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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유동욱은 전화를 받고 나서 현장으로 달려왔다. 숨이 가쁜 기색이 역력했다. “유 비서님, 여기서 다 뵙네요?” 김준하는 순간 얼굴을 갈아 끼웠다. 조금 전까지 거칠게 목소리를 높이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과장될 만큼 밝은 웃음을 지었다. 태도 변화가 너무도 노골적이라 어색해질 정도였다. 김준하는 유동욱을 알고 있었다. 안성 그룹 대표이사 곁에서 늘 함께 움직이는 수행비서였으니까. ‘유 비서님과 인연이 닿으면 본사 발령도 꿈은 아니겠지.’ “김 총괄님이시죠?” 유동욱은 아직 사람들 속에 서 있는 육현재를 알아보지 못한 채 자연스럽게 인사를 건넸다. “유 비서!” 그때 서늘한 목소리가 공기를 가르며 끼어들었다. “요즘 일이 그렇게 한가한가.” 그 한마디에 유동욱은 그대로 굳어 섰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제야 시야가 넓어졌다. 사람들 사이에 서 있는 육현재, 그리고 그의 품에 안긴 아이까지 한눈에 들어왔다. 왜 한눈에 알아보지 못했는지 이해가 갔다. 유동욱의 얼굴에 즉시 미소가 번졌다. 그리고 거의 뛰다시피 다가가 몸을 숙였다. 몸에 밴 습관처럼 지나칠 만큼 빠르고 능숙했다. “대표님!” 그 호칭이 떨어지는 순간 김준하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이야기 계속해 보지 그래? 분위기가 꽤 좋아 보이던데.” 육현재는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친분이 좀 있나 보지?” 그 말에 담긴 뜻을 읽지 못한다면 육현재의 오른팔이 될 수도 없었을 것이었다. 그만큼 유동욱은 눈치가 빨랐다. ‘오늘 대표님께서 저기압인 이유가... 설마 김준하 총괄 때문인가?’ 순간 모든 퍼즐이 맞춰졌다. 이 일에 엮였다가는 자신의 자리까지 위험해질 수 있었다. “아닙니다, 대표님. 전혀 아닙니다.” 유동욱은 다급히 고개를 저었다. “업무상 몇 번 뵌 적이 있을 뿐입니다. 개인적인 친분은 전혀 없습니다.” “그렇다면 더 말할 것도 없겠네. 인사본부에 연락해서 해고해.” 육현재는 손을 들어 김준하를 가리켰다. 그는 자리에 있는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큰 소리로 말했다. “그뿐만 아니라 지사에 있으면서 직권을 남용한 일이 있는지도 전부 확인해보거라.” 김준하는 그제야 상황을 완전히 이해했다. 아들의 작은 다툼이 자기 인생 전체를 뒤흔들어 놓을 줄은 상상도 못 했을 테니까. “뭐 하는 거예요?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에요?” 이미연이 한 발 앞으로 나서더니 허리에 손을 얹고 육현재를 노려봤다. “저기요, 드라마 찍어요? 그쪽이 재벌 2세라도 되는 줄 알아요?” 그녀는 아직도 사태의 심각성을 알아채지 못한 눈치였다. 김준하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그는 급히 아내를 붙잡더니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 올렸다. “그만 좀 해! 이분이 누구신 줄 알아? 안성 그룹 대표이사 육현재 대표님이시라고!” 이미연은 입을 다물지 못하고 멍하니 서 있었다. 남편의 충혈된 눈을 보고서야, 상황이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뺨을 감싸 쥐고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작게 흐느끼기만 했다. “대, 대표님...” 김준하는 다리에 힘이 풀린 듯 비틀거렸다. 조금 전의 오만함은 흔적도 없었다. “제가 눈이 멀었습니다. 전부, 전부 이 사람이 일을 키운 겁니다. 저는 정말…” 금세라도 무릎을 꿇을 기세였다. “유 비서, 2분 내로 이 사람들을 내 눈앞에서 사라지게 만들어줘.” 육현재가 안경을 고쳐 쓰며 말했다. “네, 대표님.” 유동욱은 한 치도 지체하지 못하고 곧바로 움직였다. 그는 곧바로 김준하네 가족에게 다가가 단호하게 자리를 정리해 달라고 요청했다. 말은 공손했지만 선택지는 없었다. 김준하가 무슨 말을 더 보태려 해도 유동욱은 표정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채 동선을 만들어 사람들 밖으로 밀어냈다. 이들의 소동 때문에 다른 아이들의 하루를 망치게 둘 수는 없었다. 교사들은 아이들을 다시 활동 자리로 안내했고 어수선하던 공기는 조금씩 누그러졌다. 이윤이는 다시 친구들 사이로 돌아왔다. 그때 나원이가 쪼르르 달려와 이윤이 옆에 바짝 붙어 앉으며 목소리를 낮춘 채, 호기심을 꾹 눌러 담아 물었다. “이윤아, 아까 그분들이 네 부모님이야?” 이윤이는 무심코 시선을 멀리 보냈다. 임지현과 육현재가 조금 떨어진 곳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 큰 덩치가 눈에 거슬렸는데, 이상하게도 지금은 두고 지켜봐도 될 것 같았다. 단, 한 가지 조건이 붙었다. ‘내게서 엄마를 빼앗지 않는다면!’ “응. 맞아.” 이윤이가 바로 대답하자 나원이가 눈을 깜빡였다. “대박, 이윤아, 너희 부모님은 너무 멋지시다! 연예인 같아!” 나원이는 진심이 잔뜩 묻어나는 얼굴로 말했다. “나도 나중에 커서 이윤이 아빠처럼 잘생긴 남편을 찾을 거야.” 이윤이도 새로 사귄 친구들과 금세 어울렸다. 함께 뛰어놀며 웃음이 끊이지 않았고 분위기는 전보다 한층 더 화기애애했다. 오후에는 캠프에서 가족 참여 체리 따기 대회가 열렸다. 규칙은 단순했다. 10분 안에 가장 많은 체리를 수확한 가족이 우승이었다. 아이들에게 승부욕은 본능이었고, 이윤이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선생님에게서 ‘이윤이 정말 잘했어.’라는 말을 듣고 싶었다. 경기가 시작되자 세 사람은 자연스럽게 역할을 나눴다. 임지현은 양동이를 들고 나무 아래에 섰고 육현재는 손이 닿는 한 최대한 높은 가지를 노렸다. 이윤이는 허리를 숙여 낮은 곳에 매달린 열매나 이미 떨어진 체리를 하나씩 주워 담았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손이 닿는 체리는 금세 바닥을 드러냈다. 나무 꼭대기에는 유독 붉고 탐스러운 열매들만이 남아 있었는데 키가 큰 육현재가 팔을 뻗어도 닿지 않았다. 이윤이는 그 위를 한참 올려다보았다. 시선은 체리에 고정된 채였고 작은 얼굴에는 쉽사리 물러설 기색이 없었다. 그때 육현재가 아이 곁으로 다가와 쪼그려 앉더니 시선을 맞춘 채 낮게 물었다. “이기고 싶어?” 이윤이는 잠깐도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기고 싶으면 내가 시키는 대로 해.” 말이 끝나자마자 육현재는 아이를 번쩍 들어 올려 자기 어깨 위에 앉혔다. 이윤이는 균형을 잡고 임지현은 그 모습을 보며 무의식적으로 숨을 삼켰다. “조심해.” “괜찮아. 내가 잡고 있을게. 아래에서 잘 받아줘.” 임지현은 육현재의 지시에 따라 곧바로 움직였다. 이윤이는 이렇게 높은 곳에 올라와 본 것이 처음이었다. 시야가 한순간에 탁 트이자 아이의 얼굴이 환해졌다. 들뜬 기색 그대로 작은 손을 뻗자, 나무 꼭대기에 매달린 가장 붉고 탐스러운 체리들이 손쉽게 손에 들어왔다. 세 사람의 호흡은 놀라울 만큼 잘 맞았다. 임지현은 나무 아래에서 받아냈고 육현재는 어깨 위에 올라탄 아이를 단단히 지탱했다. 그 사이 이윤이는 몸을 유연하게 움직이며 체리를 따냈다. 잠시 후, 가져온 작은 양동이는 금세 가득 찼다. 빨갛게 익은 체리들이 양동이 안을 채웠고 그 모든 수확은 고스란히 그들의 몫이 되었다. 그들은 누구보다 먼저 과제를 마쳤고 결과는 예상대로였다. 단연 1등이었다. 캠프 교사 이채연은 기쁜 얼굴로 다가와 세 사람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겼다. 육현재는 임지현의 어깨를 끌어안고 있었고 그의 어깨 위에는 환하게 웃는 이윤이가 올라타 있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따뜻하고 완벽해 보이는 가족 같았다. 육현재가 이윤이를 데리고 체리를 씻으러 자리를 비운 사이, 이채연 교사는 막 인화된 즉석 사진을 들고 임지현 곁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사진을 바라보며 진심 어린 감탄을 흘렸다. “정말 행복해 보이는 세 식구네요. 아이도 너무 예쁘고... 아빠랑 똑 닮았어요.” 그 말에 임지현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사진을 받는 손끝이 미세하게 떨려 하마터면 사진을 놓칠 뻔했다. “그, 그래요?”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였지만 속은 이미 얼어붙은 뒤였다. ‘다행히 육현재는 멀리 가 있었어. 듣지 못했을 거야.’ 그녀는 애써 그렇게 스스로를 달랬다. 만약 그 말이 그의 귀에 들어간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감히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혹시라도... 이윤이를 데리고 친자 검사를 하자고 나선다면...’ 조금 전까지 이어지던 짧은 즐거움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등골을 타고 차가운 기운이 스며들었다. 임지현은 다시금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반드시 거리를 두어야 해. 이 비밀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들켜서는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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