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화 아이의 아빠
유수진이 빌딩을 나서자마자 도지후가 보조 배터리를 가져다주었다.
갑작스러웠지만 지금 이 순간 그녀에게는 구세주 같은 느낌이었다.
“고마워.”
휴대폰 배터리가 2%밖에 안 남은 거로 표시되었기에 서둘러 충전기를 연결했다.
도지후는 유수진을 잠시 살펴보았다.
4년이라는 시간 동안 주이찬도 많이 변했지만 그녀도 예전의 경솔함은 사라지고 무척 차분해 보였다.
“주이찬이 너에게 그렇게 하는 거 너무 원망하지 마. 그때 네가 헤어지자고 강요해서 이찬이 체면이 다 구겨졌잖아. 졸업할 때까지도 이찬이를 비웃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는데. 이건 누구라도 받아들이기 힘들겠지만 특히 이찬이처럼 자존심이 센 사람은 더욱 그랬을 거야.”
순간 자리에 굳어진 유수진은 빨간 입술을 꽉 다물었다.
도지후가 희미하게 웃었다.
“지난 몇 년 쉽게 지낸 거 아니야. 우리 친구들도 너를 원망했어. 만약 단지 체면 문제뿐이었다면 몰라도 그때 양주산에서의 약속을 어기면서 이찬이가...”
여기까지 말한 도지후는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유수진은 마음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그 해에 주이찬에게 무슨 일이 더 있었던 거야?”
당황하고 걱정하는 유수진을 본 도지후는 순간 그게 진심인지 가식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그때 그렇게 냉정하게 떠나 놓고 지금 왜 갑자기 주이찬을 걱정하는 척하는 건지...
“내가 말할 수 있는 건, 만약 그때 네가 곁에 있었다면 주이찬은 훨씬 나았을 거라는 거야.”
도지후의 얼굴에 복잡한 감정이 스쳤지만 경고의 의미도 담겨 있었다.
“이미 안 좋게 헤어졌잖아, 그러니 앞으로 주이찬과 연락하지 마. 가능하면 네가 앞으로 주이찬의 삶에 나타나지 않기를 바라. 그래야 더 나은 여자를 만날 수 있으니까.”
순간 목이 멘 유수진은 온몸이 차가워지는 것 같았다.
“알겠어.”
“네 분수를 알면 좋겠어.”
도지후는 바쁘다고 말하며 다시 일하러 돌아갔다.
순간 코끝이 시큰해진 유수진은 눈앞도 희미해졌다.
주이찬의 냉담함을 것을 유수진은 원망하지 않았다. 헤어진 후부터 주이찬과의 미래를 기대한 적이 없었으니까.
그 때문인지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한편 회사 꼭대기 층 사무실.
넓은 통창 앞에 서 있는 남자는 일 층에 있는 여자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단호하게 걷는 걸음은 그 어떤 망설임도 없었다.
눈을 가늘게 뜬 주이찬의 위험한 눈빛은 오래도록 음침함이 서려 있었다.
‘그래. 그때처럼 정말 깔끔하게도 떠나는구나.’
유수진은 강미나를 만나러 갔다. 강미나는 경찰서에서 하룻밤을 보냈지만 기분은 괜찮은 것 같았다.
적어도 인생에 빨간 줄은 남기지 않았으니 그걸로도 충분했다.
하지만 유수진은 왠지 모를 죄책감에 강미나를 데리고 밖에 나가 밥도 사주고 술도 조금 마셨다. 둘 다 어느 정도 술에 취한 뒤 해 질 녘에야 헤어졌다.
별장으로 돌아온 유수진은 엘리베이터에서 나오는 한경민과 마주쳤다.
어젯밤의 격분했던 그의 모습과는 달리 오늘 유난히 기분이 좋아 보였다.
“아버님이 방금 전화 왔는데 우리더러 식사하러 오래.”
한경민의 부모는 해외에 있었기에 국내에는 유수진의 ‘부모님'만 있었다.
하지만 그 집은...
그녀도 다시 가고 싶지 않았다.
“시간 없어. 그날 휴가 끝나는 날이라 우리 회사 소속 연예인들 처리할 일이 많아.”
평소 같았으면 한경민은 비꼬는 말을 했겠지만 이번에는 그러지 않았다.
“연우가 곧 한국에 돌아온다고 들었는데 내가 같이 마중 나가는 게 어때?”
유수진은 이상한 얼굴로 한경민을 바라보았다.
“무슨 꿍꿍이야?”
연우는 유수진의 딸로 이제 겨우 세 살이었다.
국내 작업이 불안정했기 때문에 그동안은 줄곧 오스주에 있는 사촌 여동생 남윤영에게 아이 돌보는 것을 부탁했다.
하지만 한경민은 연우에게 항상 무관심하고 쌀쌀맞게 굴었다.
“나는 아이의 아빠야. 내 아내와 함께 아이를 마중 나가는 게 무슨 문제라도 돼?”
유쾌하게 웃는 한경민은 이전의 우울함 따위 온데간데없는 듯했다.
유수진은 한경민을 몇 초간 동안 묵묵히 바라본 후 말했다.
“됐어. 당신은 지금까지 연우의 인생에 없었어. 앞으로 계속 없어도 돼. 연우에게는 나만 있으면 돼.”
“유수진, 우리 부부 사이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연우를 위해서라도 우리의 대화 방식을 바꿔야 한다고 생각 안 해? 아이를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