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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신지은은 점점 떨리는 자신의 목소리를 스스로도 제어하기 힘들었다. “다시 한번만 더 확인해 주세요. 혹시 착오가 있는 건 아닐까요?” 여자는 몇 번 더 조작해 보더니 이번에는 노골적으로 짜증 섞인 목소리로 고개를 저었다. “동명이인 기록도 없습니다. 이 혼인신고서는 저희 쪽에서 발급한 게 아니에요.” 신지은의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것처럼 멍해졌고 차가운 창구를 짚고서야 겨우 몸을 가눌 수 있었다. 그녀는 최소한 결혼만큼은 강재민이 끝까지 지켜낸 선이라고 믿고 있었다. 이 모든 기만과 연극 속에서 오직 그것만은 진짜라고 믿었다. 동기가 불순했어도, 계산으로 가득 차 있었어도, 그 종이 한 장만큼은 이 절망과 암흑 속에서 그녀가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유일한 현실이었다. 그런데 그마저도 거짓이었다. 안이서를 위해서라면 언제든 아무 부담 없이 빠져나와야 했기에 형식적인 구속조차 신지은에게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정말 빈틈없이 계산했구나.’ 신지은은 쓴웃음을 짓고는 가짜 혼인신고서를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 집에 도착해 문을 열기도 전에 안에서 강재민의 통화 소리가 들려왔다. “엄마, 조금만 더 기다리세요. 회사에는 아직 제가 필요해요.” 신지은은 가만히 서서 그 소리를 듣고 있었고 문을 열려고 들고 있던 열쇠는 허공에 멈췄다. 이내 오수미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새어 나왔다. 그녀는 늘 그렇듯 까다롭고 성급한 말투로 아들을 다그쳤다. “알고 있으면 됐어! 도대체 언제까지 그 귀머거리랑 붙어 있을 거야? 이서 쪽은 다 준비돼 있고 나도 손주 봐야 하는데 설마 진짜 걔랑 평생 갈 생각은 아니지?” 그러자 강재민은 짜증이 난 듯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보청기 곧 도착해요. 조금이라도 들을 수 있게 되고 자리 잡으면 그때 정리할 거예요. 애초에 진짜로 혼인신고 한 것도 아니고 법적으로 부부도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아무런 영향도 없어요.” 신지은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는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갔다. 강재민은 소파에 기대 여전히 통화를 하고 있었는데 신지은이 들어오는 걸 보고도 당황하거나 놀라지 않았다. 그는 그녀가 듣지 못한다고 믿고 있었기에 신지은 앞에서 연기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몇 분 뒤 전화를 끊은 강재민은 냉장고에서 씻어 둔 딸기 한 팩을 꺼냈다. 그리고 다른 손으로는 휴대폰에 글자를 쳐 화면을 그녀에게 보여줬다. [이서 쪽에서 주는 보수가 꽤 좋아. 곧 보청기 살 수 있을 것 같네.] 강재민은 잠시 멈칫하더니 수어로 이런 말을 전했다. [그때 우리 제대로 한 번 축하하자.] ‘축하? 가면을 벗을 수 있게 된 걸 축하하자는 건가? 아니면 나라는 짐이 더는 자기 인생에 방해되지 않게 된 걸 축하하는 거야?’ 신지은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봤다. 지금 강재민의 눈빛은 평소처럼 다정했다. 마치 방금 전 오수미와 통화하던 사람이 다른 인물처럼 보일 정도로. 바로 저 눈빛에 신지은은 이렇게 오래 속고 있었다. 곧, 그녀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자 강재민은 가장 큰 딸기 하나를 집어 신지은의 입가로 가져갔다. 하지만 신지은은 고개를 돌려 피하며 수어로 말했다. [몸이 좀 안 좋네. 나 잠깐 쉬고 싶어.] 강재민은 안도한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딸기를 다시 내려놓고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그 품은 한때 그녀가 가진 유일한 안전지대였으니 신지은은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며 속이 뒤틀리는 듯한 느낌을 꾹 참고 거절하지 않았다. 그때, 갑자기 강재민의 휴대폰 벨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발신자를 확인한 그는 곧바로 그녀를 놓고 일이 생겼다고 수어로 전한 뒤, 외투를 집어 들고 급히 집을 나섰다. 창밖으로 강재민의 뒷모습이 골목 끝으로 사라지는 걸 확인한 뒤, 신지은은 이미 싸 두었던 여행 가방을 꺼냈다. 그리고 추억이 많은 이 집을 단 한 번도 돌아보지 않은 채 공항으로 향하는 택시에 올랐다. 공항은 여기저기서 들리는 방송 소리로 인해 꽤 시끄러웠다. 신지은은 탑승권을 교환하고 보안 검색을 지나 탑승구로 걸어갔다. 그리고 휴대폰을 꺼내 강재민과의 대화창을 열고 음성 버튼을 길게 눌렀다. “강재민, 교통사고가 난 그날부터 내 청력은 이미 돌아왔어. 그러니까 네가 했던 말... 나는 하나도 빠짐없이 다 들었다는 얘기야.” 음성 메시지를 끝으로 신지은은 강재민을 차단하고는 휴대폰 전원을 꺼버렸다. 얼마 후, 신지은은 비행기 좌석에 앉아 안전벨트를 매고 두 눈을 감았다. 이내 엔진의 굉음 속에서 비행기는 천천히 날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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