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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화

소지헌이 주상의 자리에 올랐다. 그는 조연서를 중전으로 봉했으나 대군 시절부터 왕위를 다투기 위해 함께 싸워 온 정실부인 조하연에게는 고작 숙빈의 품계만 내렸다. 교지가 내려온 날 요화전 안에는 죽음이 깃든 것처럼 고요했다. 궁녀들은 모두 고개를 숙인 채 감히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혹여 조하연이 울며불며 난동을 부리거나 물건을 마구 던지며 총애 잃은 후궁들처럼 실성한 행동을 하지나 않을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하연은 그저 평온하게 교지를 받아들였을 뿐이다. “신첩은 주상전하의 은혜에 감사하나이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그 목소리에는 어떠한 기복도 없었고 표정도 담담했으며 심지어 그 아름다운 살굿빛 눈동자에는 슬픔의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몸을 돌려 내전으로 들어가 다시 책을 펼쳤다. 마치 그녀를 정실부인에서 숙빈으로 강등시킨 그 교지가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것처럼. 7일이 지난 후 소지헌이 요화전을 찾았다. 그는 붉은색 곤룡포를 입고 차가운 눈빛을 반짝이며 늠름한 자태로 서 있었는데 그 모습은 설송처럼 고귀하면서도 멀게만 느껴졌다. “하연아.” 그가 낮고 굵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과인의 이 결정에 이견이 있느냐?” 조하연은 황급히 머리를 조아리며 예를 올렸다. “신첩 감히 그럴 수 없사옵니다. 전하께서 언니를 중전으로 책봉하신 것은 명지하신 처사이옵니다. 신첩은... 이의 없나이다.” 소지헌은 그녀의 평온한 얼굴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하연이는 과인이 달래주기를 바라기 때문에 조용히 있으며 술책을 부린 것인가? 과인이 물으면 울고 억울해하며 떼를 쓸 터... 그때 과인이 어사품을 내려주며 엄격히 꾸짖으면 해결되리라.’ “과인이 너를 맞이하던 날부터 말했거늘, 과인의 마음속에는 연서뿐이라. 과인은 너에게 부귀영화는 줄 수 있으나 사랑은 줄 수 없노라. 중전의 자리는 오직 사랑하는 여인에게만 내려줄 것이다.” ‘이렇게 은혜를 내려주며 위엄을 보여주면 이 일은 지나가겠지.’ 그런데 조하연은 정말로 개의치 않는 듯했다. 비록 그녀가 별다른 말썽을 일으키지 않고, 그가 했던 말을 마음에 새겨 두어 감히 더는 바라지 않음을 보여주었으나 소지헌의 마음은 왠지 모르게 불편해졌다. 그녀의 이렇듯 무심한 모습이 그의 심기를 건드린 것이다. “전하, 소인이 물건을 가져왔나이다.” 상선 이덕수가 궁인들을 이끌고 비단 보자기에 싼 상자를 들고 줄지어 들어왔다. 상자를 열자 안에는 티끌 하나 없이 새하얀, 최상급의 흰 여우 가죽이 들어있었다. 이는 소지헌이 며칠 전 직접 사냥하여 얻은 것으로 보상 삼아 조하연에게 내리려던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그 모습에 그는 문득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망설였다. ‘참나, 하사품만 내리고 가야겠다.’ 그가 막 입을 열려 할 때 조하연이 먼저 말했다. “이 가죽들이 참 훌륭하옵니다.” 그녀는 흰 여우 가죽을 보며 감탄했지만 그 얼굴에는 기뻐하는 표정이 없었다. “전하께서 앞서 사냥하신 것이옵니까? 신첩에게 가져오신 것은 혹여 신첩이 언니를 위해 쓰개치마를 만들게 하시려는 것이옵니까?” 소지헌은 마음이 더 불편해졌다. “어찌하여... 이것이 과인이 네게 직접 하사하는 것으로 생각지 않느냐?” 조하연은 황급히 몸을 떨며 머리를 조아렸다. “전하, 용서하소서. 신첩이 어찌 그리 주제넘은 생각을 하겠사옵니까? 전하께서 이르시길, 전하의 사랑은 오직 언니께만 속한다고 하셨사옵니다. 며칠 전 애써 귀한 흰 여우를 사냥하신 것은 필시 언니께 드리려는 것일 터, 신첩은 감히 주제넘은 생각을 할 엄두도 못 냈나이다.” 이덕수가 설명하려고 입을 열었다. “마마, 실은 이것이 전하께서 특별히...” “이덕수.” 소지헌이 그를 가로막으며 차갑게 말했다. 이덕수는 즉시 입을 다물었다. 소지헌은 무릎 꿇은 조하연을 바라보며 마음속에서 분노의 불길이 더욱 거세게 타올랐다. “그리 생각한다면...” 그의 목소리는 얼음장 같았다. “내일 해가 지기 전까지 만들어내거라. 날이 점점 추워지는데 중전은 몸이 허약해 추위를 견디지 못할 것이니라.” “신첩 명을 받들겠나이다.” 조하연이 고개를 숙여 답했다. 소지헌은 그녀의 순종적인 모습에 오히려 더 화가 치밀었다. 그는 홱 돌아서며 큰 걸음으로 요화전을 나갔다. 조하연은 일어나 그의 뒷모습을 보며 잠시 의아해했으나 곧 평정을 되찾았다. 그녀는 시녀 청하를 불렀다. “바늘과 실을 가져오너라.” “예, 마마.” 청하가 바느질 도구를 가져오자 조하연은 창가에 앉아 쓰개치마를 만들기 시작했다. 창밖으로 햇살이 쏟아져 그녀의 가느다란 손가락 위에 내리 앉았고, 바늘과 실이 쉴 새 없이 오가며 능숙한 바느질 솜씨를 드러냈다. “마마.” 청하가 나지막이 물었다. “마마께서는 정말로 서운하지 않으신 것입니까?” 조하연의 손이 잠시 멈칫하더니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는 옅었으나 마치 얼음이 녹아내리는 것처럼 아름다웠다. “슬프다니?” 그녀가 나지막이 말했다. “어찌 슬퍼해야 한단 말이냐?” 다섯 날 후면 그녀의 몸 안에서 가사약이 발동할 것이다. 조하연은 마침내 궁궐과 소지헌을 완전히 벗어나 자신이 진정으로 사랑하는 이를 찾아 강남으로 갈 수 있었다. 조하연과 조연서는 영의정 댁의 규슈였으나 그녀는 서녀였고, 어려서부터 몸이 허약하여 강남에 있는 할머니의 손에서 자랐다. 강남에서 그녀는 심정우를 만났다. 그는 강남 관찰사의 아들로 성격이 옥처럼 부드러웠고 공부에도 재주가 뛰어났다. 그들은 어린 시절부터 함께 글을 읽고 꽃을 감상하며 강남의 비 내리는 풍경을 함께 보았다. 심정우는 조하연의 손을 잡고 맹세했었다. “하연 낭자, 나중에 계례를 올리면 내가 낭자를 부인으로 맞이하겠소.” 조하연은 얼굴을 붉히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계례를 맞이하던 날, 심씨 가문에서 혼담을 준비할 때 아버지는 갑자기 사람을 보내 그녀를 한양으로 불러들였다. 그녀를 셋째 대군 소지헌에게 시집보내려 했던 것이다. 당시 궁에서 주상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 경쟁이 치열했는데 주상 전하께서는 각 대군에게 중신의 규슈를 정실부인으로 내려주었다. 소지헌에게 배정된 것이 바로 영의정 댁의 규슈였다. 소지헌이 마음에 둔 것은 그녀의 친언니인 조연서였으나 그는 당시의 상황이 얼마나 위험한지 잘 알고 있었다. 조연서를 정실로 삼는 것은 곧 그녀를 칼날 위로 올려놓는 것과 같았다. 그리하여 그는 조연서에게 서출 동생이 한 명 있는데 강남에서 자랐다는 말을 듣고 조하연을 요구했다. 조하연은 동의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버지는 심정우의 목숨으로 그녀를 협박했다. “네가 시집가지 않겠다고 고집부리면 심씨 가문을 멸문시킬 것이다.” 마지막에 아버지는 약조했다. “셋째 대군이 주상의 자리에 오르면 네게 가사약을 주리라. 이 약을 먹으면 죽은 것처럼 될 터, 그때 가서 너는 궁궐을 떠나 심정우를 찾아갈 수 있을 것이다.” 조하연은 그 약조를 받아들이고 소지헌과 혼인했다. 혼인 후, 궁궐 안은 위기가 끊이지 않았다. 자객의 습격, 독살 시도, 모함... 그녀는 수많은 상처를 입었고, 여러 번 중독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한 번도 원망하지 않았다. 그녀는 대군 저택의 모든 살림을 빈틈없이 처리하는 현숙한 부인이 되었다. 소지헌이 희귀한 약재가 필요하면 목숨을 걸고 찾아왔고, 적의 함정에 빠졌을 때 조하연은 소지헌 대신 칼을 막아주었다. 언제부터인가 저택에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군부인이 대군을 너무나도 사랑한다고 말이다. 조하연은 설명할 수 없었다. 그녀는 그저 목숨을 걸고 그가 주상의 자리에 오르도록 도운 뒤, 심정우를 찾을 생각뿐이었다.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 소지헌이 주상전하가 되었고 조연서가 중전이 되었다. 그리고 그녀는 이틀 전, 그 가사약을 삼켰다. 약효가 발현하는 데는 7일이 걸린다. 이제 남은 시간은 5일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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