고 했지만 그는 그녀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 기억이 떠오른 순간, 서아라가 또렷한 눈빛으로 차건우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 일부러 떨어뜨린 거 맞아. 그깟 팔찌, 차라리 박살 내는 게 낫지. 그 여자 손에 들어가는 꼴은 죽어도 보기 싫거든.”
서아라의 눈동자는 단단하게 흔들림 없이 그를 응시했다.
“앞으로 내 건 절대 누구한테도 안 뺏길 거야. 아무것도. 왜? 아까 그 팔찌 아까웠어? 마음 아팠겠지. 그래, 마음 아파야지.”
서아라는 차건우를 바라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왜냐하면 내가 이혼하지 않는 한, 이런 일 앞으로 수도 없이 생길 거거든. 그러니까 마음 아파도... 꾹 참고 견뎌. 그게 네가 내린 선택이니까.”
‘하지민이 그렇게 중요하지? 그래서 그 여자를 위해 날 이렇게까지 몰아붙였지? 그럼 봐봐. 그 여자가 진짜로 네 회사보다 중요한지.’
그 말이 끝났을 때, 차건우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는 눈앞의 서아라를 천천히, 그리고 낯설게 바라봤다.
이 여자는 더 이상, 예전의 서아라가 아니었다. 요즘 들어 서아라는 전과 많이 달라졌다. 성격만 변한 게 아니었고 외모 역시 이전보다 훨씬 더 눈에 띄게 아름다워진 느낌이었다.
예전의 담백하고 단정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지금의 그녀는 화사하고 도도하며 눈빛 하나, 미소 하나에도 치명적인 매력이 담겨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서아라가 예전부터 예쁘지 않았던 건 아니었다. 서아라는 피부며 이목구비, 얼굴형까지도 흠잡을 데 없이 고왔다. 하지만 그 아름다움은 너무 밋밋해서 마치 끓이지 않은 물처럼 싱겁고 밍밍했다.
게다가 서아라가 예전에 벌였던 일들로 인해 차건우는 그녀를 볼 때마다 어쩔 수 없이 혐오감 섞인 편견을 가졌었다.
‘겉만 곱다고 뭐해? 속은 독사 같은데.’
하지만 지금 서아라의 태도는 차건우에게 혼란을 안겨주고 있었다.
서아라가 정말 밀고 당기기를 하는 건지 아니면 일부러 대립각을 세우며 자신에게 협상을 요구하려는 건지 차건우는 분간이 되지 않았다.
“서아라, 내가 말했지. 얌전히만 있어 준다면 돈은 넉넉하게 챙겨줄 거라고.”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서아라가 싸늘한 목소리로 그의 말을 잘랐다.
“네 그 돈 따위, 누가 필요하대?”
차건우는 냉소를 흘렸다.
“필요 없다고? 필요 없으면서 태성 그룹 계열 매장까지 와서 팔찌를 골라?”
“내가 뭘 사든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인데?”
서아라는 조금도 흔들림 없는 어조로 되받아쳤다.
“네가 공개적으로 태성 그룹 사모님이라고 떠들고 다닌 게 결국 계산서 내 이름으로 넘기려고 그런 거 아니야?”
서아라는 그의 그 말이 너무도 기가 막힌다는 듯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씩 웃어 보였다.
“맞아, 3년 동안 내가 너한테 뜯어낸 게 수십억은 될걸? 다음 생에도 다 못 쓸 만큼 말이야.”
그 말에 차건우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
그러고 보니 지난 3년간 서아라가 자신의 이름으로 무언가 청구하거나 돈을 요구했던 기억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차건우는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너 그 돈은 어디서 났어? 지금 그 팔찌 값도 만만치 않을 텐데 내 카드 안 썼잖아.”
서아라는 냉정하게 받아쳤다.
“내가 네 돈을 쓴 것도 아닌데 네가 왜 신경을 써?”
그 순간, 며칠 전 연회장에서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 자리에서 고서준이 서아라를 도왔던 장면 그 생각이 스치자 차건우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너 고서준이랑 무슨 사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