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화
윤수아는 계단 아래로 내려오는 사람을 보는 순간, 눈빛이 반짝이며 외쳤다.
“건우 오빠!”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 서아라를 가리키며 목소리를 높였다.
“쟤가 뭔 약이라도 잘못 먹은 거 아냐? 지민이가 뭐만 보면 꼭 뺏으려고 하고! 아까부터 태성 그룹 험담하면서 여기서 아무도 물건 사지 말래!”
사실을 완전히 뒤집는 윤수아의 입놀림은 정말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서아라는 아직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차건우의 시선은 이미 얼음처럼 차갑게 그녀에게 향하고 있었다.
“서아라, 그 팔찌 지민이한테 돌려줘.”
그 말에 윤수아는 벌써 이긴 듯한 표정을 지었고 하지민 역시 입꼬리를 아주 살짝 올리며 웃음을 감췄다.
‘돌려주라고? 마치 원래 하지민의 것처럼 말하네.’
그럼에도 서아라는 담담하게 말했다.
“차건우, 사정도 모르고 그렇게 단정 지어도 돼?”
차건우의 얼굴에는 냉정한 기색만 가득했다.
“지민이가 돌아온 이후로, 넌 계속 시비 걸었어. 입만 열면 억울하다고 하지만 내가 본 건 항상 네가 먼저 지민이를 괴롭히는 장면뿐이었어. 아니야?”
사실 처음 몇 번은 차건우도 직접 CCTV를 확인하고 상황을 살펴보려 했었다. 하지만 어이없게도 매번 영상 속에는 서아라가 하지민에게 시비를 거는 모습만 남아 있었다. 그 뒤로 그는 서아라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게 됐다.
서아라는 눈앞에 선 남자의 차디찬 얼굴을 바라보다가 그 옆에서 은근히 비웃는 하지민과 윤수아를 쳐다보더니 천천히 미소 지었다.
“그래, 지민 씨가 그렇게 갖고 싶다면 드리죠.”
차건우의 표정이 한층 누그러졌고 하지민은 입술 끝을 더 깊게 올렸다. 윤수아는 아예 기세등등해져 눈빛으로 서아라를 조롱했다.
서아라는 손에 들고 있던 팔찌를 조심스럽게 들어, 하지민을 향해 내밀었다.
“받으세요, 지민 씨.”
이 팔찌는 단순한 액세서리가 아니었다. 지금 이 순간, 이건 차건우가 누구 편에 서 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이었고 동시에 하지민이 서아라를 이긴 ‘증거’이자 ‘전리품’이었다. 하지민은 당연하다는 듯 손을 내밀었고 거절할 이유도 체면도 따지지 않았다.
그런데 팔찌가 그녀의 손끝에 닿는 찰나 미끄러지듯 손에서 벗어나 바닥으로 떨어졌다.
쨍그랑! 팔찌는 차가운 대리석 바닥 위에서 산산이 부서졌다.
순간, 매장 안이 정적에 휩싸였고 모두가 놀란 얼굴로 바닥을 바라보았다. 하지민은 떨어진 팔찌를 멍하니 내려다보며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지민 씨.”
서아라가 갑자기 입을 열며 침묵에 휩싸였던 매장 안의 분위기를 깼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짙은 꾸짖음이 담겨 있었다.
“그토록 갖고 싶어 하시더니 그렇게 중요한 팔찌를 왜 그렇게 허술하게 받으세요? 조심 좀 하시지 그랬어요?”
하지민이 정신을 차리며 서아라를 노려봤다.
“서아라 씨, 일부러 그런 거죠?”
서아라는 고개를 갸웃하며 눈썹을 살짝 올렸다.
“제가요? 지민 씨가 못 받은 건 지민 씨 탓 아닌가요? 왜 제 탓을 하세요?”
그녀는 여유롭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게다가 ‘조심 좀 하지’라고 말했을 뿐인데 지민 씨는 왜 그걸 ‘제가 일부러 그런 거다’라고 받아들이시죠?”
그리고 서아라는 일부러 말을 멈췄다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며 덧붙였다.
“설마... 그런 식으로 뒤집어씌우는 데 익숙하신가요?”
“진짜...”
윤수아가 발끈하며 소리를 질렀다.
“건우 오빠, 저 여자 봐! 얼마나 악질인 줄 알아? 일부러 지민이가 못 받게 팔찌 떨어뜨려 놓고서는 지금은 오히려 지민의 탓을 해! 진짜 뻔뻔하잖아!”
차건우는 이미 서아라가 무슨 수를 쓰는지 뻔히 보인다는 듯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서아라, 지민이한테 사과해.”
그러자 서아라는 지극히 무심한 말투로 되받아쳤다.
“사과 안 해. 그래서? 네가 날 어쩔 건데?”
차건우는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 예전 같았으면 서아라는 진심으로 억울하다는 듯, 울먹이며 변명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정반대였다. 서아라의 한마디에 차건우는 그녀가 정말 변했다는 걸 느낄 수밖에 없었다.
윤수아는 격분한 얼굴로 다시 소리쳤다.
“건우 오빠! 서아라가 고의로 물건 망가뜨린 거잖아! 당장 경찰 불러서 구속해야 해! 감방에서 며칠 썩어 봐야 정신 차리지, 그럼 사과할지 안 할지 보자고!”
서아라는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윤수아 씨, 법을 잘 모르시는 것 같네요. 판매 상품을 망가뜨렸을 경우에는 원가 보상만 하면 됩니다. 감옥에 갈 일은 없어요.”
그 말에 윤수아는 더 크게 소리 질렀다.
“들으셨죠? 본인이 직접 고의로 망가뜨렸다고 했잖아요! 건우 오빠, 들었지? 자기가 인정했다니까?”
그 째지는 듯한 목소리는 듣는 사람의 고막을 찌를 듯했고 서아라는 귀찮은 듯 귀를 문질렀다.
“귀가 안 좋은 데다, 머리까지 나쁘면... 진짜 힘드시겠어요.”
서아라는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저는 ‘손해가 발생했으면 정가로 배상하면 된다’라고 말했지, ‘일부러 망가뜨렸다’고 한 적 없어요. 그 둘은 전혀 다른 말인데 그걸 못 구분하세요?”
윤수아는 끝까지 억지를 부렸다.
“그럼 정가로 보상하겠다고 하신 건 뭐예요? 감옥 가기 싫어서 돈으로 해결하려는 거잖아요. 그게 바로 본인이 잘못을 인정한 거 아닌가요?”
그 황당한 논리에 매장 안 사람들은 하나같이 난감한 얼굴이 되었다.
윤수아의 억지는 이제 말싸움이 아니라, 그저 ‘소란’ 그 자체였다.
‘저런 사람이 이런 고급 매장에 출입하다니...’
‘한 사람 때문에 매장 분위기 전체가 무너지는구나.’
사람들의 눈빛은 하나같이 싸늘했고 윤수아를 보는 눈초리는 완전히 싸늘해져 있었다.
심지어 하지민의 표정조차 더 이상 밝지 않았다. 윤수아가 흥분해 고함을 질러대는 동안에도 서아라는 내내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제가요? 보상한다고 한 적 없는데요. 그저 수아 씨에게 간단히 법 상식을 알려드린 것뿐이에요.”
윤수아는 또 뭐라고 말하려다 그 순간, 차건우의 차가운 목소리가 단칼처럼 끼어들었다.
“그만해.”
윤수아는 아무리 제멋대로인 성격이라도 차건우 앞에서는 기가 죽을 수밖에 없었다. 윤수아는 어깨를 움츠리며 한발 물러섰고 더 이상 말도 꺼내지 못했다.
그때 서아라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직원에게 말했다.
“그 팔찌, 누가 떨어뜨렸든 저든 하지민 씨든 상관없이요. 그냥 차건우 씨 쪽으로 정산해 주세요.”
서아라는 살짝 웃으며 덧붙였다.
“지민 씨는 건우 씨의 소중한 사람이자 첫사랑이라고 하니까요. 그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게 처리해 주시겠죠. 그리고 저는...”
서아라는 차건우를 천천히 바라봤다.
“그래도 이름뿐이라도 아내인데요. 그 정도 자격은 있지 않나요? 자기 남편 이름으로 정산해도.”
서아라의 말이 떨어지자 매장 안은 순식간에 술렁였다.
“잠깐, 뭐라고? 차건우 씨 아내라고?”
“헉, 지금 그 여자가 차건우랑 결혼한 사이였다고?”
“그 남자 최근에 여자랑 스캔들 나지 않았어? 결혼은커녕 싱글인 줄 알았는데?”
“그 결혼, 벌써 3년 전 얘기야. 다만 결혼식은 안 했고 외부에는 안 알렸다고 하더라고. 업계 사람 중 일부는 알고 있었지.”
“와... 그럼 아까 저 여자 대놓고 자기가 차건우의 소중한 여자라고... 그건?”
“말 다 했지, 그냥 딱 봐도 내연녀잖아. 진짜 더럽다, 남자나 여자나 똑같이.”
“안타깝다, 진짜. 정식 아내는 당당히 물건 하나도 못 사고 눈치 보면서 산 걸 고스란히 뺏기다니.”
“게다가 내가 봤어. 팔찌도 서아라가 먼저 봤는데 그 둘이 들어오자마자 가로채려고 했잖아.”
“남편은 상황도 안 보고 무조건 내연녀 편들고... 이래서 돈만 보고 결혼하면 안 되는 거야.”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차건우와 하지민에게로 쏠렸고 눈빛에는 명백한 경멸이 담겨 있었다. 그제야 차건우도 어렴풋이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지금껏 자신이 서아라를 오해했던 것이다.
차건우의 짙은 눈동자가 가늘게 좁아졌고 매서운 날카로운 시선이 하지민과 윤수아를 향해 훑고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