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화
이시헌은 나를 침실에 가둔 채, 내가 아무리 불러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버렸다.
목이 완전히 쉬고 피로와 허기에 몸이 둔해질 때까지 소리쳐 부른 뒤에야 나는 더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멈췄다
그때 알림음이 울렸다.
무감각한 손으로 휴대폰을 집어 드니 시어머니의 인스타그램에 새 게시물이 올라와 있는 게 보였다.
[우리 곧 한 가족이 되겠네?]
함께 첨부한 사진에는 시어머니와 임유정이 나란히 있었다.
그 아래에는 이씨 가문 사람들과 이시헌의 지인들이 남긴 축하 댓글이 줄지어 달려 있었다.
나를 냉대하던 것과는 달리, 시어머니는 임유정을 다정하게 끌어안고 있었다.
두 사람은 꼭 친엄마와 딸처럼 보였다.
임유정의 손에 끼워진 반지는 화려하고 눈부셨으며 옆면에는 이씨 가문의 이니셜이 또렷하게 새겨져 있었다.
나는 멍하니 고개를 숙여 내 손에 끼워진 반지를 바라봤다.
그 반지는 이시헌이 내게 이씨 가문 며느리를 상징하는 반지라며 청혼할 때 건네준 것이었다.
그런데 이제 임유정의 손에도 똑같은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나는 손을 들어 반지를 빼내고는 가볍게 힘을 주어 꺾었다. 그러자 다이아몬드와 링이 허무하게 분리됐다.
그제야 알았다.
이 ‘이씨 가문 며느리의 상징’이라는 반지조차 이시헌이 따로 제작하게 한 가짜였다는 것을.
그와 나 사이의 모든 연결은 처음부터 끝까지 거짓이었다.
나는 반지를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그리고 베개에 얼굴을 파묻은 채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이시헌, 어떻게 나한테 이렇게까지 잔인할 수가 있어?’
그때, 따뜻하고 길쭉한 손이 얼굴을 스치더니 나를 끌어안고는 다정하게 달래주었다.
“다희야, 아까는 그냥 장난 좀 친 건데 왜 이렇게 울어?”
이시헌과 거의 똑같은 목소리였으나 그의 몸에서는 이시헌이 유독 싫어하는 백합꽃 향이 섞여 있었다.
이시우였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속이 뒤집혔다.
내가 그를 밀어내려 했지만 그는 협탁 위에 있던 합의서를 집어 들었다.
“이것만 사인해, 다희야. 말 들어.”
내가 겁먹었다고 생각했는지 이시우의 목소리에는 묘하게 가벼운 기운이 섞여 있었다.
그가 합의서를 들었을 때, 그 아래에 있던 종이 한 장이 함께 바닥으로 떨어졌다.
어제 아무 생각 없이 협탁 위에 올려두었던 임신확인서였다.
‘저것만 보면 내가 자기 아이를 임신했다는 걸 바로 알 수 있을 텐데...’
하지만 이시우는 그것을 힐끗 쳐다보더니 그대로 발로 밟아버렸다.
“이런 쓰레기는 어디서 나온 거야. 다희야, 언제부터 이렇게 지저분해졌어?”
임신확인서 뒷면에 선명하게 찍힌 신발 자국을 보는 순간, 내 심장도 함께 짓밟힌 것 같았다.
‘됐어. 어차피 떠날 거잖아. 이 아이에 대해서도 말해줄 필요 없어.’
나는 고개를 숙인 채 종이를 집어 들어 쓰레기통에 던졌다.
“난 늘 깔끔했어. 다른 사람이 건드린 남자는 필요 없고.”
이시우의 얼굴에 있던 미소가 굳어졌다.
그리고 그의 시선이 나를 탐색하듯 훑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정면으로 맞설 용기는 없는지, 이시우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억지로 나를 데리고 나가 바람을 쐬자고 했다.
차는 인적 드문 외진 곳으로 향했다.
그러다 갑자기 타이어에 문제가 생겼고 이시우는 나를 남겨둔 채 근처 주유소로 도움을 청하러 갔다.
불길한 예감이 스친 나는 가방 속에 숨겨둔 단검을 조용히 움켜쥐었다.
잠시 후,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사람들이 몰려나와 차를 미친 듯이 두드리기 시작했다.
창문이 깨지며 날카로운 유리가 내 얼굴을 스쳤다.
망가진 창문 사이로 손들이 뻗어 나와 내 팔을 붙잡고 나를 밖으로 끌어당겼다.
깨진 유리가 피부를 베어냈지만 아픔을 느낄 겨를도 없이 나는 필사적으로 버텼다.
하지만 혼자의 힘으로는 여러 명을 이길 수 없었기에 결국 나는 차창 밖으로 끌려 나와 땅바닥에 거칠게 내던져졌다.
선두에 선 남자는 야구방망이를 들고 사악한 웃음을 지으며 다가왔다.
“이 여자가 로즈파의 후계자라고? 아주 예쁘게 생겼네. 얘들아, 복수하기 전에 이 여자랑 실컷 한번 즐겨볼까?”
곧 그들이 나를 둘러쌌다.
그 손들이 내 몸에 닿기 직전 나는 숨겨두었던 칼로 그들의 우두머리를 찔렀다.
한때 마피아 조직의 후계자였던 나는 누군가의 구원만 기다리는 여자 따위가 아니었다.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고 수많은 야구방망이가 내 몸 위로 쏟아졌다.
통증이 온몸을 파고들었지만 나는 이를 악물고 끝까지 맞섰다.
그러다 갑자기 야구방망이 하나가 뒤통수를 강타했고 휘몰아치듯 밀려오는 강렬한 고통에 나는 거의 서 있을 수조차 없었다.
의식이 꺼져가기 직전, 나는 이시우가 다급하게 내 쪽으로 달려오는 모습을 희미하게 보았다.
그리고 목이 터져라 외치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임다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