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화
날이 점점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한예빈은 한때 자주 가던 레스토랑 앞에 서서 자기도 모르게 치맛자락에 잡힌 주름을 매만졌다.
금빛으로 된 간판이 조명 아래서 눈부시게 빛났다. 예전과 달리 지금의 한예빈은 한씨 가문 딸이 아니라 노수환의 손님으로 그곳에 발을 들였다.
직원이 한예빈을 방으로 안내해 주었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멈추자 안에서 노수환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세요.”
문이 열리는 순간, 한예빈의 입가에 걸렸던 미소가 사라졌다.
방 안에서는 강윤오가 늘씬한 손가락으로 무심하게 술잔을 들어 흔들고 있었다. 한예빈을 본 순간, 술잔을 쥔 그의 손에 별안간 힘이 들어갔고 유리잔에 그 모습이 그대로 비쳤다.
“강 변호사님, 죄송해요. 제가 오늘 예빈이랑 약속이 있었다는 사실을 얘기하는 걸 깜빡했네요.”
노수환이 사과했다. 그러나 그의 움직임에서 미안함이라고는 눈곱만치도 느껴지지 않았다.
노수환은 한예빈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예빈아, 이리 와서 앉아.”
샹들리에의 빛이 한예빈의 흰 피부 위로 내려앉았다. 한예빈은 하이힐을 신고 천천히 걸어가 자리에 앉았다. 치마가 옆으로 퍼졌다가 다시 모여지는 그 모습이 마치 강제로 꺾인 장미꽃 같아 보였다.
“강 변호사님과 같이 식사해도 괜찮지?”
노수환이 한예빈의 허리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한예빈은 허리에서 느껴지는 불편함을 참으며 고개를 살짝 돌렸다. 양옆으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그녀의 눈동자 속 한기를 감추었다.
“그럼요. 제 눈에는 오로지 수환 씨뿐이라서...”
말을 마치기도 전에 한예빈은 노수환의 품에 안겨 그의 향수 냄새를 맡게 되었다.
강윤오는 노수환이 한예빈의 목 언저리에 얼굴을 파묻고 그녀의 향기를 맡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두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는 테이블을 엎고 싶은 충동을 필사적으로 억누르면서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다들 왔으니 이제 주문하죠.”
노수환은 한예빈을 놓아준 뒤 직원을 불렀다.
“예빈아, 뭐 먹고 싶어? 네가 먹고 싶은 걸로 시켜.”
“수환 씨가 주문하면 돼요. 저는 가리는 거 없어요.”
한예빈은 얌전히 메뉴판을 노수환에게 건넸다. 그러면서 노수환을 굉장히 좋아하는 것처럼 줄곧 노수환만 쳐다봤다.
노수환은 그녀의 눈빛에 기분이 좋아졌는지 메뉴판을 건네받고서 자신이 자주 주문했던 요리들을 주문했다.
한예빈의 눈빛을 바라보던 강윤오는 일부러 그녀가 제일 싫어하던 블루 치즈와 푸아그라를 시켰다.
강윤오는 한예빈의 입맛을 완전히 파악하고 있었다.
입맛이 상당히 까다로운 편이면서 남자에게 꼬리를 치려고 가리는 게 없다고 말하는 걸 보니 강윤오는 속이 뒤틀렸다.
그러나 그것들을 주문하고 나니 또 마음에 걸렸다.
조금 전 노수환이 주문한 것들은 전부 매운 음식들이었는데 한예빈은 매운 걸 잘 먹지 못했다.
그래서 강윤오는 다시 직원을 불러 트러플 크림 리조또와 화이트 와인을 주문했다.
그것들은 예전에 한예빈이 이 레스토랑에 올 때마다 빼놓지 않고 주문하던 것이었다.
음식들이 올라온 뒤 한예빈은 트러플 크림 리조또를 잠시 바라보았다.
귀하게 자란 한씨 가문의 아가씨였을 때 그녀는 자주 강윤오와 함께 이 레스토랑에 왔었고 당시 주문은 강윤오가 전적으로 책임졌었다.
그래서 강윤오는 한예빈의 취향을 잘 알고 있었다.
‘이건... 윤오 씨가 시킨 건가?’
한예빈은 그런 의문이 들었지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노수환 씨 아내분 사건 말입니다.”
강윤오가 갑자기 스테이크를 썰면서 말했다.
“부검 결과 차 안에서 사망한 걸로 볼 수 없습니다.”
노수환은 포크를 들고 잠시 멈칫했다.
“강 변호사님, 잘못 기억하셨나 봐요. 경찰 쪽 보고서에 똑똑히 적혀 있는데요.”
“그래요?”
강윤오는 잔을 흔들면서 한예빈을 빤히 바라보았다.
“저는 목격자가 말을 바꾸었다고 전해 들었어요.”
한예빈은 리조또를 입에 넣다가 그 말을 듣고 하마터면 혀를 깨물 뻔했다.
그녀는 강윤오의 경고하는 듯한 눈빛을 보고 무엇 때문에 그가 하필 지금 이때 그 사건을 언급했는지를 깨달았다.
강윤오는 노수환이 아주 위험한 사람이라는 걸 그녀에게 알려주고 있었다.
“일단 식사부터 하죠. 괜히 기분만 안 좋고 입맛도 떨어지는 것 같으니까요.”
노수환은 웃으며 강윤오에게 술을 따라주더니 이내 매운 갈비찜을 집어 한예빈의 그릇 위에 놓아주면서 말했다.
“이거 먹어 봐.”
한예빈은 안색 하나 바뀌지 않고 예전에 기피했던 매운 음식을 먹었다.
순간 강윤오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예전에 한예빈은 조금이라도 매운 음식을 먹으면 물을 최소 두 컵은 들이켰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한예빈은 노수환을 향해 눈웃음을 지었다.
“맛있어요. 고마워요, 수환 씨.”
노수환은 푹 빠진 듯한 눈빛으로 한예빈의 예쁜 얼굴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그는 우아하게 잔을 들며 그녀의 입가에 라피뜨를 가져다 댔다.
“마셔볼래? 너처럼 사람을 취하게 만드는 술이야.”
한예빈은 살짝 고개를 숙이며 와인을 마셨다. 붉은 와인이 그녀의 입술에 묻으며 매혹적인 광택을 만들었다.
한예빈은 고개를 들고 매력적으로 웃어 보였다.
“취향이 고급스러우시군요.”
“한예빈 씨는 결혼하셨나요?”
강윤오의 싸늘한 목소리가 화기애애하던 분위기를 망쳤다.
샹들리에의 빛이 강윤오의 눈동자 속에서 날카로운 파편처럼 쪼개지는 것만 같았다.
한예빈은 아주 살짝 흠칫했지만 이내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강 변호사님, 지금 호구 조사하시는 건가요?”
“아이는 있으세요?”
강윤오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 캐물었다. 그의 목소리에 위험한 감정이 억눌려 있는 것 같았다.
강윤오의 말은 날카로운 칼이 되어 한예빈의 가면을 단숨에 꿰뚫었다.
‘아이가 있냐고? 지금 나한테 감히 아이가 있냐고 물은 거야?’
한예빈이 위험을 무릅쓰고 그들의 딸을 낳을 때 강윤오는 한씨 가문 사람들을 배신해서 얻은 피 묻은 돈으로 해외연수를 떠났었다.
탁!
한예빈은 강윤오의 벌게진 눈을 직시하며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면 강 변호사님은요? 사랑하는 사람은 있어요? 그 사람과 평생 함께하겠다고 맹세한 적은 있나요? 돈과 사랑 중에 강 변호사님은 뭘 선택하셨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