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화
서아라는 무표정하게 말했다.
“말해줄 생각 없어.”
차건우는 싸늘하게 받아쳤다.
“서아라, 내가 경고했지. 우리가 아직 부부인 동안 네가 다른 남자랑 스캔들 나서 태성 그룹 이미지에 문제 생기면... 그때는 나도 가만 안 있어.”
그러자 서아라는 코웃음을 쳤다.
“너는 하지민이랑 얽혀서 기사 나오는 건 괜찮고 내가 누구 좀 만나는 건 안 된다는 거야? 네가 무슨 왕이라도 돼? 너는 맘대로 해도 되고 난 아무것도 하면 안 돼? 진짜 이중잣대도 정도껏 해, 차건우.”
“지민이랑 난 아무 사이도 아니야. 너처럼 오해할 일 없거든.”
“한밤중에 남자랑 여자 둘이서 같은 방에 있으면서? 그게 아무 사이가 아니라고?”
서아라가 조소 섞인 눈빛으로 그를 노려봤다.
“장난해? 진심이야?”
잠시 침묵이 흘렀고 차건우는 억지로 입을 열었다.
“우린... 선 넘은 일 없어.”
서아라는 냉소를 흘렸다.
“그래, 너희가 뭘 했든 말든 이제 나한테 아무 상관 없어. 내가 말하고 싶은 건 딱 하나야. 남한테 뭐라고 하기 전에 네가 먼저 똑바로 해. 그래야 그 말이 최소한의 설득력이라도 생기지.”
그 말에 이어서 그녀는 더 이상 감정 섞인 말도 하지 않았다.
“네가 이혼할 마음 생기면 연락해. 그전까지는 날 구속할 생각 하지 마.”
그렇게 말한 서아라는 더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조용히 돌아서 매장을 나섰다.
서아라는 더는 쇼핑할 기분이 아니었기에 그대로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차건우, 하지민, 윤수아, 셋을 한꺼번에 마주친 건 정말이지 하루치 스트레스를 다 쏟아붓게 만들었다.
부서진 팔찌 값도 굳이 자신이 배상할 생각은 없었다. 돈만 남고 다 잃은 인생이지만 그렇다고 물러서기만 하는 호구는 아니었다. 시비 건 쪽이 먼저였던 만큼 그 책임은 차건우 쪽에서 지는 게 맞았다.
예전에는 늘 상대 눈치나 보며 비굴하게 굴었으니 결국 남편은 다른 여자한테 뺏기고 아이도 지킬 수 없었지만 지금은 달랐다. 이제 서아라는 누구를 위한 삶도 아닌, 자신을 위한 삶을 살기로 했다.
아직 집에 도착하기도 전에 서아라의 휴대폰이 울렸다. 이명희는 서아라가 전화를 받자마자 날카로운 목소리를 쏟아냈다.
“서아라, 당장 본가로 와. 지금 당장!”
서아라는 눈을 가늘게 뜨며 한 손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윤수아, 아주 빠르네. 고자질 하나는 기가 막히게 해.’
이명희에게서 받아온 지난날의 모욕과 수치가 떠오르며 서늘한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네.”
짧고 담담하게 대답한 서아라는 전화를 끊으며 차분하게 방향을 틀었다.
“지금 갑니다.”
...
차씨 저택.
이명희 앞에 앉은 윤수아는 마치 기자라도 된 듯 한껏 목소리를 높이며 있었던 일을 부풀려 전달하고 있었다.
“할머니 서아라가 얼마나 막 나갔는지 아세요? 그 비싼 팔찌 4억짜리래요. 그걸 그냥 바닥에 내던졌어요! 그 이유가 뭔 줄 아세요? 지민의 앞에서 자기가 진짜 태성 그룹 며느리라고 보여주고 싶었대요!”
윤수아는 한껏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뿐인 줄 아세요? 매장 안에 있는 사람들한테 대놓고 태성 그룹 물건 사지 말라고 선동했어요. 건우 오빠 이미지도 실추시키고 그러다가는 주가도 떨어진다고 협박했어요! 진짜 무서운 여자 같아요!”
서아라 이야기가 나오는 순간, 이명희는 이를 악물고 손을 덜덜 떨기 시작했다.
“그 재수 없는 년, 내가 처음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 지난번 연회 때도 무슨 망신을 당했는지 몰라! 우리 집안을 땅에 떨어뜨리더니 이번에는 아예 회사까지 망치려고 해? 이런 계집은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야!”
윤수아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슬그머니 속내를 꺼냈다.
“할머니... 근데 요즘 서아라 좀 이상하지 않으세요? 말투도 분위기도... 완전 달라졌던데요. 혹시 이제 진짜로... 태성 그룹 안주인 노릇을 하겠다고 마음먹은 거 아닐까요?”
그 말에 이명희의 눈빛이 더욱 매서워졌다.
“그런 허영심 가득한 계집애가 우리 집안을 이끌 그룹 사모님이라고? 말도 안 돼! 예전에 회장님이 속아서 데려왔을 뿐이야. 정신 차리고 보면 알겠지, 그 여자가 어디까지가 한계인지.”
그 이야기가 나오자 이명희의 표정은 다시금 분노로 일그러졌다.
“수아야, 너는 모르지? 애초에 서아라가 끼어들지만 않았어도 건우는 벌써 정씨 집안의 딸과 결혼했을 거야.”
“정씨 집안이요?”
윤수아는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혹시, 그 대진 그룹 말씀이세요?”
“맞아. 바로 그 톱클래스 재벌, 대진 그룹. 그 집안에서 우리 건우에 대해 알아봤다더라. 아무래도 혼담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 같아.”
윤수아는 너무 놀란 나머지 그만 속내가 튀어나왔다.
“진짜예요? 대진 그룹 같은 대단한 집안에서 우리 쪽이랑 혼담을 생각했다고요?”
그 말을 내뱉고서야 그녀는 자신이 실수했음을 깨달았다. 말투만 보면 마치 태성 그룹을 얕보는 것처럼 들렸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명희는 드물게 그 말에 발끈하지 않고 오히려 고개를 꼿꼿이 들며 자부심에 찬 어조로 말했다.
“우리 태성 그룹이 대진 그룹만큼 대기업은 아니지만 이 나라에서 손꼽히는 집안이라는 건 변함없어. 게다가 우리 건우, 그 능력 하나만큼은 어디에 내놔도 뒤지지 않지.”
“건우가 태성을 막 인수했을 당시만 해도 회사 꼴이 말이 아니었어. 안팎에서 좀 먹는 인간들 때문에 거의 부도 직전이었지. 그걸 건우가 다 바로잡았어. 지금 태성 그룹이 다시 우뚝 선 건, 다 건우의 실력 덕분이야.”
“대진 그룹보다 앞서가는 것도 시간문제일 뿐이지. 정씨 가문에서 혼담을 꺼낸 건 건우의 능력을 높이 산 거라 봐야지.”
윤수아는 고개를 연신 끄덕이며 전적으로 공감하는 눈치였다. 사실 그녀도 집안 어른들로부터 차건우에 대한 칭찬을 수도 없이 들어왔다.
“그런데...”
윤수아가 조심스레 입을 뗐다.
“그때 당시, 건우 오빠는 하지민이랑 결혼하고 싶어 했잖아요?”
이명희는 콧소리를 내며 냉소를 터뜨렸다.
“뭐, 하지민이란 애가 서아라보다는 조금 낫긴 하지. 그래도 정씨 가문 딸이랑 비교하면 한참 모자라지. 서아라랑 하지민 중에서 고르라면 당연히 하지민이지. 하지만 하지민이랑 정씨 가문 딸이라면? 말할 것도 없이 그쪽이지.”
윤수아는 문득 궁금해져 물었다.
“저... 그런데 정씨 가문 딸이 납치당한 적이 있어서 보호가 심하다고 들었어요. 이름도 안 알려졌고 공식 석상에도 한 번도 안 나왔다고... 진짜예요?”
이명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한층 진지한 표정이 되었다.
“그래. 그 애는 정말 특별 관리 대상이래. 대중은 물론, 업계 사람들조차 얼굴도 모르지. 아주 신비한 존재야.”
그러다 말끝에 이명희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그런데 말이다... 얼마 전 정윤혁이 우리 태성 그룹과 큰 협약을 하나 맺었어. 근데 우리 쪽 오래된 주주 중 한 명이 그러더라. 그 협약이라는 게 사실상 우리 쪽에 혜택을 주기 위한 거라고.”
“더 놀라운 건 뭔지 알아? 정윤혁 본인이 직접 말했대. 우리 태성 그룹과 손잡은 이유가... 자기 여동생 때문이라고.”
윤수아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건우 오빠는 결혼한 지 꽤 됐잖아요? 그런데도 정씨 가문 딸은 아직도 건우 오빠를 잊지 못한다는 거예요?”
이명희는 점점 더 뿌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우리 큰손자 말이야, 능력도 능력이지만 생긴 것도 얼마나 출중해. 어디 상류층 자제들만 그 애 좋아하나? 연예인들이랑 비교해도 안 밀릴 정도라니까.”
사실 차건우의 외모는 어디 가서도 손꼽힐 만큼 뛰어났다. 단지 얼굴만으로도 그를 좋아하는 여자가 줄을 섰을 정도였다.
윤수아는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근데... 지금은 아직 이혼 전이잖아요...”
그러자 이명희는 매서운 눈빛을 반짝이며 싸늘하게 웃었다.
“그깟 이혼? 별일 아니지. 그 여자랑 갈라놓을 방법? 나한테는 천 가지도 넘게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