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4화

서아라는 잠시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어쨌든 내가 그 사람 아내인 건 사실이니까. 임유성이 한 짓은 결국 차건우를 한 방 먹인 거나 다름없잖아. 아무리 감정이 다 식었다고 해도 어떤 남자든 자기 아내가 다른 남자한테 그런 식으로 모욕당하면 못 참지.” 정윤혁은 그녀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다. “그런데 임유성 같은 사람이 공개적으로 사과한 걸 보면 차건우가 임씨 가문에 꽤 큰 압박을 넣은 모양이야. 이제 다들 너 건드리고 싶어도 쉽게 덤벼들지 못할걸.” 서아라는 별다른 반응 없이 담담했다. 정윤혁이 다시 물었다. “아라야, 너 진짜로 차건우에 대한 마음 다 정리된 거야?” 정윤혁은 서아라가 한때 차건우 때문에 가족과의 인연까지 끊었던 일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그토록 깊고 격렬했던 감정이 그렇게 쉽게 사라질 리 없다고 생각했다. 서아라도 그런 정윤혁의 의도를 모를 리 없었다. 그녀는 관자놀이를 지그시 누르며 말했다. “그때 집안이랑 인연 끊은 게 꼭 차건우 때문만은 아니야... 솔직히 말하면 그 거대한 사업을 물려받아서 매일 기계처럼 일만 하는 삶 자체가 버거웠어.” 당시 그녀는 말 그대로 일에 치여 사는 삶을 살고 있었다. 사회생활이랄 것도 없이 하루 종일 일만 하며 버텼고 그저 그렇게 보내는 날들의 반복이었다. 그런 와중에 집에서 여유롭게 지내는 현모양처들이 눈에 밟혔고 부럽기까지 했다. 심지어 생일날에는 언젠가 자신도 그런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라며 조용히 소원을 빌기도 했다. 하지만 현실은 냉정했다. 현모양처로 사는 건 회사에서 일하는 것보다 훨씬 더 고된 일이었다. 결국 서아라는 차라리 다시 일을 시작해서 스스로 돈을 벌어야겠다고 마음을 굳혔다. 정윤혁은 가볍게 웃으며 그 주제에 더 이상 집착하지 않고 말을 돌렸다. “내가 보기엔 요즘 차건우 태도가 좀 달라진 것 같은데... 설마 이젠 이혼하기 싫어진 걸까?” “그건 아니야.” 서아라는 냉소를 흘리며 말했다. “차건우는 아마 지분 다 챙기기 전까진 조용히 넘어가고 싶을 거야. 내가 계속 이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