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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화

“대가?” 서아라는 비웃듯 말했다. “도대체 어떤 대가가 하녀들 옆에서 허드렛일하고 별 이유도 없이 가정 규율이랍시고 맞고 욕먹고 굶는 것보다 더 끔찍하겠어? 할머니 눈 밖에 나기만 하면 밥도 못 먹고 방에 가둬놓고 때리기까지 하잖아. 그걸 다 참아가며 하녀들한테도 멸시당하면서 살아야 하는 게 바로 ‘태성 그룹 며느리’라는 자리야.” 서아라는 눈앞의 차건우를 똑바로 바라보며 붉은 입술에 온기 없는 미소를 지었다. “할머니 기분이 좋으면 가끔은 남긴 밥을 하녀들을 통해 던져줘. 내가 그걸 안 먹으면 ‘음식 아깝게 만드는 죄인’에다 ‘집안 말아먹는 계집’이 돼.” 그렇게 수치스럽고 모욕적인 날들을 견뎌낸 것도 언젠가는 이명희가 자신을 인정해 줄 거란 기대 때문이었다. 하지만 결국 돌아온 건, 더 심해진 멸시와 가혹함뿐이었다. 차건우는 말없이 굳은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 사실 그는 한 달에 집에 겨우 한두 번 들를까 말까 했고 들르더라도 늘 일 이야기만 하다가 금방 나가버렸다. 이명희가 서아라를 어떻게 대했는지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때 서아라가 그의 귓가에 얼굴을 가까이 댔다. 젖은 머리카락에서 은은한 샴푸 향이 퍼져 나왔고 그 눈빛은 놀랍도록 날카롭고 빛났다. “태성 그룹에서 내가 가진 자리는 강아지만도 못했어. 만약 네가 나였다면 사과했겠니?” 차건우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녀를 바라봤다. 분명 익숙한 얼굴인데 지금 그녀는 전혀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지금의 서아라는 분명히 그가 알던 순한 아내가 아니었다. 그리고 차건우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 여자가 지금 그의 눈길을 사로잡고 있다는걸. “이게 네 목적이야?” 차건우는 그녀의 턱을 움켜쥐며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엔 묘한 감정이 섞여 있었다. “날 유혹하려는 거냐?” 세 사람이던 부부 생활. 그 오랜 시간 동안, 서아라는 누구보다 차건우의 눈빛이 뭘 의미하는지 그가 지금 감정을 참지 못하고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자기가 자제 못 하는 주제에 책임은 꼭 여자한테 돌리더라. 남자라면 그딴 짓 좀 하지 마. 진짜 없어 보여.” 차건우의 눈이 가늘게 좁아졌고 말없이 웃고 있는 그의 표정 속에는 분명 위험한 기운이 서려 있었다. 그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묻듯 말했다. “할머니 앞에서 날 못 한다고 한 게... 유혹이 아니라 도발이었던 거냐?” 그리고 그 말과 동시에 그녀를 벽으로 밀쳐 세웠다. 그리고 하얗고 고운 서아라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낮게 속삭였다. “만약 그게 네 의도였다면... 서아라, 성공했어.” 그리고 차건우는 고개를 숙이며 그녀에게 입을 맞추려 했다. 그 순간, 서아라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지며 놀라움을 드러냈고 차건우의 입술은 그녀의 입술 대신 볼에 닿았다. 차건우는 그 자리에 멈춰 섰고 곧 깊은 장난기와 비웃음을 담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낮엔 날 못 한다고 욕하고 밤엔 또 일부러 피하고... 아직도 장난칠 기분이야, 서아라?” 두 사람의 거리는 숨결이 느껴질 만큼 가까웠고 자세도 어쩐지 위험했다. 예전 같았으면 서아라는 가슴이 벅차올랐겠지만 지금은 오히려 불쾌함만 밀려들었다. 차건우가 늘 무미건조하게 대하던 모습과 달리, 지금의 시선과 손길은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 서아라는 냉정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너희 할머니 지금 병원에 누워 있는데 넌 여기서 이딴 짓이 나와? 할머니가 이 꼴 보면 또 쓰러지겠네?” 차건우가 대꾸할 틈도 없이 휴대폰이 울렸고 화면을 본 그는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서아라는 그 이름을 확인하고는 피식 웃으며 비꼬았다. 차건우는 그녀의 눈빛에서 스친 조소를 느꼈고 그대로 그녀를 놓고 전화를 받았다. “건우야, 지금 어디야?” 하지민의 목소리는 나긋하고 조심스러웠다. “무슨 일인데?” “할머니 방금 깨어나셨는데 너무 예민하셔. 나랑 수아가 아무리 말려도 진정이 안 돼. 건우 씨가 와줘야 할 것 같아.” “알겠어.” 전화를 끊은 차건우는 다시 서아라를 바라봤다. “방금 네가 한 말들, 다 거짓이었다는 거 알게 되면... 절대 가만 안 둘 거야.” 차건우의 눈빛에서 흔들림은 사라지고 다시 익숙한 싸늘함만 남아 있었다. 그러자 서아라는 오히려 여유롭고 도발적인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뭐 어쩔 건데? 먼저 손댄 건 하녀들이고 난 정당방위였어. 신고하고 싶으면 해보지 그래? 기대한 만큼 실망하게 될지도 몰라.” 그녀는 천천히 다가서며 낮게 속삭였다. “윤수아가 영상 찍었지? 뭐, 그걸 편집해서 올리든 말든 상관없어. 나도 마음만 먹으면 내가 당한 일들 전부 세상에 털어놓을 수 있거든. 사람들이 얼마나 궁금해하겠어. 재벌가 며느리의 진짜 일상 말이야.” 차건우는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그가 마음만 먹으면 저택의 모든 CCTV를 확인할 수 있지만 지금껏 단 한 번도 그녀에게 관심을 가진 적은 없었다. 그리고 지금 그 무관심이 이렇게까지 쓰라리게 느껴지긴 처음이었다. 잠시 후, 차건우는 마지막으로 서아라를 바라보고는 말없이 돌아서 집을 나섰다. ... 차건우는 끝내 서아라에게 다시 연락하지 않았다. 아마 그녀가 한 말이 전부 사실이라는 걸 확인한 모양이었다. 그렇게 모든 게 조용히 정리되는 듯했다. 며칠 후, 서아라는 정윤혁에게서 전화를 받았다. “아라야, 계약 관련 서류는 다 검토했지? 나 내일 네 임명 소식 공식 발표하려고.” 서아라는 넘기던 서류에서 손을 멈추었다. “벌써?” “빠르면 좋지 않아? 이혼하기 전에 이 프로젝트 마무리 짓자. 그러면 더는 차건우랑 얽힐 일도 없을 테니까. 아니 혹시라도 계속 엮이고 싶은 마음이 있는 건 아니겠지?” 정윤혁의 말은 농담처럼 들렸지만 속뜻은 뻔했다. 책임 회피 겸 핑계를 대는 거란 걸 서아라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굳이 짚고 넘어가지 않고 담담히 대답했다. “좋아.” 잠시 뒤, 정윤혁이 다시 입을 열었다. “며칠 전... 또 차건우 할머니가 너한테 뭐라고 한 거 맞지?” 서아라는 무표정하게 말했다. “이미 해결됐어.” “내가 들은 바로는 그 여자가 네 신분이 어쩌니 배경이 어쩌니 하면서 사람 많은 데서 험한 말도 했다던데?” 서아라는 잠시 침묵했다가 조용히 말했다. “이젠 다 지난 일이야.” 그러자 정윤혁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아라야, 네가 지금까지 참고 견뎌온 거... 내가 절대 그냥 넘기지 않을 거야.” 서아라는 더는 말을 잇지 않았다. “그 얘긴, 이혼하고 나서 하자.” 전화를 끊은 정윤혁은 비서에게 지시를 내렸다. “내일 행사 진행 상황 다시 한번 체크해. 그리고 꼭 직접 초대장 들고 이명희 여사님이랑 차건우한테 전달해. 알겠지?” 비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혹시... 내일 대외적으로 아라 씨의 신분을 공개하실 생각인가요?” 정윤혁은 가볍게 웃었다. “서아라가 그동안 차씨 집안에서 얼마나 무시당했는데. 정체도 배경도 없다고 말이야. 그 집안 사람들은 아라 뒤에 든든한 가족 하나 없으니까 함부로 군 거라고. 이젠 아라가 이혼하겠다고 결심한 이상, 그 집안 체면 따져줄 필요도 없지.” 비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아라 씨가 그동안 너무 조용하게 지내셨어요. 이제는 얕잡아본 사람들한테 본때를 보여줄 때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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