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화
“아야!”
그 순간, 하지민이 갑작스레 짧은 비명을 터뜨렸다. 차건우는 발걸음을 멈추고 곧장 하지민을 돌아봤다.
“지민아, 왜 그래?”
하지민은 눈가가 붉어진 채 바닥에 주저앉았다. 발목을 부여잡은 그녀의 얼굴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건우야... 나... 발을 좀 삐끗했나 봐...”
차건우의 시선이 하지민의 발목으로 향했고 실제로 발목이 벌겋게 부어올라 있었다.
하지민은 억지로 웃으며 그를 다독였다.
“괜찮아, 나 신경 쓰지 말고... 얼른 정 대표님이랑 그 분께 인사드리러 가. 이 정도는 혼자 괜찮아.”
그 말에도 차건우는 그녀의 안색을 살피며 낮고 단호하게 말했다.
“아니야. 먼저 치료부터 받자.”
이명희가 인상을 찌푸리며 나섰다.
“건우야...”
하지만 차건우는 단호하게 말을 잘랐다.
“할머니 사람 다친 게 더 급하죠. 게다가 저 사람들 사이로 들어가기도 어려워요.”
실제로 입구는 사람들로 빽빽하게 막혀 있었다. 이명희도 한 번 둘러보더니 더는 말하지 못하고 차건우가 하지민을 부축하자 마지못해 함께 빠져나갔다. 혼자서 인사를 하러 가는 건 아무래도 체면이 서지 않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
하지민을 안정시켜 놓은 뒤, 차건우와 이명희는 다시 연회장으로 돌아왔지만 정윤혁과 그의 여동생은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정윤혁은 급한 볼일이 생겨 자리를 비웠고 곧 돌아올 거라는 말이 돌아왔다.
그제야 이명희도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들이 연회장에 다시 들어서자마자 윤수아가 살금살금 그 뒤를 따라 나왔다.
윤수아는 하지민을 위해 정보를 캐보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마침, 복도 끝 어딘가에서 남녀의 대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아라야, 본사 쪽에 문제가 좀 생긴 것 같아. 나 먼저 처리하고 금방 갈게.”
“응, 다녀와.”
여자의 목소리는 너무나 익숙했고 윤수아는 단번에 그것이 서아라의 목소리임을 알아챘다.
‘남자는 누구지?’
몰래 복도 모퉁이에 몸을 숨기고 고개를 살짝 내민 윤수아의 눈에 믿을 수 없는 광경이 들어왔다.
‘정윤혁? 서아라랑 정윤혁이 함께 있다니? 혹시... 정윤혁 여동생이 서아라?’
윤수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말도 안 돼. 성도 다르고 애초에 남매일 리가 없잖아. 그럼 서아라가 태성 그룹 며느리라는 걸 내세워서 억지로 정윤혁에게 접근해서 이번 연회에 끼어든 건가?’
그렇게 생각하자 윤수아는 숨을 죽이고 서아라의 뒤를 몰래 따라붙었다.
서아라는 곧장 연회장 뒤편, 야외 정원 쪽으로 향했다.
은은한 오렌지빛 조명이 켜진 정원, 잔잔하게 빛을 머금은 수영장이 눈앞에 펼쳐졌다. 서아라는 조용히 걸어가 정원 가장자리에 서서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서아라는 이런 공식적인 자리가 몹시 피곤했다. 조금 전 잠깐 웃으며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었을 뿐인데도 이미 입꼬리가 뻣뻣하게 굳어갈 정도였다.
게다가 아까, 정윤혁에게서 오늘 그녀의 정체를 공개할 생각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마음이 복잡해지기도 했다.
정씨 가문은 워낙 방대한 재산과 영향력을 가진 집안이었고 그녀와 정윤혁 모두 납치 사건을 겪은 적이 있었다. 그 일을 계기로 가족들은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 서씨 성을 따르게 했고 그 후로는 대외적으로 철저하게 신분을 감춰온 것이다.
하지만 이제, 그녀는 더는 숨을 필요가 없었다. 이젠 스스로 자신을 지킬 수 있을 만큼 강해졌고 앞으로는 정윤혁을 도와 정씨 가문의 일부 사업도 책임질 터였다.
그래서 숨기기보단 드러낼 때가 왔다고 판단한 것이다.
“서아라 씨.”
익숙한 여성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서아라가 고개를 돌리자 연한 하늘색 원피스를 입은 윤수아가 팔짱을 낀 채 서 있었다. 턱을 치켜들고 눈을 치켜뜬 표정은 여전히 오만하고 위압적이었다.
“여긴 어떻게 오셨어요?”
서아라가 의아한 듯 물었다.
윤수아는 턱을 더욱 치켜들며 코웃음을 쳤다.
“건우 오빠 따라서 왔죠. 당연한 일 아닌가요?”
서아라는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정윤혁은 연회에 차건우가 올 거라는 말을 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그 짧은 순간, 그녀는 금세 상황을 파악했다.
‘윤혁 오빠가 설마 이 자리를 이용해 일부러 차건우에게 보여주려는 건가?’
서아라는 조용히 관자놀이를 눌렀다. 이런 유치한 방식까지 쓰게 될 줄은 몰랐기에 한편으로는 한숨이 나왔다.
윤수아는 비웃듯 입꼬리를 올리며 눈빛에 노골적인 악의를 담아 말을 이었다.
“건우 오빠 보러 오신 거예요? 헛수고였어요. 방금 지민이가 발을 삐끗해서 건우 오빠가 약 발라주고 있거든요. 지금 서아라 씨 신경 쓸 겨를 없을걸요?”
그러고는 더 날 선 말투로 덧붙였다.
“이젠 확실히 아셨겠죠? 건우 오빠 마음속에 제일 중요한 사람은 언제나 지민이예요. 괜히 욕심부리지 마세요. 서아라 씨처럼 배경도 없고 정체도 불분명한 분은 그 자리에 어울리지도 않아요.”
서아라는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렇다면 묻고 싶은 게 하나 있는데요. 그렇게 중요한 분이라면 왜 굳이 저와 결혼하셨을까요?”
윤수아의 얼굴이 일그러지며 목소리가 한층 더 날카로워졌다.
“서아라 씨가 치졸한 수 쓰신 거 아니었어요? 건우 오빠 방에 먼저 들어간 거, 다들 알고 있어요. 그렇게까지 안 했으면 결혼은커녕 말도 못 꺼냈겠죠.”
“어떤 방식이었든, 결혼한 건 사실이에요. 이혼 서류에 도장 찍기 전까지, 하지민 씨는 그냥 남의 남편을 넘보는 사이일 뿐이죠.”
서아라는 오늘 하이힐까지 신어 윤수아보다 한참 키가 컸다. 고개를 숙이지도 않은 채, 여유로운 표정으로 윤수아를 내려다보았다. 따로 강하게 말하지 않아도 그 기품 있는 눈빛과 분위기만으로 이미 윤수아를 압도하고 있었다.
그런 서아라의 분위기에 윤수아는 호흡이 잠깐 멎는 듯, 말을 잇지 못했다.
서아라는 더 이상 상대할 마음도 없는 듯, 말없이 돌아서 걸음을 옮겼다.
그 모습에 윤수아의 표정은 금세 일그러졌다. 억눌린 분노가 순식간에 끓어올랐고 결국 그녀는 이성을 잃은 채 팔을 뻗어 서아라를 그대로 수영장으로 밀어 넣었다.
“풍덩!”
거센 물보라가 사방으로 튀었고 찬물이 서아라의 전신을 삼켜버렸다.
물속에 잠긴 순간, 서아라는 몸이 굳었다. 유람선에서 바다에 빠졌던 그날, 모두가 멈춰 있던 그때 유일하게 뛰어든 사람이 차건우였다. 그 일이 있은 후, 그녀는 처음으로 차건우를 사랑하게 됐다. 물은 아직도 그녀에게 트라우마로 남아 있었다.
그 순간, 수영장 바깥에서 윤수아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 그러나 그 표정은 오히려 깊은 악의로 가득 차 있었다.
“어머, 서아라 씨! 갑자기 뛰어내리신 건가요? 설마... 수영하시려던 거예요?”
뒤늦게 몇몇 사람들이 다가와 상황을 살폈다.
“무슨 일이에요? 누구 물에 빠진 거예요?”
윤수아는 황당하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빠지긴요. 이 수영장 물 깊이도 얼마 안 돼요. 그냥 서 있어도 되는 수준인데 서아라 씨가 물에서 허우적거리며 난리를 치시네요. 아무래도 연기 연습 중이신가 봐요.”
그러고는 비꼬듯 말했다.
“이 정도면 주연상감이네요.”
윤수아는 느릿하게 말했다.
“저 여자요, 차건우 씨 아내예요. 저렇게 매번 울고불고 호들갑 떨어서 건우 오빠 관심 끌려는 수작, 제가 몇 번이나 봤는지 몰라요. 오늘도 그 수법인가 보죠.”
물속에서 허우적거리던 서아라는 점점 숨이 차오르며 정신이 몽롱해졌다. 차가운 물이 폐 속까지 밀려 들어오는 느낌은 공포 그 자체였다.
서아라가 점점 더 망가져 가는 모습에 윤수아의 눈빛은 마치 빛이라도 발하는 듯, 흥분으로 가득 찼다.
“지나가던 분들 그냥 가지 마세요! 여기 진짜 대박 구경거리 있어요. 존재감 얻겠다고 물에까지 뛰어드는 사람 처음 봤죠? 얼마나 필사적인지, 이 정도면 정말 웃기지도 않아요!”
윤수아의 과장된 외침에 정원을 지나던 사람들까지 모두 몰려들었다.
어두운 밤, 흐린 조명 아래 물속에서 허우적대는 서아라의 모습은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고 사람들이 그녀를 아까 그 ‘정 대표님 동행 여성’과 연결 짓지도 못했다.
윤수아는 계속 헛소문을 더해갔다. 그러자 사람들의 표정이 하나둘씩 찌푸려지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들었어요? 차건우 씨가 저 여자랑 결혼한 거, 억지로 떠밀려서였대요. 집안이랑도 안 맞고 무슨 술수 써서 억지로 결혼했다더라고요.”
“하지민 씨가 훨씬 낫죠. 집안은 좀 부족할지 몰라도 인성은 참 반듯하잖아요. 건우 씨 첫사랑이기도 하고.”
“아무리 억울하다 해도 이렇게까지 물에 빠져서 사람들 앞에서 쇼를 벌이면 어떡해요? 자기 얼굴에 먹칠하는 거잖아요.”
사람들은 구경하듯 수영장 가장자리에 모여들었고 모두가 입을 모아 웅성댔다. 하지만 아무도 서아라를 구하려는 사람은 없었다.
얼음처럼 차가운 물은 끝없이 서아라의 입과 코를 파고들었고 서아라는 점점 의식을 잃어갔다. 그때 누군가가 작게 말했다.
“어? 눈동자... 흰자만 보여. 이거... 진짜 익사하는 거 아니야?”
윤수아는 피식 웃으며 비꼬았다.
“저 여자는요, 그냥 타고난 배우네요. 연기력이 저 정도면 당장 드라마 주연해도 되겠어요.”
그러나 서아라는 이제 더는 몸을 움직이지 못했다. 손이 힘없이 축 늘어졌고 이내 물속 아래로 천천히 가라앉았다.
그 광경을 본 사람들 사이에서 순간 웃음이 멈췄고 긴장감이 감돌았다.
“설마... 진짜 수영 못 하는 건가?”
“진짜... 여기서 익사라도 하면 큰일인데...”
아무리 구경하고 싶어도 사고가 나면 분위기는 완전히 달라질 수 있었다.
“그냥 장난일까... 진짜 죽을 수도 있겠다...”
그 순간, 수영장 쪽으로 걸어오던 차건우와 하지민이 조용한 정원에 사람들이 몰려 있는 걸 보고 다가왔다. 차건우는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무슨 일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