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화 다시 만난 그 남자
고은찬은 심재이가 제 발로 찾아와 사과하길 오후 내내 기다렸지만 그녀의 모습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고 들려오는 건 오늘 그녀가 직원들과 함께 식사한다는 얘기뿐이었다.
분노가 치밀어올라 퇴근한 후 곧장 차를 끌고 레스토랑에 와보니 그녀의 입에서 대뜸 회사를 그만둔다는 터무니없는 소리가 튀어나왔다.
심재이는 당황하지 않은 얼굴로 뒤돌았다.
눈이 잔뜩 충혈된 고은찬의 뒤로 흰색 원피스를 입은 소유나가 보였다.
“말 그대로야. 내가 해야 할 업무는 이미 다 처리해 뒀어. 내일 출근하게 되면 사직서부터 수리해 줘.”
고은찬은 자기도 모르게 손에 힘을 가했다.
“뭐? 사직서? 내가 수리해 줄 것 같아?”
심재이는 손목이 아파 와 미간을 찌푸렸다.
“놔. 아파.”
소유나는 심재이의 말에 기분이 매우 좋았다. 심재이가 회사에서 사라져야 그녀와 고은찬의 시간도 더 많아질 테니까.
하지만 회사를 그만두겠다는 얘기가 진심인지는 아직 알 수가 없었기에 확인해 볼 필요가 있었다.
고은찬은 아프다는 말에 손목을 풀어주기는 했지만 여전히 눈동자는 심재이에게 고정하고 있었다.
“심재이, 내가 분명히 그만하라고 했지?”
“대체 뭐가 문제야?”
심재이가 되물었다.
“소유나 씨랑 둘이서 잘 해보라고 자리까지 내어주겠는데 뭐가 그렇게 불만이야? 네가 원했던 게 이런 거 아니었어?”
고은찬은 그녀의 추궁에 오히려 기분이 살짝 좋아졌다. 줄곧 치솟던 분노도 조금씩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말만 이렇게 했을 뿐 심재이는 아직 그를 사랑하는 게 틀림없었다. 그러니 소유나를 끌어들이며 그를 추궁하는 것이다.
고은찬은 그렇게 생각하며 조금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해야. 나는 유나를 그저 예쁜 동생으로밖에 생각 안 해. 동생 같아서 잘 챙겨준 것뿐이야.”
“동생?”
심재이는 기가 막힌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너는 동생이랑 키스도 하니? 고은찬, 내가 바보로 보여?”
고은찬이 미간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키스?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그때 줄곧 가만히 있던 소유나가 안색을 바꾸며 심재이의 팔을 덥석 잡았다.
“팀장님, 저 때문에 화나신 거죠? 제가 두 분을 방해한 거죠? 죄송해요. 정말 그럴 생각은 없었는데... 제가 떠날게요. 제가 회사에서 나갈게요. 그러니까 이만 화 푸세요. 네?”
애절한 목소리와 달리 심재이의 팔을 잡은 그녀의 손은 점점 더 조여만 갔다.
상처가 벌어진 듯한 느낌에 심재이가 그녀의 손을 홱 하고 뿌리쳤다.
“아!”
소유나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쓰러졌다. 그리고 고은찬은 그 모습을 보더니 다시금 화를 내기 시작했다.
“심재이, 이게 지금 무슨 짓이야!”
고은찬은 소유나를 부축하며 심재이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대표님, 화내지 마세요. 갑자기 다리에 힘이 풀려서... 그래서 넘어진 것뿐이에요. 팀장님 잘못이 아니에요.”
소유나는 눈물을 글썽이며 완벽한 피해자의 얼굴을 했다.
고은찬은 그런 그녀를 안쓰럽게 바라보더니 이를 바득바득 갈며 심재이에게 호통쳤다.
“너 왜 이렇게 독기가 올랐어? 네가 유나처럼 착했으면 내가 너한테 소리 지르는 일도 없었어!”
심재이는 소유나에게 잡힌 것 때문에 팔이 아팠다가 고은찬의 날 선 말에 이번에는 가슴이 아팠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져나올 것만 같았다.
“그럼 착한 소유나 씨랑 한번 잘 해봐. 원하는 대로 보내줄 테니까.”
심재이는 그렇게 말하고는 직원들을 향해 억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나 잠시 화장실 다녀올 테니까 계속 먹고 있어요.”
말을 마친 그녀는 고은찬에게 시선 한번 주지 않은 채 자리를 벗어났다.
“심재이, 너 이리 안 와?”
고은찬은 그녀의 뒷모습을 향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돌아오는 건 그의 메아리뿐이었다.
화장실.
심재이는 손을 씻으며 눈물을 뚝뚝 흘렸다. 가슴이 아파 죽을 것만 같았다.
어릴 때의 고은찬은 늘 그녀의 편이었다. 늘 그녀의 앞에 서서 괴롭히는 아이들을 혼내주며 그녀를 지켜주었다.
“앞으로는 내가 널 지켜줄 거야. 누구도 널 아프게 못 해.”
하지만 그녀를 지켜주겠다던 남자는 어느샌가 괴롭히는 쪽이 되어 그녀를 아프게 했다.
“왜 볼 때마다 얼굴이 엉망인 것 같지?”
익숙한 남자의 목소리에 심재이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거울 속에는 언제 들어온 건지도 모를 고태겸이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