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화
밤 8시.
정윤혁의 초대를 받은 차건우는 이명희, 하지민, 그리고 정윤혁 여동생과 친해지고 싶어 하는 윤수아까지 데리고 연회장에 도착했다.
평소에는 인상부터 날카로운 이명희의 얼굴에도 드물게 미소가 떠올랐다.
그녀는 차건우를 돌아보며 당부했다.
“이번 연회에 정윤혁 여동생도 나온다더라. 너, 오늘 진짜 잘 보여야 해. 정 여사댁 따님한테 좋은 인상 줄 수 있도록 애써봐야지.”
그 말에 하지민은 순간 표정이 굳었고 차건우 역시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할머니 저 아직 결혼 안 끝났어요.”
이명희는 아예 대수롭지 않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결혼이 뭐 대수냐? 길어봤자 석 달 안에 이혼할 거 아니냐? 그 전에 정 여사댁 따님이랑 인연 만들어놔야지. 이혼하면 바로 데려올 수 있게 말이야.”
그 당연하다는 말투는 마치 마음만 먹으면 누구든 데려올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윤수아는 이미 이명희의 계획을 알고 있었기에, 조심스럽게 하지민의 얼굴을 살폈다.
차건우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이혼한다고 해도 정 여사댁 따님과 결혼할 생각은 없어요.”
이명희는 마치 답답하다는 듯 혀를 찼다.
“어디서 그런 말을 하냐! 정 여사댁이 어떤 집안인지 몰라서 그래? 우리나라 손꼽히는 대재벌이야! 네 능력 내가 잘 알지만 아무리 뛰어나도 발휘할 무대가 있어야 하잖니! 그쪽 집안하고 혼인하면 정 여사 측에서 든든하게 지원해 줄 테고 네 능력이면 앞으로 5년 안에 태성 그룹도 세계적인 대기업으로 키울 수 있어. 얼마나 시간을 아낄 수 있는데? 게다가 말이다, 정 여사댁 따님도 네게 관심 있어 보이더라. 이런 기회 흔치 않아. 무조건 잡아야 해.”
차건우는 짧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할머니 저는 그분을 만난 적도 없습니다. 그분이 저한테 호감을 있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예요.”
이명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네가 못 봤다고 해서 그쪽도 널 못 봤다고는 못하지. 예를 들어, 이번 정윤혁이랑 진행 중인 사업 말이야. 아무 이유도 없이 그런 좋은 조건을 우리한테 줄 것 같아?”
차건우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사실, 그들의 계약 조건은 이상할 정도로 호의적이었다. 협력이라기보다 혜택을 주는 수준이었으니까.
무엇보다, 정씨 가문 측과는 지금까지 아무런 인연도 없었는데 말이다. 이명희는 말을 이어갔다.
“건우야, 내가 듣기로는 정윤혁이 직접 말했대. 자기 여동생 때문에 태성 그룹을 특히 챙긴 거라고 말이야. 너는 그분이 너한테 관심 없다고 생각하겠지만... 진짜 그렇게 믿는 거야?”
그 순간, 지금껏 입을 다물고 있던 하지민이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할머니 요즘 서아라가 자꾸 건우한테 관심 끌려고 별수를 다 쓰고 있어요... 그런 사람이라면 쉽게 이혼해 줄 것 같지 않은데요?”
하지민의 말에 서아라를 떠올린 이명희는 얼굴부터 굳어졌다.
“결국 돈이 목적 아니겠어? 이혼할 때 위자료만 넉넉하게 주면 조용히 떨어질 거야. 그런데 만약 그 계집이 우리 건우 인연 방해라도 하면...”
이명희의 눈에 살기가 스쳤다.
“그때는 절대 가만 안 둘 거다. 아주 본때를 보여줘야지.”
얼마 전 자신을 병원 신세 지게 만든 서아라에 대한 분노가 다시 치밀어 오르고 있었다. 자식 하나 못 낳는 주제에 말은 얼마나 잘하는지, 결국 자신을 모시는 하녀 둘까지 내쫓게 만들었으니 이를 갈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네 사람이 연회장 안으로 들어서자 여기저기서 웅성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들었어? 정윤혁이 이번에 새로운 지사장으로 어떤 여자를 데려왔는데 그 사람한테 Z국 지사를 통째로 맡길 거라더라.”
“진짜야? 루머 아니야? 대진 그룹은 직원 뽑을 때도 명문대 따져가면서 뽑는다잖아. 지사장급이면 말도 못하게 까다로울 텐데.”
“오늘 이 연회도 그 사람을 위한 환영식이래. 정윤혁이 그 사람한테 꽤 신경 쓰는 모양이야.”
“그런데 이 연회, 겉으로는 지사장 환영회라지만 실은... 정윤혁 여동생을 대외적으로 소개하려는 자리래.”
“여동생? 그 정 여사댁 따님? 걔 완전 신비주의잖아? 한 번도 공식 석상에 안 나온 애잖아.”
“응, 이름조차 공개한 적 없대. 오늘 처음 얼굴 비추는 거라더라.”
“진짜 궁금하다. 어떤 사람일까?”
사람들의 수군거림은 그대로 이명희, 차건우, 하지민의 귀에도 들려왔다.
이명희는 한껏 흐뭇한 얼굴로 말했다.
“건우야, 할미 말이 틀리지 않았지? 정윤혁이 저 아이를 데리고 나왔다는 건, 널 보여주고 싶다는 뜻이야. 분명히 말이야.”
이명희는 이 기회에 더 얘기를 하려다가 그만 아는 사업가들이 차건우에게 다가오며 인사를 건넸다. 그 사이 이명희는 입을 닫고 한발 물러섰다. 이명희는 더 이상 차건우를 방해하지 않고 이번에는 옆에 앉아 있던 하지민을 돌아보며 말했다.
“지민아, 네가 건우한테 마음 있는 거 할미가 모르는 것도 아니란다. 하지만 너도 알다시피 남자는 일에 전념해야지, 애정에만 매달려선 안 되지 않겠니?”
그러고는 그녀의 손등을 다정하게 토닥였다.
“건우랑 계속 잘 지내는 건 나도 말리지 않아. 나중에라도 아이 하나라도 낳아주면...”
말을 잠시 끊고 이명희는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혼외자라도 상속은 받을 수 있는 거니까. 수아야, 너랑 지민이는 친하잖니? 틈날 때마다 잘 좀 도와줘라.”
그 말에 하지민의 얼굴이 굳어졌고 윤수아가 몰래 그녀의 소매를 잡아끌자 하지민은 억지로라도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할머니.”
3년 전, 하지민은 태성 그룹에 시집오기 위해 이명희에게 온갖 아양을 떨었다. 마침내 이명희의 허락을 받아낼 즈음, 서아라가 느닷없이 튀어나와 그 자리를 빼앗아 갔다. 그리고 겨우겨우 기다린 끝에 이제야 이혼 얘기가 나오기 시작했는데 이번에는 또 정윤혁의 여동생이라니.
하지민은 고개를 살짝 떨군 채, 눈빛 속의 음산한 기색을 감췄다.
‘태성 그룹의 안주인 자리는... 반드시 내가 가져야 해.’
…
그 시각, 서아라는 단정한 검은 드레스를 입고 정윤혁의 팔짱을 낀 채, 연회장에 들어섰다. 그 둘이 입구에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정윤혁과 인맥을 맺고자 하는 인사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그 분위기는 마치 기자회견장을 방불케 할 정도였다.
“정 대표님, 이분이 혹시 여자 친구분이신가요? 정말 아름다우시네요. 두 분 너무 잘 어울리세요!”
“아이고 무슨 소리예요?”
말을 건네던 사람이 황급히 상대를 말렸다. 어딘가서 미리 소문을 들은 듯했다.
“이분은 정 대표님의 여동생이시잖아요?”
“진짜예요? 여동생이라고요?”
“정 대표 여동생은 지금껏 공개 석상에 한 번도 나온 적 없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이름조차 공개된 적 없다던데?”
“와, 진짜 궁금하다. 정 대표 여동생이라니... 어떤 분이실까?”
그런 웅성거림은 이명희와 하지민의 귀에도 고스란히 들어왔다. 이명희는 흡족한 미소를 띠며 차건우를 불렀다.
“건우야, 저기 정 대표 여동생이랑 같이 왔단다. 얼른 가서 인사드려.”
태성 그룹과 그렇게 큰 프로젝트를 함께 진행 중인 만큼, 인사를 건네는 게 예의였다. 차건우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긴 다리를 뻗으며 사람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 사람들 사이로, 검은 드레스를 입은 한 여인의 모습이 언뜻언뜻 눈에 들어왔다. 군더더기 없는 우아한 실루엣과 매혹적인 분위기, 틈새로 보이는 그 모습만으로도 단번에 시선을 사로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