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화
강윤오는 자신이 변호사라는 사실을 잊은 듯했다.
그는 앞에서 달리는 노수환의 차를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조금 전 노수환이 한예빈의 허리에 손을 두른 채 떠나던 모습이 그의 뇌리에서 떠나지를 않았다.
늦은 밤 남자와 함께 단둘이 돌아간다는 것이 뭘 의미하는지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강윤오는 한예빈이 다른 남자에게 더럽혀지는 걸 원치 않았다.
‘용납할 수 없어!’
쾅!
엄청난 굉음이 울려 퍼졌다.
노수환의 차는 옆으로 밀려나서 도로에 가로로 멈춰 섰고 찌그러진 차 뒷부분에서는 흰 연기가 피어올랐다.
“큰일이네. 손에 넣은 의뢰를 날려버리겠어.”
고민준이 초조한 얼굴로 안전벨트를 풀고 차에서 내려 상황을 중재하려고 했다.
그런데 이때 강윤오가 고민준의 팔을 툭툭 두드린 뒤 광기 어린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오늘 밤 참 즐겁겠지?”
“...”
강윤오는 덤덤한 얼굴로 차에서 내려 노수환의 차 쪽으로 걸어가 태연하게 창문을 두드렸다.
“죄송해요. 방금 아내분 사건을 생각하다가 잠깐 넋을 놓았거든요.”
가로등 아래 강윤오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그는 창문 너머 한예빈의 핏기 하나 없이 창백한 얼굴을 바라봤다.
“많이 놀라셨나 봐요.”
한예빈의 손톱이 가죽 시트를 파고들었다. 그녀는 화가 난 얼굴로 강윤오를 노려보았다.
강윤오는 일부러 그런 것이 틀림없었다.
그녀가 1억 2천만 원을 벌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넋을 놓고 계셨다니, 좀 황당하네요.”
노수환이 문을 열고 차에서 내리며 잠깐 날카로운 눈빛을 해 보였다.
그러나 강윤오는 그의 언짢음을 눈치채지 못한 듯 연기하면서 웃으며 말했다.
“사과의 의미로 제가 술이라도 사드릴게요.”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 갑자기 차 위에 팔을 올리며 한예빈의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지게 했다.
“이분께서 많이 놀라신 것 같은데 조금 진정할 시간이 필요해 보이네요.”
“오늘은 너무 늦은 것 같네요.”
노수환이 살짝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아내분 사건과 관련해 노수환 씨와 조금 더 얘기를 나눌 필요가 있을 것 같은데요.”
노수환은 죽은 아내와 관련이 있는 문제라고 하자 안색이 살짝 달라졌다.
그는 한예빈을 바라보며 말했다.
“같이 갈래?”
한예빈은 차에서 내렸다.
“저는 이만 돌아가 볼게요. 얘기 나누세요.”
그녀는 강윤오와 같은 공간에 있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강윤오를 최대한 멀리하고 싶었다.
그를 보면 한때 그에게 간이고 쓸개고 다 빼주려고 했던 자신이 떠올라서 싫었다.
“그러면 사람을 시켜서 집까지 바래다줄게.”
노수환이 말했다.
“괜찮아요. 택시 타고 가면 돼요.”
“사양하지 않아도 돼.”
노수환은 그렇게 말하면서 한예빈의 손목을 쥐더니 한결 매서워진 강윤오의 눈빛을 무시하며 한예빈의 휴대폰을 가져가 자신의 번호를 입력했다.
이내 노수환의 주머니에서 벨 소리가 울렸고 노수환은 의미심장하게 한예빈의 손등을 엄지손가락으로 문지르며 말했다.
“언제든 연락 줘.”
한예빈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그녀는 손을 빼내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면서 애써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네.”
한예빈은 노수환의 기사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떠났다.
강윤오는 너무 화가 나서 표정 관리를 못할 뻔했다.
노수환은 한예빈의 예쁜 손을 만졌던 자신의 손가락을 문지르며 미소 띤 얼굴로 강윤오를 바라보았다.
“어디로 가서 얘기를 나눌까요?”
강윤오는 몸을 돌려 차에 올랐다.
“따라오세요.”
...
비좁은 집 안에서는 습한 곰팡내와 창틈 사이로 스며든 근처 가게의 연기와 음식 냄새가 났다.
한예빈은 기진맥진한 사람처럼 낡은 소파 위로 힘없이 쓰러졌고 소파 스프링은 그녀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삐걱거리며 소리를 냈다.
한예빈은 천장에 번진 물 자국을 멍하니 바라보며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으려고 했으나 자꾸만 옛 기억이 떠올랐다.
첫 만남에서 군복을 입고 있던 강윤오의 턱선이나, 다시 만났을 때 금테 안경 너머로 보이던 싸늘한 눈빛, 어두운 밤 뜨거운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쥐면서 나지막하게 내뱉던 숨소리 같은 것들이 도저히 잊히지 않았다.
그러다 갑자기 천장의 물 자국이 점점 더 크게 번지기 시작하더니 아버지가 건물에서 몸을 던졌을 때 아스팔트 위를 빨갛게 물들였던 피바다가 떠올랐다.
귓가에서는 편지를 열었을 때의 사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안에 적힌 내용은 아주 충격적이었다.
[강윤오는 주태영의 오빠야. 강윤오가 네게 접근한 건 한씨 가문을 무너뜨리기 위해서였어.]
“윽...”
한예빈은 몸을 웅크리면서 손가락이 팔뚝 살을 파고들 정도로 힘껏 팔을 쥐었다.
낡은 소파에서 끼익 소리가 끊이지를 않았다. 마치 그녀의 고통을 함께 느끼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벽에 걸린 오래된 시계에서는 초침 소리가 들려왔고 그 소리는 계속해 그녀의 마음을 건드렸다.
한예빈은 덜덜 떨며 휴대폰을 꺼내다가 갤러리 속 환하게 웃는 딸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한여음은 환자복을 입고 브이를 하고 있었는데 창백한 얼굴에 캐릭터가 그려진 귀여운 반창고를 붙이고 있었다.
그 순간 오랫동안 참아왔던 눈물이 끝내 터져버리고 말았다.
한예빈은 울지 않으려고 손등을 힘껏 깨물었지만 짠 눈물이 그녀의 소매를 적셨다.
그녀가 목숨 걸고 지켜낸 아이가 병마에 시달리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괴로웠다.
“왜 하필 지금 돌아온 거야? 월스트리트에서 살면 될 걸 왜 하필 지금 이때 돌아온 거냐고.”
하필 지금 돌아와서 그녀의 괴로운 기억을 끄집어내고, 그녀가 하려는 일을 방해하다니.
강윤오가 앞으로도 계속해 훼방을 놓는다면 무슨 수로 노수환에게서 1억 2천만 원을 빌린단 말인가?
한예빈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고 있을 때 갑자기 문자 하나가 도착했다.
정은서로부터 4천만 원이 입금되었다는 내용의 문자였다.
“은서야.”
한예빈이 황급히 정은서에게 전화했다.
“이 돈은...”
“일단 받아.”
정은서는 일부러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말했다.
“다른 사람한테 부탁해서 대출받은 거야. 나머지도 방법을 생각해 볼게.”
“충분해!”
한예빈이 갑자기 목청을 높였다가 다시 누그러진 어조로 말했다.
“진짜... 이걸로 충분해.”
그동안 정은서가 빌려준 액수는 낡은 소파를 무너뜨리기에 충분했다.
정은서는 잠시 침묵했다.
“예빈아.”
정은서의 목소리에서 미처 억누르지 못한 흐느낌이 들려왔다.
“노수환 씨 쪽은 그냥 포기해. 송유겸 때를 잊은 건 아닌지?”
한예빈은 순간 흠칫했다.
송유겸을 어떻게 잊을 수가 있겠는가?
송유겸은 한때 한예빈을 짝사랑했었다. 그는 한예빈이 강윤오를 잊지 못했다는 걸 알면서도 포기하지 않았고, 심지어 그녀의 집안이 망했을 때도 지옥 같은 나날을 보내던 그녀를 향해 구원의 손길을 내밀었었다.
송유겸은 자신과 결혼해 주면 빚을 대신 갚아주겠다고, 그녀의 오빠를 위해 변호사를 선임해 주겠다고, 심지어 그녀 뱃속의 아이를 자신의 아이처럼 여기겠다고 맹세했었다.
한예빈은 송유겸이 자신을 정말로 사랑하는 줄 알고 강윤오에게 완전히 실망한 상태에서 돈 때문에 송유겸과 결혼했다.
그러나 그것은 또 다른 지옥의 시작이었다.
“노수환 씨가 정말로 괜찮은 사람이었다면 옆에 여자가 끊인 적이 없었을 리가 없지. 그 사람은 너한테 안 어울려.”
한예빈은 눈물을 흘리면서 웃음을 터뜨렸다.
“지금의 내가 무슨 자격으로 그런 걸 선택할 수 있겠어?”
“우리 같이 방법을 생각해 보자.”
“은서야, 너는 이미 나를 많이 도와줬어. 하지만 우리 오빠는 아직...”
“너희 오빠 때문이 아니야.”
정은서가 결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희 오빠가 아니었어도 나는 너를 도왔을 거야. 그리고 너한테 추천해 줄 변호사가 한 명 있는데 내일 한 번 찾아가서 너희 오빠 사건의 변호를 맡아줄 수 있는지 물어봐.”
한예빈은 이내 그 변호사의 정보를 받게 되었다.
“나는 지금 볼일이 있어서 일단 끊을게.”
정은서는 전화를 끊기 전 심각한 어조로 말했다.
“넌 이미 너를 한 번 팔았어. 그러니까 두 번은 안 돼. 예빈아, 나는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전화를 끊은 뒤 한예빈은 소파에 웅크린 채로 눈물로 쿠션을 적셨다.
그녀는 손바닥에 얼굴을 깊이 묻으며 손가락 틈 사이로 눈물을 흘려보냈다.
자신의 모든 걸 내어주는 정은서 같은 친구가 있는 건 그녀에게 크나큰 행운이었다.
...
다음 날, 성진 로펌의 건물 유리 외벽 위로 석양이 드리워졌다.
한예빈은 꾸깃꾸깃한 정장을 여미며 고개를 들어 웅장한 건물을 바라보았다.
엘리베이터가 올라갈 때 그녀는 꼭대기 층의 통유리창 앞에 선 늘씬한 남자가 멈칫하는 걸 미처 보지 못했다.
강윤오는 커피잔을 든 채 흠칫했고 그 탓에 커피가 흰 셔츠에 튀었다.
그는 한예빈을 뚫어져라 바라보다가 곧바로 고민준에게 연락했다.
“한예빈 말이야. 너를 찾으러 온 거야?”
“뭐?”
고민준이 곤혹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나를 왜 찾아오겠어? 너를 찾아왔겠지. 네가 한예빈 씨와 노수환 씨 사이에 훼방을 놓았으니 따지려고 온 거 아니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