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화
병원에 있는 며칠 동안, 한서준은 병실에 와도 늘 몇 분 머물지 않고 금세 나가 버렸다.
다시 병실 문이 열렸을 때, 한서준의 셔츠 칼라 사이로 제대로 가리지도 못 한 붉은 자국들이 어렴풋이 보였다.
나는 힐끗 보기만 하고 시선을 바로 창밖으로 돌렸다.
한서준은 나의 시선을 눈치챘는지 어색하게 손을 들어 셔츠를 정리하면서 딱딱한 말투로 말했다.
“요즘에 모기가 많은가 봐. 심하게 물렸어.”
‘저런 자국을 두고, 무슨 모기가 물었다고 둘러댈 수 있을까.’
한서준은 변명조차 성의 없이 대충 핑계를 댔다.
숨이 막힐 만큼 병실 공기가 무거워졌다.
말없이 옆모습만 보이는 나를 한서준이 잠시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이상하다는 듯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그러다 잠깐 생각에 잠기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한쪽으로 가 전화를 걸었다. 말투에는 짜증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정초아가 마지못해 끌려오듯 병실로 들어왔다. 얼굴에는 오기와 불만이 그대로 쓰여 있었다.
“너 때문에 교통사고가 났어. 사과해.”
한서준의 목소리는 차갑고 단단했다.
정초아는 입을 삐죽 내밀며 내 침대 앞에 멈춰 섰다. 시선은 여기저기 흔들리고 대충 중얼거리듯 말했다.
“미안해.”
“태도가 그게 뭐야. 똑바로 말해.”
한서준이 낮게 호통쳤고, 눈빛에는 거역하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경고가 또렷하게 박혀 있었다.
정초아는 어깨를 움찔하며 몸을 조금 웅크렸다. 억지로 표정을 가다듬었지만 눈빛 깊은 곳의 경멸은 조금도 가려지지 않았다.
가사도우미가 건네준 생선탕 그릇을 받아 들고 내 쪽으로 내밀었다.
“하린 언니, 그날은 내가 좀 흥분해서 그랬어. 이거... 몸보신이라도 좀...”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손목이 홱 꺾였고 뜨거운 국물이 한순간에 와르르 쏟아져 내렸다.
탕 대부분은 정초아 자기 팔에 쏟아졌고, 일부는 이불과 내 옷자락을 적셨다.
“아!”
정초아는 과장된 비명을 질렀고 놀라는 연기도 어딘가 서툴렀다.
“어머, 어떡해. 나 진짜 일부러 그런 거 아니야!”
정초아의 목소리에 놀란 한서준이 고개를 홱 돌렸다.
이불 위로 번져 가는 국물 얼국보다 먼저 정초아의 팔을 덥석 붙잡아 이리저리 살폈다.
“다친 데는 없어?”
정초아가 멀쩡한 팔을 살짝 떨자, 그제야 한서준이 나를 향해 돌아섰다.
표정은 이미 완전히 굳어 있었다.
“하린아, 정초아가 이렇게 사과까지 했으면 된 거 아니야? 대체 얼마나 더 바라는 거야?”
잠시 말을 멈춘 한서준이 다시 한마디를 덧붙였다.
“사고 났을 때 정초아가 정신이 온전했겠어? 먼저 병원에 데려온 것도 당연한 거지. 넌 왜 이렇게 하나하나 다 따지고 넘어가려 드는 거야?”
이불 위에 번진 국물을 바라보는 동안, 가슴이 송곳에 찔린 것처럼 아려 왔다.
나는 간신히 입꼬리를 끌어올려 비웃듯 말했다.
“정초아는 일부러 그런 거야.”
한서준의 눈에 잠깐 망설임이 스쳤다가, 이내 단단한 눈빛으로 바뀌었다.
“사과해.”
한서준의 목소리는 더 낮아졌다.
“사과 안 하면, 네 엄마 내일 치료는 없는 줄 알아. 해외에서 들여오는 약값이 얼만지, 알지?”
나는 온몸이 덜컥 굳어 버렸다.
다른 여자 편을 들기 위해, 한서준은 결국 내 엄마의 목숨까지 협박 카드로 쓰고 있었다.
수치심이 숨 쉴 틈도 없이 밀려와 파도처럼 온몸을 덮쳤다. 손바닥 안에 박힌 손톱 자국이 따갑게 쑤셨다.
나는 눈을 꼭 감고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가 내쉬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미... 안해.”
세 글자를 내뱉는 순간, 두 볼이 화끈거렸다.
바닥에 내던져진 내 체면과 자존심이 산산이 부서져 흩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한서준의 표정이 조금 풀렸다.
말을 잘 듣는 아내의 모습을 보고 안심이라도 한 듯, 어정쩡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때, 정초아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붉은 입술이 비뚤어지게 말려 올라가며 노골적인 비웃음이 번졌다.
“나 일부러 그런 건데.”
한서준의 몸이 굳어졌다.
“뭐라고 했어?”
정초아는 턱을 치켜들고 더 크게 웃었다.
“들었잖아. 나 일부러 국물을 엎은 거라고. 어쩔 건데?”
한서준의 얼굴이 그대로 굳어 버렸고, 입술이 몇 번이나 떨렸지만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