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화
이시현은 제대로 듣지 못한 듯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뭐라고?”
“아무것도 아니야.”
서고은은 맨발로 침대에서 내려왔다. 눈처럼 새하얀 발이 부드러운 카펫 위를 스쳤다.
이시현의 눈빛이 어두워지며 그는 엄지로 그녀의 붉게 부은 입술을 가볍게 문질렀다.
“얌전히 있어, 말썽 피우지 말고.”
문이 닫히는 순간, 서고은의 얼굴에 걸려 있던 미소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녀는 바로 차를 불러 그의 뒤를 따라갔다.
반 시간 뒤, 차는 호텔 앞에 멈춰 섰다.
빗발 너머로 하얀 원피스를 입은 임단비가 호텔 정문에서 뛰어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이시현은 급히 다가가 자기 정장 상의를 벗어 임단비의 어깨에 덮어 주고, 그대로 그녀를 번쩍 안아 올렸다.
“밖이 추운데 왜 옷도 제대로 안 입고 나왔어?”
그의 행동은 마치 수백 번도 넘게 반복해 온 것처럼 너무나 익숙했다.
서고은은 차 문손잡이를 꽉 움켜쥐었다. 손끝에 힘이 들어가 손톱이 손바닥에 깊게 파고들었다.
이시현이 임단비를 조심스럽게 안아 호텔 안으로 사라지는 뒷모습을 보며, 서고은은 문득 그를 처음 만났던 날이 떠올랐다.
그때 서고은과 서동수의 사이는 최악이었다. 또다시 서동수의 머리를 깨뜨릴 정도로 싸운 끝에, 서동수는 그녀가 성격을 고치도록 친구 아들의 회사에 보내버렸다.
처음 만났을 때 이시현은 은성 그룹 최고층 사무실에서 금테 안경 너머로 얼음장같이 차가운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서고은은 당연히 그곳에 있기 싫었고 별의별 방법으로 말썽을 피웠다.
출근 첫날, 서고은은 이시현의 수백만 원짜리 맞춤 정장에 커피를 쏟았다.
이시현은 단지 그녀를 가볍게 스쳐보며 말했다.
“이탈리아에서 공수한 캐시미어야. 월급에서 까도록 하지.”
둘째 날, 서고은은 일부러 회의 자료를 문서 파쇄기에 넣어 없애버렸다. 하지만 이시현이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모든 내용을 통째로 읊어내자, 회의실의 모든 임원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셋째 날, 서고은은 이시현의 커피에 약을 타고 카메라를 세팅해 그의 추한 모습을 찍어 협박하려 했다.
그러나 결과는 정반대로 그에게는 오히려 그 약이 ‘해독제’가 되어버렸고, 다음 날 아침 그녀가 눈을 떴을 때는 온몸이 뻐근해 넋이 나갈 지경이었다.
서고은이 분노로 이를 갈며 그를 죽여버리겠다고 달려들자, 이시현은 그녀를 통유리 앞에 세워두고 또 한 번 그녀를 무너뜨렸다.
“고은아.”
그는 그녀의 귓불을 물며 쉰 목소리로 속삭였다.
“말 잘 들어야지.”
‘고은아’라고 부르는 그 한마디에 그녀는 완전히 무너져버렸다.
엄마가 죽고 난 뒤, 누구도 그렇게 불러준 적이 없었다.
그날 이후 그들의 관계는 완전히 달라졌다. 서고은이 말썽을 부릴 때마다 이시현은 그녀를 사무실로 둘러업고 들어갔다. 외부 사람들은 그가 그녀를 혼내려는 줄 알았지만, 실상은 그녀를 책상 위에 눕혀 다리가 풀릴 때까지 사랑을 나누는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서고은은 점점 더 이시현에게 빠져들었다.
그가 너무 잘해서일까? 아니면 그녀가 너무 외로워서일까?
서고은은 알 수 없었다. 단지, 그녀가 이시현에게 빠져버렸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그래서 이시현의 생일날, 서고은은 하루 종일 별장을 꾸몄다. 장미, 촛불, 음악과 심지어 프러포즈 반지까지 준비해 두었다.
서고은은 밤새 촛불이 타서 꺼지고, 장미가 시들어가도록 이시현을 기다렸지만 그는 끝내 오지 않았다.
새벽 세 시.
갑자기 휴대폰에 뉴스 알림이 떴다.
[재벌 대기업 대표, 한밤중에 첫사랑을 공항에서 마중]
사진 속의 이시현은 하얀 원피스의 여자를 차에 태우며 눈빛마저 너무나도 다정했다.
뉴스의 댓글 창은 폭발했다.
[대기업 대표와 청순한 미모의 여인이라니, 응원해요.]
[이시현과 임단비? 둘 다 우리 학교 전설의 얼짱이었어요!]
[내가 같은 학교였는데 진짜예요! 이시현은 누구한테나 차갑고 무뚝뚝했는데 임단비한테만 웃었어요! 임단비가 몸이 안 좋아서 해외로 요양만 안 갔으면 벌써 결혼했을걸요?]
휴대폰이 ‘탁’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서고은은 눈을 의심했다.
‘만약 이시현의 마음속에 이미 다른 여자가 있었다면 그러면 나는 뭐였지? 부르면 달려오는 잠자리 상대?’
떨리는 손으로 이시현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계속 연결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전화가 끊기자, 서고은은 휴대폰을 내려놓고 그가 절대 들어오지 못하게 하던 서재로 향했다.
문을 여는 순간, 서고은은 벼락을 맞은 듯 정신이 멍해졌다.
안에는 온통 임단비의 사진으로 가득했다. 졸업 사진, 여행 사진, 심지어 잠든 얼굴을 찍은 몰카까지.
늘 차갑고 절제된 이시현이 이런 집착을 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더는 어떤 대답도 필요 없이 이미 모든 게 눈앞에 선명했다.
서고은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텅 빈 방 안에 울리는 웃음소리는 아프도록 날카로웠다.
웃다 보면 뜨거운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녀는 그렇게 눈물을 흘리며 별장 전체를 때려 부쉈다.
다음 날 이시현이 돌아오자, 눈앞의 난장판을 보고도 그는 그저 평온하게 청소를 지시할 뿐 서고은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마치 그녀가 이런 짓을 하는 것이 일상적인 일인 듯 그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서고은은 가정부가 자신이 정성껏 준비한 프러포즈 반지를 쓰레기로 쓸어 담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
그 상자 안에 무엇이 들어 있었는지, 서고은이 이시현과 평생 함께하려 했다는 것, 그리고 그 반지가 버려지는 순간, 그녀 역시 그에 대한 사랑을 그만두기로 결심했다는 것도 이시현은 알지 못했다.
“아가씨, 어디로 가세요?”
운전기사의 목소리가 서고은을 현실로 끌어왔다.
“집으로요.”
눈을 뜨고 서고은은 냉정하게 말했다.
“서씨 가문 별장으로 가주세요.”
서씨 가문 별장에 도착하자마자, 서동수가 다가왔다.
“고은아, 너 정말로 제주도에 시집갈 거니?”
계단 위에서 계모도 기대 섞인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봤다.
“네.”
서고은의 눈빛이 차갑게 식었다.
“하지만 조건이 있다고 했잖아요.”
“조건? 얼른 말해봐!”
그녀는 한 글자 한 글자 또렷하게 말했다.
“나는 당신과의 부녀 관계를 끊을 거예요.”
순간 공기가 얼어붙었다.
얼굴이 급격히 굳으며 서동수가 소리쳤다.
“네가 단단히 미쳤구나!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기나 해?”
“너무 잘 알고 있어요.”
서고은의 목소리는 한겨울 얼음처럼 차가웠다.
“당신은 불륜을 저질렀고, 그 여자를 위해 우리 엄마를 집어삼킬 만큼 몰아붙였죠. 그 결과 우리 엄마는 세상을 버렸고요. 그날 이후부터 나는 당신을 아버지라고 생각한 적도 없어요.”
그녀는 서동수의 파랗게 질린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제주도에서 거의 죽어가는 재벌가 도련님 집에서 10조 원을 걸고 신부를 찾는다죠, 그렇게 나를 석 달 동안 밀어붙였고요. 내가 거절하면 나를 묶어서라도 보내려고 했나 봐요?”
입꼬리가 차갑게 올라가며 그녀가 말을 이어갔다.
“그렇다면 부녀 관계를 끊든 말든 뭐가 달라지겠어요? 마침, 이 좋은 기회에 당신 애인의 딸을 데려다가 서씨 가문의 아가씨로 만들면 되겠네요.”
서동수는 분노로 몸을 떨었다.
“좋아! 네가 끊겠다면 끊자! 하지만 제주도의 재벌가 도련님이 이번 달도 못 넘길 거 같다던데 너는 반드시 이달 안으로 시집가야 해!”
그는 비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네 새엄마의 딸은 며칠 전에 해외에서 돌아와 호텔에 묵고 있어. 네가 자리를 내어준다니 내일 바로 집으로 들어오면 되겠구나!”
서고은은 냉소를 터뜨렸지만, 심장이 아려 울릴 정도였다.
“남의 딸은 그렇게 챙기면서 정작 친딸은 사랑하지 않는다니, 참 대단하세요.”
그녀가 돌아서려는 순간, 계모 임수연이 억지 미소를 지으며 막아섰다.
“고은아, 어떻게 아버지에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어?”
서고은의 발걸음이 멈췄다.
천천히 고개를 돌리며 수년간 눌러왔던 증오가 눈동자 깊은 곳에서 들끓었다.
“왜요? 내가 시집가서 이 집을 떠나야 당신이 드디어 안주인 행세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그녀는 한 걸음 한 걸음 임수연에게 다가갔다.
“임수연 씨, 잘 들어요. 우리 엄마가 죽었다고 해서 당신이 불륜 상대였다는 사실이 사라지는 건 아니에요. 당신 딸이 서씨 가문 아가씨가 된다고 해도 그 아이에게 찍힌 불륜녀 딸이라는 꼬리표는 절대 지워지지 않아요.”
임수연의 얼굴은 순간 종잇장처럼 하얗게 질렸고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서고은은 그들을 뒤로하고 걸어 나갔다.
발걸음 하나하나가 마치 칼끝을 밟는 듯했다.
방에 도착해 문을 닫는 순간, 그녀는 모든 힘이 빠진 사람처럼 바닥에 주저앉으며 무릎을 끌어안고 얼굴을 깊이 파묻었다.
다음 날 아침, 아래층에서 시끄러운 물건 옮기는 소리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야?”
문을 벌컥 열며 서고은이 짜증스럽게 입을 열었다.
“사람 자는데 왜 이렇게 시끄러워?”
집사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아가씨, 그게 둘째 아가씨가 들어오셔서요...”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익숙한 실루엣이 계단 위에 나타났고 하얀 원피스를 입은 여리여리한 모습의 임단비였다.
서고은은 순간 온몸의 피가 얼어붙은 듯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