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화
거실 안이 기묘할 만큼 고요해졌다.
한서준의 표정이 단번에 굳었다. 정초아가 이렇게 대놓고 인정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눈치였다.
한서준은 잠시 멍해 있다가 머쓱한 기침을 두어 번 흘리더니 정초아를 돌아보며 건성으로 나무랐다.
“너... 이렇게까지 함부로 굴면 어떻게 해?”
꾸짖는 말이라기보다 오히려 타이르는 말에 가까웠다.
이어서 한서준은 나를 바라보며 목소리를 조금 누그러뜨렸다.
“하린아, 푹 쉬어.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말고.”
나는 눈을 감아 버렸고 눈길 한 번 주기도 아까웠다.
감정 기복이 너무 심했고 이마 상처도 아직 완전히 아물지 않자, 의사는 나보고 이틀만 더 입원해 보자고 했다.
퇴원하는 날, 한서준이 먼저 손을 내밀며 내 짐을 들어 주겠다고 했다.
나는 굳이 거절도 받아들이지도 않았다. 다만 손이 다가오는 순간 슬며시 가방을 다른 손으로 옮겨 쥐고 담담하게 말했다.
“나 혼자서도 할 수 있어.”
허공에 멈춘 한서준의 손끝만 어색하게 떨렸고 얼굴에는 잠깐 난감한 기색이 스쳤다. 그래도 아무 말 없이 내 뒤를 따라왔다.
집에 도착하자, 나는 곧장 2층 안방으로 향했다.
문을 여는 순간, 발이 바닥에 붙은 것처럼 그대로 굳어 버렸다.
화장대 위에는 처음 보는 고급 화장품이 빼곡했고 드레스룸에는 내 것이 아닌 이번 시즌 신상 원피스들이 줄지어 걸려 있었다. 공기 속에는 익숙한 정초아가 쓰던 달큼한 향수가 가득 배어 있었다.
“이게 다 뭐예요?”
벅차오르는 놀라움을 억누르며 뒤따라온 가사도우미를 돌아봤다.
가사도우미는 막 들어온 한서준을 슬쩍 훔쳐보더니 목소리를 낮췄다.
“대표님께서 그러셨어요. 정초아 씨를 안방에 모시라고요. 그래야 돌보기에도, 가둬 놓기에도 더 좋다고...”
“가둬 놓는다고요?”
비웃음이 터져 나올 뻔한 나는 몸을 돌려 한서준을 뚫어지게 노려보며 손바닥이 아플 만큼 손톱을 깊이 박아 넣었다.
한서준은 눈에 띄게 당황한 기색이 스쳤다. 허겁지겁 다가와 앞뒤도 맞지 않는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하린아, 내 말 좀 들어 봐. 정초아가 전에는 너무 불안정했잖아. 여기 있어야 내가 지켜보면서 또 네게 해코지 못 하게 막을 수 있어... 객실은 이미 다시 꾸미라고 해 뒀어. 안방보다 더 조용해서 네가 쉬기에도 훨씬 좋을 거야...”
애써 변명을 꾸며대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나는 뼛속까지 피로가 스며드는 것 같았다.
이제 와서 말로 싸우는 건 아무 의미도 없었다. 이 우스꽝스러운 연극은 구경하는 것조차 지겨웠다.
“그만해.”
나는 담담하게 말을 잘랐고 입꼬리가 서늘하게 말려 올라갔다.
“어차피 이제 다 필요 없는 일이야.”
그렇게 말하고는 어이없어 굳어 버린 얼굴을 더 볼 생각도 없이 몸을 돌려 객실로 향하는 계단을 올랐다.
이럴 바엔 차라리 짐을 서둘러 정리해 완전히 떠나는 편이 나았다.
3층 작은 방은 정말로 새로 손을 본 듯 말끔했다. 하지만 새것의 냄새만 날 뿐 온기라고는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거기 앉아 엄마의 중요한 진료 기록을 정리하다가 갑자기 휴대폰에서 날카로운 벨 소리가 울려 퍼지는 바람에 손을 멈췄다.
엄마의 주치의에게서 온 전화였다.
가슴이 이유 없이 쿵 내려앉아, 서둘러 통화 버튼을 눌렀다.
“윤하린 씨, 큰일 났습니다. 방금 어머니께서 갑자기 위독해지셔서, 지금 응급조치 중입니다!”
의사의 목소리에는 다급함과 긴장이 그대로 묻어났다.
“뭐라고요?”
순식간에 나는 온몸이 얼음물 속에 던져진 것처럼 차갑게 식었고 목소리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갑자기 위독해지시다니요? 상태가 그나마 안정됐다고 하셨잖아요.”
의사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무겁게 말을 이었다.
“누군가... 누군가 몰래 병실에 들어와서 하린 씨 어머니의 산소호흡기를 뽑아 버렸습니다. 다행히 바로 발견하긴 했지만, 환자분께 큰 무리가 갔어요...”
‘누군가가... 산소호흡기를 뽑았다고?’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것 같은 서늘한 현기증이 온몸을 휩쓸었다. 나는 겨우 벽을 짚고 서 있었다.
그 순간, 교통사고가 나던 날 들었던 그 목소리가 다시 귓가를 때렸다.
한서준 품에 안긴 채 비열하게 웃던 정초아의 경고가 생각했다.
‘네 마누라랑, 가족 모두 대가를 치르게 해 줄 거야...’
나는 미친 사람처럼 병원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차갑게 식은 복도 끝에서 나를 맞이한 건, 흰 천에 천천히 가려지고 있는 엄마의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