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화
강윤오는 순간 심장이 덜컥했다. 가슴 속에서 얌전치 못한 토끼 한 마리가 마구 뛰어다니는 듯했다.
그는 황급히 컵을 내려놓았고 갈색의 액체가 컵 안에서 다급하게 호선을 그렸다.
휴게실의 옷장이 활짝 열렸다. 텅 빈 옷장을 본 강윤오는 그제야 자신이 성진 로펌에 온 지 이틀밖에 되지 않아 여분의 옷을 준비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는 다시 고민준에게 연락했다.
“네 사무실에 깨끗한 셔츠는 없어?”
통화하면서 강윤오는 이미 고민준의 사무실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고민준은 현재 외근 중이었다.
“있어. 알아서 찾아봐. 그런데 왜 갑자기 셔츠를 갈아입으려...”
“묻지 마.”
강윤오는 고민준의 말허리를 끊으며 고민준의 휴게실에 있는 옷장을 열었다. 그리고 그 순간 다양한 색깔이 시야에 들어왔다.
채도가 아주 높은 색깔의 옷들이 가지런히 걸려 있어서 마치 공작새의 깃털처럼 보였다.
강윤오는 당황스러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왜 이렇게 화려한 색깔의 옷들만 입어? 그러니까 지금까지 여자 친구가 없지.”
“내가 좋아서 입는 건데?”
고민준의 목소리에서 웃음기가 느껴졌다.
“앞으로 녹색이랑 보라색은 입지 마.”
강윤오는 그렇게 말하면서 녹색과 보라색 옷을 전부 뺐다.
비록 사이즈가 좀 작긴 했지만 입을 수는 있었다.
“왜? 내가 제일 좋아하는 게 녹색인데!”
고민준이 항의했다.
“네가 입으면 곰팡이 핀 크리스마스트리 같거든.”
강윤오는 느긋하게 말을 보탰다.
“내가 입는 게 훨씬 더 잘 어울려.”
“꺼져.”
고민준이 전화를 끊었다.
강윤오는 입꼬리를 올리며 셔츠를 들고 자신의 사무실로 돌아갔다.
거울 속 밝은 녹색의 옷을 입은 그는 몇 살 더 어려 보였고 오랫동안 쌓였던 우울함도 줄어든 것만 같았다.
강윤오는 옷깃을 정리하고 이마 위로 드리워진 앞머리까지 완벽하게 정리한 뒤 초조한 마음으로 한예빈을 기다렸다.
‘왜 아직 안 오는 거지? 설마 나를 찾으러 온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자 찬물을 뒤집어쓴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한예빈이 오빠 한예훈을 위해 변호사를 구하다가 변호사 협회 사람들에게 모욕당한 일을 떠올린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1층 응접실 안, 한예빈은 서류 한 뭉치를 자신의 맞은편에 앉아 있는 젊은 변호사에게 건넸다.
지형준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증거 리스트를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한예빈 씨, 이 서류들은...”
“더 모을 수 있어요. 변호사님께서 시간을 벌어주신다면...”
다급히 몸을 앞으로 기울이던 한예빈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그녀는 녹색 옷을 입은 조금 낯익은 사람을 언뜻 보게 되었다.
녹색은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색깔이었기에 한예빈은 그 색깔에 민감했다.
지형준의 한숨 소리에 한예빈은 다시 그에게 집중했다.
“한예빈 씨, 이 사건은...”
“비용은 두 배로 드릴게요. 변호사님께서...”
한예빈은 지형준의 말을 끊었다. 그러나 그녀의 시선은 다시금 문 앞에 나타난 녹색 옷을 입은 사람에게로 향했다.
이번에 그녀는 똑똑히 보았다.
그 사람은 바로 강윤오였다.
‘강윤오 씨가 왜 여기 있지?’
그녀는 강윤오가 성진 로펌에 있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한예빈은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 정도로 힘주어 주먹을 움켜쥐면서 눈앞에 있는 변호사에게 집중하려고 애를 썼다.
“지 변호사님, 저는 다만 기회가 필요할 뿐이에요.”
이곳에 오기 전 한예빈은 미리 지형준에 대해 알아봤었다. 비록 지형준은 경험 많은 노련한 변호사는 아니지만 그는 자신이 맡은 사건에는 늘 최선을 다했고 그래서 맡은 사건들 대부분 승소했다.
그래서 한예빈은 지형준이 의뢰를 받아주길 바랐다.
밖에서 강윤오는 유리문 앞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구두와 바닥이 부딪치는 소리에서 그의 다급한 마음이 느껴졌다.
세 번째로 문 앞을 지나가게 되었을 때 그는 자기도 모르게 손가락에 힘을 주어 문을 긁었다.
이렇게 오래 서성였는데도 한예빈은 그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월스트리트 변호사인 그가 작은 응접실 안에서는 아무런 가치조차 없는 존재인 걸까?
결국 강윤오는 참지 못하고 문을 벌컥 열었다.
“지 변호사님, 제 사무실로 한 번 오시죠.”
그의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한기 때문에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지형준은 고개를 들었을 때 눈을 빛냈다.
신입 변호사인 그는 이 로펌의 에이스인 강윤오에게 지목받을 줄 예상하지 못했다.
그런데 지형준이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한예빈이 컵을 테이블 위에 탁 내려놓았다. 컵과 테이블이 부딪치며 내는 소리가 따귀 소리와 비슷했다.
“강윤오 씨, 많이 배우신 분이 새치기는 예의가 아니라는 건 배우지 못하셨나 봐요.”
순간 분위기가 싸해졌다.
지형준은 그 자리에 얼어붙어서 동공이 심하게 흔들렸다.
로펌의 대표인 고민준을 제외하면 강윤오에게 감히 그런 식으로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강윤오는 월스트리트 출신의 엘리트이자 로펌의 에이스라 다들 강윤오와 대화할 때는 신중하게 말을 골라야 했다.
그러나 한예빈은 대놓고 빈정댔다.
강윤오는 턱에 힘이 들어가면서 눈빛이 어두워졌다. 그러나 그는 애써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시간은 유의미한 일에 사용해야 하는 법이니까. 너희 오빠 사건은 뒤집을 수 없어. 그러니 굳이 시간을 낭비할 필요는 없지.”
한예빈의 안색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그녀는 손톱이 손바닥을 깊이 파고들 정도로 주먹을 세게 움켜쥐며 차갑게 웃었다.
“제가 강 변호사님에게 부탁했나요? 강 변호사님이 무슨 자격으로 저희 오빠의 사건을 입에 담는 거죠?”
한예빈이 고개를 들며 증오심을 내비쳤다.
“강 변호사님이 어떤 방법으로 지금처럼 부귀영화를 누리게 됐는지 잊은 건 아니죠?”
강윤오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게 무슨 말이야?”
“저는 강 변호사님과 싸우고 싶지 않아요.”
한예빈은 깊이 숨을 들이마시며 자신의 감정을 억눌렀다. 고개를 돌려 지형준을 바라봤을 때, 그녀는 다시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지 변호사님, 저희는 계속 얘기 나누도록 하죠...”
지형준은 감히 그 사건을 맡을 엄두가 나지 않아 멋쩍게 웃으며 난감한 듯이 말했다.
“한예빈 씨, 죄송합니다. 이 의뢰는 거절해야 할 것 같네요. 그러니...”
한예빈은 표정이 굳으며 서서히 눈빛이 어두워졌다.
그녀는 끈질기게 구는 사람이 아니었기에 거절당하자 더는 설득하려고 하지 않고 서류를 챙겨서 떠나려고 했다.
강윤오의 곁을 지나칠 때 한예빈은 턱을 살짝 들었다. 그녀는 마치 강윤오가 아무 의미 없는 존재인 것처럼 그를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강윤오는 그 자리에 서서 한예빈의 꼿꼿한 뒷모습을 바라보며 주먹을 쥐었다.
한예빈이 무슨 자격으로 그를 미워한단 말인가?
상대를 미워해야 할 사람은 오히려 그인데 말이다.
‘한예빈, 너는 진짜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잔인하네.’
사무실로 돌아간 뒤 강윤오는 지형준에게 한예훈의 사건을 한번 얘기해 보라고 했다.
지형준은 비록 어리둥절한 상태였지만 감히 토를 달지는 못하고 순순히 한예훈의 사건을 정리해서 설명해 주었다.
“이 사건은 지 변호사님이 맡도록 해요.”
강윤오가 갑자기 말했다.
“네?”
지형준은 당황하여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어 강윤오를 바라보았다가 그의 싸늘한 눈빛을 보고 흠칫했다.
“왜요? 자신 없어요?”
강윤오가 눈을 가늘게 떴다.
지형준은 자신 있다고 큰소리치는 대신 솔직한 마음을 얘기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상당히 까다로운 사건이라 승소하기 쉽지 않을 것 같아요...”
강윤오는 손끝으로 테이블을 툭툭 두드렸다. 아주 잠깐이지만 그는 자기가 처리하겠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6년 전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고 다른 사람과 결혼했던 한예빈을 생각하며 목 끝까지 차올랐던 말을 다시 삼켰다.
강윤오가 갑자기 차갑게 웃었다.
“그럼 마음대로 해요.”
“...”
지형준은 당황했다. 사건을 맡으라는 건지, 말라는 건지 알 수 없었다.
...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한예빈은 로펌 건물 밖 벤치에 앉아 고개를 든 채 차가운 빗물에 뺨이 젖어가는 걸 느꼈다.
이때 갑자기 휴대폰이 울렸다.
“한예빈 씨, 여음이 깨어났어요. 좀 안정되면 수술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아요.”
간호사의 목소리가 전화 너머에서 들려왔다.
“그러니 최대한 빨리 수술 비용을 마련하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전화를 끊는 순간, 한예빈의 눈앞에 돈다발이 쌓여있는 모습이 그려졌다.
아직 8천만 원이 부족했다.
누구한테 8천만 원을 빌려야 할까?
그녀의 친구들 중 돈을 빌려줄 수 있는 사람은 정은서뿐이었다. 다른 친구들은 6년 전 한씨 가문이 망했을 때 모두 그녀를 멀리했다.
그래서 지금 그녀를 구해줄 수 있는 건 노수환뿐이었다.
한예빈은 눈을 감고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노수환 씨...”
한예빈은 한없이 차분한 자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오늘 저녁에 시간 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