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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화

이명희와 윤수아가 한창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서아라가 모습을 드러냈다. “할머니 저를 부르셨다는데... 무슨 일이시죠?” 이명희는 의자에 앉은 채로 서아라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노골적인 불쾌감을 감추지 않았다. '저 재수 없는 계집만 아니었으면 우리 건우는 이미 대진 그룹 딸이랑 결혼했을 텐데...' 요즘 서아라는 분명 많이 달라져 있었다. 예전처럼 심심하고 밋밋한 스타일이 아니라 은은한 와인빛 머리로 컬을 내고 있었다. 옷차림도 뻔한 정장 대신 강렬한 색감의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보통이라면 그렇게 화려한 옷에 사람이 눌리기 마련인데 오히려 서아라는 그 색을 더 빛나게 만드는 듯했다. 도도하고 매혹적인 분위기까지 더해져, 그 모습은 마치 눈길을 잡아끄는 요녀 같기까지 했다. 하지만 고지식한 이명희에게 그런 모습은 보기만 해도 눈에 거슬렸고 이명희는 손바닥을 탁 치며 호통을 쳤다. “태성 그룹 며느리라는 여자가 옷 하나 제대로 못 입고! 그게 사람 앞에 나설 복장이냐? 꼴불견도 유분수지! 결혼한 지 3년이나 됐는데 자식 하나 못 낳고! 우리 집은 알 하나 못 낳는 닭 같은 여자를 며느리로 둘 생각 없어!”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이명희가 소리쳤다. “당장 무릎 꿇고 조상님들께 용서를 빌어! 어서!” 옆에 앉아 있던 윤수아는 입꼬리를 슬그머니 올리며 고소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일부러 한마디 거들었다. “서아라 씨 같은 여자는 옛날 같았으면 큰일 났어요. 할머니가 이렇게 말로만 훈계하시는 것도 엄청 자비로운 거예요.” 그 말에 서아라는 윤수아를 한번 보고는 가볍게 웃었다. “할머니 아이를 낳는 건 제 혼자 힘으로 되는 게 아니에요. 결혼 전 검사에서도 저는 아무 문제 없다는 결과 받았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까지 안 생겼다면... 제 쪽 문제가 아니겠죠.” 이명희는 얼굴이 시뻘게져서 벌컥 소리쳤다. “지금 그 말은 우리 손자 몸에 문제가 있다는 거냐?” 서아라는 잠깐 망설이다가 차분히 말했다. “건우가... 애초에 못 하는 거니까요.” 이명희는 물론이고 옆에 있던 윤수아까지 말을 잃은 듯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곧 윤수아가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그건 말도 안 돼! 건우 오빠는 단지 널 건드리기 싫었던 거지, 그럴 리 없어!” “윤수아 씨, 저랑 건우는 부부예요. 3년을 함께 살았고 누구보다 제가 잘 알죠. 게다가 하지민 씨가 돌아온 지도 꽤 됐는데 둘이 맨날 붙어 다니면서도 아직도 조용하잖아요? 밤마다 같이 집 들어간다면서요. 그런데도 감감무소식이면... 무슨 뜻인지 안 봐도 뻔하죠.” 서아라는 아쉬운 듯 고개를 저었다. “결국 건우가 어떤 상태인지는... 너무 뻔하지 않나요?” 그러고는 이명희를 향해 똑바로 말했다. “할머니 저한테 화내시느라 바쁘실 게 아니라, 빨리 병원 데리고 가보세요. 더 늦으면 진짜 차씨 가문 대가 끊기겠어요.” 사실 이명희도 차건우와 하지민 사이에 뭔가 있다는 걸 모르는 건 아니었다. 하지민이 며느리로 들어오기에는 부족하다고 여겼지만 밖에서 가볍게 만나는 상대 정도라면 눈감아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건우가 아이를 가질 수 있는지 없는지, 그건 아직 확실하지 않았다. 그런데 서아라가 방금‘차씨 가문 대가 끊기겠다’라는 식으로 말하자 이명희는 순간 숨이 막힐 뻔했다. 노인에게 ‘절손’이라는 말은 그 자체만으로도 재앙이었다. 이명희의 가슴이 요동쳤고 분노로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이년이... 감히 우리 집안이 절손한다고 입에 담아?! 사람들 어디 있어! 당장 저년 족쳐버려! 그리고 저 뻔뻔한 옷도 다 벗겨! 끌어내리라고!” 이명희의 고함에 하녀 두 명이 험악한 얼굴로 다가왔다. 그 모습을 본 윤수아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손까지 달달 떨렸다. 서아라가 무릎 꿇고 울며 빌게 될 그 장면을 하지민에게 보내주고 싶어 휴대폰까지 꺼내 들었다. 하녀들은 말도 없이 손을 들어 서아라의 뺨을 내리치려 했다. 사실 이 집의 하녀들은 잘 알고 있었다. 이명희가 서아라를 얼마나 싫어하는지 그녀가 억울해도 설명하는 순간 대드는 불효녀가 되었고 기분 나쁘면 가문의 체통을 이유로 불러다 괴롭히는 건 예사였다. 차건우 역시 한 번도 막아선 적 없었다. 그 분위기에서 하녀들은 대놓고 서아라를 무시하고 은근히 괴롭혀왔다. ‘가정 규율’이라는 이름 아래 주먹을 휘두르며 서아라의 온몸을 멍투성이로 만든 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서아라는 다가오는 하녀 한 명의 손목을 단단히 틀어잡고는 그 팔을 꺾듯 낚아챘다. 그리고 주저 없이 정통으로 뺨을 올려붙였다. “짝!” 다른 하녀는 그대로 그녀의 발에 걸려 중심을 잃고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쿵!” 그 짜릿하게 울린 뺨 소리와 무겁게 쓰러지는 소리에 이명희와 윤수아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서아라는 싸늘한 눈빛으로 방 안을 천천히 훑고 다시 하녀들을 내려다보며 차갑게 입을 열었다. “지금이 무슨 시대인데 사적인 폭력을 휘둘러? 법도 없고 규율도 없고 감히 어디서 그런 짓을 해?” ‘누가 그런 짓을 시켰냐’는 말은 굳이 입에 올리지 않아도 누구나 알고 있었다. 이명희는 당황한 얼굴로 숨을 몰아쉬며 손가락을 떨고 서아라를 가리켰다. “너... 너 이 못된 년... 감히 내 사람한테 손을 써? 이런 불효막심한 계집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이명희는 갑자기 숨이 막힌 듯 눈을 뒤집더니 그대로 기절해 쓰러졌다. “할머니!” 윤수아가 깜짝 놀라 달려갔다. “할머니! 정신 좀 차리세요!” “119 불러요! 빨리요! 할머니가 쓰러지셨어요!” 차씨 저택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 그날 밤, 서아라는 막 샤워를 마치고 나와 머리를 말리려던 참이었다. “쾅! 쾅! 쾅!”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거칠게 울려 퍼졌고 문짝이 울릴 정도로 심하게 두드려댔다. 서아라는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모니터를 들여다봤다. 차건우가 이곳까지 찾아온 건 전혀 놀랄 일도 아니었다. 여긴 S시였고 그가 사람 하나 못 찾아낼 리 없었으니까. 잠시 고민하다가 서아라는 조용히 문을 열었다. 어두운 복도 불빛 아래, 차건우의 얼굴이 서늘하게 드러났다. 조각처럼 뚜렷한 이목구비였지만 그 안에 담긴 분위기는 더없이 차가웠다. 서아라는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이혼 얘기하러 온 거야?” 차건우는 말없이 안으로 발을 들이밀었고 그 눈빛이 단단하게 그녀를 꿰뚫고 있었다. “서아라, 너 진짜 죄책감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냐?” 서아라는 눈썹을 살짝 올리며 되물었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 차건우의 입술이 일직선으로 다물렸고 검은 눈동자는 얼음처럼 싸늘하게 빛났다. “할머니가 너 때문에 심장병 재발해서 병원에 실려 가셨어.” 서아라는 감정 없는 목소리로 답했다. “그래서?” 그 한마디에 차건우의 얼굴빛이 한층 더 어두워졌고 목소리도 낮고 싸늘했다. “지금 당장 병원 가서 사과해. 할머니가 용서하실 때까지 거기 있어.” 서아라는 코웃음을 지었다. “내가 뭘 잘못했는데? 때렸어? 욕했어? 할머니가 혼자 흥분해서 쓰러지신 건데 그게 왜 내 잘못이야?” 차건우는 영상이라도 본 듯한 얼굴로 그녀를 노려봤다. “하녀들 때린 영상, 봤어. 그걸 보고도 잘못한 거 없다고 할 거야?” 차건우의 말투에는 냉기가 서려 있었다. “나한테 관심 끌고 싶었으면 다른 방법을 쓰지 그랬냐. 아무리 그래도 선 넘는 짓에는 대가가 따르는 거야. 넌 지금 그 선을 넘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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